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54)화 (54/80)

54. 지켜낼게요.

“우리 준혁이랑 연희 씨는,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 준혁이는 이미 세라랑 결혼한 거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 이런 상황이 앞으로 알려지게 되기라도 하면 그땐…….”

은하는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쏟아지는 숨의 무게가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혼란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연희는 제게 이런 말을 하는 은하를 차마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하, 정말 미안해요. 연희 씨 위하는 척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나도 내 자식 걱정 때문에 연희 씨 찾아온 거나 다름이 없어.”

은하가 괴로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연희를 마주하고, 감정이 앞선 말의 서두를 꺼낸 지금까지도 은하는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사실 은하는 제 며느리로 어떤 여자가 들어와도 상관없는 입장이었다.

그저 준혁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준혁을 진심으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되었다.

제 남편의 생각은 저와 다를 테지만 은하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랬다.

제 배로 아들 셋을 낳았지만, 그중 준혁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위의 두 형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영특함을 한눈에 보인 탓에 남편을 비롯한 양쪽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 탓에 위의 두 형에게는 시기와 질투를, 집안 어른들에게는 지나친 기대를 사며 어린 나이부터 감당하기 힘든 부담을 견뎌야만 했다.

그래서 은하는 준혁에게 엄격한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만이라도 편한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준혁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대학을 핑계로 도망치듯 집에서 나갔다.

느닷없는 아들의 행동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유일하게 은하만이 준혁을 존중했고, 이해했다.

은하는 집안의 반대에도 꿋꿋이 버티며 준혁의 방패가 되기를 자처했다.

그렇게 겨우 준혁을 밖으로 내보내는 덴 성공했지만, 아슬아슬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준혁은 집을 나간 순간부터 본가에 모든 발길은 물론, 연락까지 독하게 끊어버렸다.

그 사실에 분노한 남편은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준혁을 집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려 했다. 그때마다 단호하게 남편을 막아선 건 은하였다.

그런 식으로 준혁을 불러들여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다른 사람들 눈에 준혁이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은하의 눈에 제 아들은 억지로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엇나가고 튕겨 나가기만 할 아이였다.

그러니 그 문제만큼은 준혁의 생각을 존중해야 하는 게 맞았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저한테까지 독할 정도로 연락하지 않던 준혁이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고, 어른들의 기대에 한발 어긋나지 않는 길을 빠르게 개척해 나아갔다.

은하로서는 그런 준혁이 너무나도 기특했다.

그 이면에 첫사랑인 연희가 이유로 존재한다는 건 며칠 전까지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준혁이 진정 원하는 게 연희라면, 은하는 진심으로 둘의 사랑을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들의 마음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앞서 중요한 건 아들의 안위였다.

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어렵고 힘든 자리였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의 이 자리는 아들을 위해 분명 필요한 자리였고,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 또한 분명하게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아들의 안위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는 연희 하나뿐이었다.

은하는 독하게 마음을 다졌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도대체 준혁이가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백화점 대표로 취임하고 나서부터 조금 이상해요. 한 번도 잡음 만들어낸 적이 없는 아이인데, 우리 회장님이 말씀하시길 계속 준혁이답지 않은 방식으로 일 처리를 하고 있다더라고요. 준혁이한텐 우리 회장님도 있고 나도 있으니 당장 어떻게 되진 않겠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하다간 결국 주주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될 거예요.”

“…….”

“걱정은 안 해요. 늘 알아서 잘해 오던 아이니까, 잠깐 실수한 것뿐일 거라고 믿고 있어요. 우리 준혁이라면 분명 이번 일을 발판 삼아 더 큰 일을 해낼 거예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아이니까.”

“…….”

“그치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은하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감정을 추스른 연희는 퍽 담담한 얼굴을 가장하곤 은하를 오롯이 마주 보았다.

은하가 무척 힘들어하는 게 보였지만, 그녀의 말을 자르지도 그녀를 말리지도 않았다.

분명 이 말의 끝에 은하가 자신을 찾은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말을 굳이 듣지 않아도 은하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지 이미 알 것 같았지만, 연희는 묵묵히 기다렸다.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거기다 최근에 준혁이 입지가 흔들릴 만한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우리 회장님 말로는 그 문제에 최숙희 회장님이 개입되어있는 것 같다고…….”

내도록 담담하기만 하던 연희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준혁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최 회장이 개입된 문제였을 줄이야.

전혀 상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최숙희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자신이 윤세라의 자리를 보란 듯이 차지한 채 버티고 있었고,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준혁이 자신을 돕고 있으니.

지금까지 봐 온 최숙희라면 그 모든 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외적으론 그렇게나 아끼는 손녀의 남편이니 최숙희가 직접적으로 준혁을 건드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목적은 준혁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준혁을 통해 자신을 자극하겠다는 것이 최숙희의 본심이었을 게 분명했다.

“하,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 연희 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정말, 정말 너무…….”

은하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연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 자리에 나왔을 때만 하더라도 불편함은 전부 제 몫인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은하가 저보다 더 불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은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연희는 조금쯤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기분이었다.

10년 전에 다쳤던 마음으로, 지금까지 조금도 아물지 못했던 상처 위로 약이 덧발라진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연희는 어렵지 않게 입술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니요, 어머님. 어머님은 저한테 조금도 미안해할 필요가 없으세요.”

그 말을 하며 연희는 지금껏 은하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빼내어 다시 그녀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은하가 이렇게까지 따뜻한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윤세라로서라도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뵐 것을.

그래도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남자의 모친인데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내 볼걸.

연정의 일부터 이번 일까지, 뒤늦게 후회되는 게 왜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그게 못내 속상해서 잦아든 것 같던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그래도 더 이상 아프진 않았다.

연희는 아래로 내리고 있던 눈동자를 들어 올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근데요…….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미안하다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연희는 은하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오늘 이 자리가 아니었더라도 준혁의 곁에 계속 남아선 안 될 것 같다고,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실을 알고도 역정은커녕 미안하다고 말해주는 은하의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더욱이 연정의 유언이나 다름없던 말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참이었다.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아. 뭘 하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한 선택을 하고, 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을.’

‘…….’

‘엄만 연희, 네가 꼭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는 언제나 응원할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삶.

그게 무엇일까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아직까지도 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어머님이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제가…….”

준혁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저로 인해 그가 다치는 건 더욱이나 원치 않았다.

마음속에 가득한 원망이 복수를 한다고 해서 말끔하게 버려지는 건 아니었다. 복수를 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연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너무 가득하게 들어찬 미움의 감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고작 그걸 위해서 준혁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

그건 최숙희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연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은하의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줄곧 그녀가 느껴왔을 불안이, 이것으로 조금은 덜어지길 바라며.

“제가 꼭 준혁이 지켜낼게요. 꼭, 그렇게 해볼게요.”

그 말을 하며 연희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휘어진 눈매를 타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지만, 진심으로 기뻤다.

드디어 준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기분이었다.

저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 제 손으로 끝내면 될 것이다.

그 끝이 꼭 숙희를 향한 복수의 성공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지켜내는 것이.

그것이 어쩌면 가장 행복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비록 그의 결말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연희는 웃을 수 있었다.

언제나 자신을 지킬 줄만 알았던 남자를 이번엔 자신이 지켜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마지막이라면 가슴은 아플지언정 아주 불행하게만 생각하진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연희는 아주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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