55. 우리, 데이트할래?
도어 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준혁은 곧장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지체할 것 없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원래라면 퇴근하기 전까지 몇 번이고 연희에게 연락을 했을 테지만, 오늘은 자고 싶다는 연희의 말에 그마저도 꾹 참았다.
고작 전화 몇 통 안 했을 뿐인데, 연희 없는 하루를 버텨내는 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고 힘들었다.
이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어떤 것에도 제약받지 않고 연희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시간.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연희와 보낼 수 있는 온전한 시간.
준혁은 넥타이를 풀어내며 곧장 침실로 향했다. 그런데 침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예상치도 못하게 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준혁아.”
준혁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았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인영이 눈동자 깊숙이 박혔다.
“……연희야.”
연희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얼굴에서 핏기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연희는 눈이 부시도록 예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준혁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연희를 향해 더딘 걸음을 떼었다.
“일찍 왔네?”
대답하기 무척 쉬운 질문이 날아왔지만, 준혁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연희의 변화가 당혹스러웠다. 그 탓에 입술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없던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 연희는 연정을 잃은 슬픔을 다 털어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싶다가도 아무렴 연희가 괜찮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싶었다.
“응. 아무래도 네가 걱정이 돼서.”
준혁은 마음이 복잡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러자 연희가 아이처럼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애인가.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된다고.”
별거 아닌 대답이었다.
연희의 목소리 또한 무척이나 일상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그 사소한 대답이 준혁의 가슴을 무겁게 내리쳤다.
뿐만 아니라 온몸이 늪에 빨려들어 가는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냥.”
준혁은 탁하게 흐려진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툭, 하고 대답을 내뱉었다.
“그래도 걱정이 돼서.”
그렇게 대답을 하며 준혁은 숨을 멈추었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순식간에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희가 더욱 눈매를 휘어 접는 게 보였다.
“저녁 안 먹었지? 사실 나 자느라 저녁 준비를 못 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연희가 퍽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별안간 마음속에 피어오른 두려움만 아니었더라면 당장에 달려가 입을 맞췄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달싹이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우리, 데이트할래?”
언제나 원하고 바라던 말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줄곧 두려워했던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 같다는 직감이 밀려왔다.
***
“와, 저거 봐, 준혁아. 예쁘다, 그치.”
연희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준혁은 연희의 손가락을 따라 눈길을 돌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사줄까?”
연희가 가리킨 건 큐빅이 예쁘게 박혀 있는 머리핀이었다.
그냥 대충 보기에도 연희에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연희는 제법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 저거 갖고 싶어.”
연희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준혁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곤 머리핀을 사주었다.
만 원을 내고도 거스름돈을 받을 만큼 비싸지 않은 물건인데, 연희는 손에 쥔 핀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기도, 사랑스럽기도 했다.
이 모습을 계속 볼 수만 있다면, 이까짓 핀 백 개도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준혁은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에 조금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원하던 연희와의 소소한 시간이었다.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그 길로 나와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각자 하나씩 손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서로의 손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깍지껴 잡은 채 나란히 걸음을 떼며 거리를 거니는 중이었다.
10년 전에나 했을 법한 데이트였다.
그동안 이게 참 그리웠는데,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데이트를 하면서도 준혁은 충만함은커녕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연희는 무얼 사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혹여나 제게 부담이 되기라도 할까 봐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연희가 이번으로 딱 두 번, 제게 무언가를 사달라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목걸이였고, 두 번째는 지금 연희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핀이었다.
준혁은 정면에 두었던 시선을 연희의 쪽으로 돌려 내렸다.
길을 거닐면서도 핀을 소중하게 바라보고 있는 연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사주었을 때와 겹쳐 보였다.
그저 정말 가지고 싶어서 이야기한 걸 수도 있고, 자신이 사준 물건이니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는데.
근데 꼭 지난번의 일이 되풀이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지워낼 수가 없었다.
“되게 마음에 드나 보네.”
준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반쯤 넋을 놓고 있던 연희가 그제야 고개를 들곤 준혁을 보았다.
“응. 예쁘잖아.”
“이런 거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사줄 걸 그랬다. 백 개도 더 사줄 수 있는데.”
“이런 걸 백 개나 사서 뭐 하라고?”
연희는 그 말끝에 무척이나 환하게 웃었다.
준혁은 연희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복권이라도 당첨된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연희가 웃는 모습을 이렇게나 많이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얼굴이 좋아서 그녀를 사랑했고, 이 얼굴이 가슴에 박혀서 10년이 넘도록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때 묻지 않은, 연희만의 이 환한 미소가 미치도록 좋아서 제 평생 여자는 신연희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마음은 연희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이렇게까지 집요해질 수도 있었고, 그랬기에 제 모든 걸 다 버려야 한대도 그녀의 웃음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던 거였다.
준혁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연희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고.
만에 하나 그녀가 지난번처럼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웃고 있는 거라면…….
“매일 하나씩 머리에 꽂으면 되지.”
“백 개면, 백 일 동안 하나씩?”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은 말에 천진난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연희의 입가엔 여전히 아이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준혁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조금은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네가 원하면 이런 거, 평생 사줄 수 있어.”
그 말을 끝으로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 말 안에 담긴 진짜 뜻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의미 없이 툭 던진 대답 정도로, 연희가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랐다.
그래야만 그녀의 생각이 담긴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대답은 곧 돌아왔다.
여전히 순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가 갖고 싶다고 하면 다 사줄 거야?”
“응. 그게 뭐든 다.”
“그 말 되게 위험할 수 있는 말인 건 알아? 내가 갖고 싶다고 하는 게 엄청 비싼 거면 어쩌려고?”
그래도 상관없어. 내 곁에서 오늘처럼만 예쁘게 웃는 얼굴로 말하는 널 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비싼 거라도 다 사줄 수 있어.
준혁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끝끝내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전한 모든 말 속엔 ‘그러니 오래오래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라는 의미가 숨어있었다.
그 말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부담스럽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재고의 여지도 없이 그녀가 또 제 곁을 떠날 작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연희에게선 천진난만한 모습 외에 다른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로 당분간은 또 이렇게 연희와 함께할 수 있을 모양이라고, 준혁은 그 생각을 속으로 되뇌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불안에 들끓는 마음은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았다.
연희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거란 위로 앞엔 언제나 ‘영원히’가 아닌 ‘아직은’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하면 되지. 네가 갖고 싶다고 하는 게 뭐가 됐든 다 사줄 수 있을 때까지.”
연희는 알고 있을까.
그녀에게 전하는 제 대답엔 언제나 ‘끝’이란 뉘앙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고심하며 단어를 고르는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언제나 그랬다.
연희에게 하는 말은 하나같이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영원할 거란 걸 전제로 두고 있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신연희와 정준혁에게 어떻게 끝이란 게 있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같이 있으면서도 애가 타서 미칠 것 같은데.
그런 자신이 어떻게 연희를 놓을 수가 있을까.
준혁은 목 끝까지 한숨이 차올랐지만, 억지로 참아내며 꽉 잡고 있던 연희의 손을 제 외투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찬 바람에 그녀의 손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연희의 것이라면 그게 뭐든 지키고 싶었다.
그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온기라고 할지라도.
준혁은 걸음을 재촉했다.
이제 그만 연희와 자신이 함께 사는 ‘우리’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