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진심 어린 사과
“왔어요? 미안해요, 갑자기 불러내서.”
연희는 집 근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준혁의 모친, 은하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인사는 됐으니까, 어서 앉아요. 커피 괜찮아요? 좋아하는 차가 있으면 다른 거로 해도 되고요.”
“아무거나 다 좋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은하의 모습에 연희는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커피를 주문한 은하가 연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목이 옥죄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썩 좋은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건 아닌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많이 안 좋네.”
은하는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음색이 어찌나 다정한지, 순간 은하의 위로 준혁의 얼굴이 그려졌다.
모자 관계이니 생김새나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한 건 당연한 거겠지만, 제 앞에서만 보이는 준혁의 다정한 모습이 어쩌면 어머니를 닮아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연희는 슬쩍 고개를 숙이곤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다정한 시어머니여도 시어머니는 시어머니였다.
더욱이 윤세라 역할을 대행하고 있다고는 하나, 며느리로서 잘한 것도 없는데 어른이 먼저 연락을 하게 했다는 것에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굳이 점수를 따지자면 이미 0점짜리 며느리인데, 시어머니 앞에서 죽상까지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연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그러곤 한껏 예의를 차린 목소리를 가장해 말했다.
“아니요.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그보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어머님께서 먼저 연락하시도록 해서 죄송합니다.”
연희는 필요 이상으로 격식을 갖췄다.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그간 봐 왔던 은하는 매사에 신중했고, 또 며느리인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차릴 만큼 고상한 사람이었다.
은하라면 무슨 이유 때문이든 이렇게 갑작스레 연락을 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고민으로 보냈을 것 같았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듯 은하의 눈동자가 복잡한 감정으로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그리 긍정적이진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철모르는 어린 애처럼 해맑게 행동할 순 없었다.
연희는 은하가 입을 열기를 묵묵히 기다렸다.
선뜻 입술을 떼지 못하던 은하가 한숨을 푹 내쉰 건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난 후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은하는 그 말을 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이내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가 연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가씨가 세라가 아니라는 거……, 알고 연락했어요.”
테이블 모서리만 뚫어지게 보던 연희의 눈동자가 그 한 마디에 거칠게 요동쳤다. 심장이 저 아래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이름이 연희 씨, 라고 하던데…….”
며느리로서의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무어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그 생각으로 가득하던 머릿속이 일순 정지되었다.
연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두던 은하가 어느새 고개를 들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연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이 집어삼켜지는 것 같았다.
테이블 아래에 둔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 사람 많은 거리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연희는 무작정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가장 먼저 목 끝을 치고 올라온 말을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너무…….”
“아니요. 아니에요. 그런 말을 들으려고 보자고 한 게 아니에요.”
연희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주어 맞붙였다.
죄스러운 마음에 차마 마주 볼 수 없어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 위로 제 손을 덮고 있는 은하의 손이 보였다.
준혁의 것을 닮은 온기가 손등 위로 스며들었다. 그게 삽시간에 경직된 제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다독여주는 것만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건, 연희 씨가 아니라 나예요. 미안해요. 사실 지난번 자선 경매 행사에서 연희 씨랑 최 회장님이 나누던 대화를 조금 듣게 됐어요. 엿들으려던 건 아닌데, 최 회장님 목소리가 작게 들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이 아무리 생각해도 손녀딸인 세라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닌 거 같아서…….”
“…….”
“솔직히 말하면 결혼하고 처음 집에 왔을 때, 그때부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분명 세라 얼굴은 맞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서……. 내가 그런 거에 좀 예민한 편인데,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고 넘겼거든요. 결혼 후에 처음 오는 시댁이니 긴장해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근데 그날 최 회장님이 하던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까 도저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사람을 통해서 좀 알아봤어요. 그러다, 그 사실을 알게 됐고요.”
연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 은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어떤 식으로 알게 되었든 돈 때문에 양쪽 집안 어른들을 기만한 건 명백한 제 잘못이었고,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어야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되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은하의 마음이 너무나 따뜻했다.
연희는 고개를 더욱 아래로 숙였다.
자신은 은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기만하고 준혁과 결혼한 거로 모자라 제 복수를 위해 준혁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죄를 해도 자신이 하는 게 맞는 거였다.
연희는 맞붙인 입술에 더욱 힘을 주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것만으로도 염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흐느끼는 소리까지 내서 은하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우는 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곧 이어진 은하의 말이 그 노력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연희를 벙찌게 만들었다.
“그리고, 10년 전에 우리 회장님이 사람을 시켜서 연희 씨에게 해선 안 되는 짓을 한 거……, 그것도 정말 미안해요. 그것까지도 이번에야 알게 됐어요. 연희 씨가, 우리 준혁이 첫사랑이라는 것도…….”
“…….”
“그 사실을 알고, 또 어쩌다 연희 씨가 준혁이랑 결혼하게 된 건지, 그 과정까지 알게 되고 나니까 이게 무슨 하늘의 장난인가 싶더라고요…….”
연희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눈물을 멈추려 해도 자꾸만 볼 위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이제는 숨을 쉬는 것조차도 어렵게 느껴졌다.
도대체 은하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알고 있는 건지.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과연 무엇일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들에 미치도록 두려웠다.
“우리 준혁이에게 일부러 접근한 게 아니란 거 알고 있어요. 연희 씨도 몰랐죠? 결혼식장에 와서야 상대가 준혁이란 걸 안 거잖아요. 그렇죠?”
은하가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로 채근하듯 물어왔다.
연희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든 이 상황에서는 변명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겠다고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은하는 연희가 처음 느낀 모습 그대로였다.
조금도 꼬이지 않은 사람.
은하는 잠깐이나마 연희를 그런 사람으로 본 게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10년 전 그때 준혁이를 떠나지도 않았겠죠. 그래서 내 마음이 더 무거워요.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 귀한 줄도 알아야 하는데, 우리 회장님이 본인 욕심 채우느라 연희 씨 인생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으신 거 같아서…….”
은하는 그 말끝에 탄식을 내뱉었다.
진짜 어른의 모습이었다.
조건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상대를 똑같은 한 사람으로서 보고 대할 줄 아는.
그런 은하의 모습이 연희의 마음을 더욱이나 서글프게 울렸다.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해요. 이 말 말고는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너무 미안해요, 연희 씨에게.”
연희는 일 자로 다문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흐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라고, 죄송해야 할 건 오히려 자신이라고. 저는 이렇게 따뜻한 배려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준혁의 가슴에 너무 많은 대못을 박아서 정말 죄송하다고.
그 말을 하고 싶은데, 입 안 가득 들어찬 울음 때문에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연희의 고개가 점점 더 아래로 숙여졌다. 그리고 이내 연희의 손을 붙잡은 은하의 손등 위로, 연희의 이마가 닿았다.
그 순간 억지로 힘주어 붙잡고 있던 연희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연희의 손을 쥔 은하의 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은하는 한마디 말도 없이 연희가 조금이나마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그러곤 한참이 지나 거칠게 흔들리던 연희의 어깨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던 순간.
“연희 씨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정말 염치가 없어요. 근데요. 근데요, 연희 씨…….”
내도록 망설이던 은하의 입술이 무겁게 본론을 꺼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