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늦어버린 고백
“……연희야.”
이른 아침, 연희의 곁을 서성거리던 준혁이 다리를 굽히고 침대맡에 앉았다.
준혁의 눈동자로 비친 건 핏기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연희의 얼굴이었다.
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건지, 연희의 눈 밑이 까맣게 그늘져 있었다.
의미 없이 깜빡이는 눈꺼풀 안의 눈동자는 연정이 떠난 그 날부터 초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벌써 일주일째였다.
연희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다.
준혁은 습관처럼 한숨이 차오르는 걸 느꼈지만, 최선을 다해 삼켜냈다. 그러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연희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말을 건넸다.
“연희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오늘 하루 회사 쉴까 하는데, 바람이라도 쐬러 나갈래?”
어딘지 모를 한 곳만 응시하던 연희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의 눈동자로 비친 건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친 멀끔한 차림의 준혁이었다.
연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뭘 먹고 싶은 생각도, 바람을 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연희는 바짝 말라버린 목을 긁어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나, 괜찮으니까 다녀와.”
고작 이 정도 말만으로도 목이 메어 길게 배웅할 수조차 없었다.
그래도 연희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최선을 다한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태산 같을 그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준혁의 걱정은 연희의 노력으로 덜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역시나 준혁의 목소리가 곧장 잇따랐다.
서두부터가 출근하겠다는 뉘앙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연희는 말없이 눈꺼풀을 내려 닫았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준혁이 곁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그가 곁에 있어 준다고 해서 특별하게 다를 건 없었지만, 적어도 나쁜 생각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연정이 떠난 그 날부터, 줄곧 해선 안 되는 생각이 머릿속에 문득문득 차올랐다.
위험한 충동을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버텼다.
연정이 바라는 게 결코 그건 아닐 거란 생각과 이렇게 자신만 보고 있는 준혁의 곁에서 그런 짓까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말 악착같이 버텼다.
준혁이 출근을 하고 나면 더욱 몸집을 부풀리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고생을 덜어내자고 염치없이 준혁을 곁에 붙잡아둘 순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그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나날이 그의 낯빛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게다가 출근 전에는 물론 퇴근한 후에도 그의 핸드폰이 쉴 틈 없이 울려댔다.
대부분 비서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는데, 그때마다 준혁은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지만 찰나에 어두워지는 표정만큼은 숨기지 못했다.
그게 못내 연희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연정의 일만으로도 너무 벅찬 저에겐 준혁의 짐까지 함께 짊어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나마 자신 때문에 그의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준혁아, 나 졸려.”
연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졸린다는 말이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준혁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짙은 한숨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 수 있었다.
연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억지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밤새 잠이 안 오더니, 이제야 잠이 오네.”
“…….”
“난 좀 자고 있을게. 넌, 얼른 회사 다녀와.”
그 말끝에 연희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순간 연희가 할 수 있는, 정말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준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이 웃어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 때보다도 힘든 아침이 지나고 있었다.
***
준혁이 출근을 하고 텅 비어버린 집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연희는 무거운 정적 속에서 눈꺼풀만 끔뻑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고작 세 번 만에 밤새도록 참았던 눈물이 한 아름 고이기 시작했다.
연희는 습관처럼 몸을 웅크렸다. 연정과 함께 병실에서 보냈던 그 밤을 떠올리며.
그러고 나면 꼭 연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희야.’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불러주던 연정의 목소리.
연희는 매일 연정을 그리워하며 그녀와의 추억을 되짚고 곱씹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떠나는 연정의 길이 너무나도 외로울 것 같아서.
연희는 밀려오는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일자로 닫힌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연정의 품에 안겨 단잠을 이루었던 그 밤, 언제인지도 모르게 연정은 제 곁을 떠나고 없었다.
끝까지 자신의 행복만을 바랐던 엄마는 힘들었을 딸을 품어내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남긴 것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던 ‘기적’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그런데 연희는 그 기적 앞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 하루의 기적을 위해 연정이 제 남은 생을 모조리 끌어다 쓴 것만 같았다.
자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
그게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연정은 기꺼이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연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부모에게 버려진 수많은 아이들을 진심으로 품어낸 거로도 모자라,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음으로 품은 자식은 잘 먹이고 잘 입히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그렇게나 고된 삶의 결과가 췌장암이란 걸 알았을 때도 세상을 향해 원망 한번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병이 자식의 발목을 붙잡은 것 같아 죄스러워하던 사람.
연정은 그렇게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평생을 남을 위해서만 살았던 연정의 마지막 길이 너무나도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삼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내내 식장을 지킨 사람은 자신과 미영, 그리고 준혁뿐이었다.
10년 전 준혁을 떠나기로 결심하며 자신이 모든 인연을 잘라냈듯, 연정 역시 저와 함께하기 위해 그간 쌓아온 연을 단칼에 끊어냈다.
그 이후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준혁이 찾아내기라도 할까 봐 괜한 조바심에 주기적으로 이사까지 감내했었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10년 동안 연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불필요한 인연일 뿐이었다.
항상 제 주변에 울타리를 만들기에 급급했고, 그 누구도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선을 그었다.
그런 제 마음을 알았던 건지, 연정 역시 필요 이상의 관계는 만들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연정의 고충까지 헤아리기엔 제 마음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고 벅차서.
이제 와 이런 죄책감을 안게 될 줄 알았더라면 연정에게 사과 한마디 정도는 했을 텐데.
엄마까지 너무 힘들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연정이라면 그 말에 한 번 웃어주며 엄마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분명 그렇게 이야기해주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연희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고 말았다.
“엄마…….”
“…….”
“……엄마, 엄마.”
연희는 이젠 대답이 없을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 보았다. 그러곤 연정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곱씹었다.
‘네가 행복한 삶을 살아. 뭘 하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한 선택을 하고, 네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인생을.’
응, 엄마. 그렇게 해볼게.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이 어떤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고민해 볼게.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이 듣고 싶어서 엄마는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켜준 걸 텐데, 난 그 쉬운 대답조차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많이 보러 가지 못해서 미안해.
더 많이 웃게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더 좋은 딸이지 못해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그래도 엄마.
그래도,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해요.”
너무 늦어버린 고백을 속삭이며, 연희는 베개 위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연정의 목소리를, 연정의 손길을, 그리고 연정의 따뜻한 품을 떠올리며 추억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정말 연정의 품에 안겨 그녀의 손길을 받고, 사랑한다는 연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 행복을 아낌없이 만끽했다.
이게 자신을 찾아온 마지막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에 누워 애틋하고 소중하기만 한 지금의 순간을 빠짐없이 가슴에 새겼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퉁퉁 부어버린 눈을 다시 떴을 땐 한결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자신을 아직 천국으로 향하지 못한 연정이 기특하다는 듯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연정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조금이나마 홀가분하게 해주기 위해 축 처진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말아야 했다.
여전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연희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집어 든 핸드폰 액정 위로 저장되지 않은 번호 11자리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여보세요.”
잠시 고민하던 연희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곧장 들려온 목소리는.
-아……, 나예요. 내 목소리, 알아듣겠죠?
준혁의 친모이자, 윤세라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는 제 시어머니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