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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50)화 (50/80)
  • 50. 믿을 수 없는 일

    준혁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오전에 올라온 매출과 관련한 자료였다.

    내용 중 한 부분을 차지한 매출 그래프가 지난 분기와 비교해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그랬기에 RM푸드의 식품 성분 문제를 폭로할 당시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대안책을 마련하기도 했던 거였다.

    그런데 마련했던 대안은 기대와 다르게 조금도 힘을 쓰지 못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선 제 백화점의 VIP를 다른 백화점에 뺏겨선 안 되었고, 뺏기지 않기 위해선 그만한 대접을 해줘야 했다.

    그걸 알면서도 HN백화점 매출의 큰 부분을 책임져주던 김태광을 건드린 것이니, 대안을 마련했다고는 하나 이미 예견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준혁은 안경을 벗곤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몰려오는 두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떨어진 매출은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할 자신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급격한 하락 폭과 그 시기가 하필이면 자신이 취임한 이후 첫 분기라는 거였다.

    이번 분기의 실적이 저조하다고 해서 당장 HN백화점이 무너질 리는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입장이었다.

    주주들의 입장은 저와 같을 수가 없었다.

    분명 이 문제가 주주들에게 알려지는 순간, 주주들은 HN백화점이 당장 감당해야 할 손실부터 따질 것이고, 그 상황을 막지 못한 현 대표의 자질 문제를 따질 것이다.

    물론 이번 일로 대표직에서 해임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보란 듯이 이루어온 성과도 있었고, 제 아버지인 정 회장이 쉽게 자신을 내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주주들에게 한 번 잃은 신임은 되찾기까지 꽤나 까다롭게 될 것이다.

    “후우…….”

    준혁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시끄러운 준혁의 속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회장님께서 본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주셨습니다.”

    이 순간 가장 피하고 싶던 김 비서의 보고였다.

    ***

    “너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 거야!!”

    준혁은 뒷짐을 진 채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럴수록 정 회장의 분노가 더욱 들끓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모순되게도 정 회장의 화를 식히는 방법 또한 이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변명밖에 되지 않을 터였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해명을 하기 위해선 연희의 일을 이실직고하는 것뿐이었다.

    준혁에겐 지금의 이 상황보다 연희의 일을 들키는 것이 더욱 피해야 할 문제였다.

    “RM푸드로 들어간 위약금은 뭐고, 왜 네놈이 대표 자리 앉자마자 박승준이 때보다 더 실적이 엉망이 되느냔 말이야!”

    “RM푸드와 해임된 박 대표 사이에서 자금 횡령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거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박 대표도 자르신 거고요.”

    준혁은 평소보다 더욱 차분한 투로 조곤조곤 따져 물었다.

    그 모습이 불같이 타오르는 정 회장의 분노에 더욱이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래서 보란 듯이 RM푸드 식품 성분 문제를 언론에 터트린 게냐? 너 정말 그렇게 했을 때 백화점에 타격 갈 거란 거 몰랐어?”

    “…….”

    “도대체 그 문제를 왜 네가 나서서 그렇게 처리한 건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혁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렇다 할 불호령이 없기에 아직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준혁은 분주하게 사고회로를 돌렸다. 사실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마땅한 변명거리가 어떻게도 없었다.

    보네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언론에 흘리는 것만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건 최악의 수였고,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준혁은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참지 못한 정 회장이 다시금 역정을 내렸다.

    “이유를 말하라는 소리 안 들려? 그걸 네가 저지른 일이란 소리를 듣고 내가 오늘 아침에 어렵게 끊은 혈압약까지 챙겨 먹었어!!”

    준혁은 입 안 가득 차오른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대비책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떻게든 변명의 여지가 없을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저지른 일이니, 지금이라고 별다른 수가 떠오를 리 없었다.

    준혁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사이 잔뜩 힘이 들어갔던 입술이 원래의 모양을 되찾았다.

    “이번 일을 문제로 절 자르신다고 하셔도 할 말 없습니다. 처분 내리시는 대로 따를게요.”

    “너 이 자식 ……!!”

    급기야 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올렸다. 준혁은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뺨 한 대 맞고 넘길 수 있는 일이라면 차리라 그편이 깔끔했다.

    하지만 준혁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 건 정 회장의 손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어떻게든 핑곗거리 만들어서 와.”

    준혁은 내렸던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뒷목을 잡은 정 회장이 눈을 감은 채 호흡을 고르고 있는 게 보였다.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 회장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정 회장의 입술이 다시금 달싹거렸다.

    “내가 방패막이 되어주려고 해도 그럴만한 명분이 있어야 돼. 그러니까 어떻게든 그 명분, 만들어 와. 나 혈압 터져 쓰러지기 전에 그 얼굴 이만 치우고.”

    정 회장은 넌덜머리가 난다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생각보다 시시한 마무리였다. 그래서 나쁠 이유는 없었고.

    준혁은 정 회장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회장실에서 나왔다.

    정 회장이 원한 명분을 만들긴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로써 시간은 번 셈이었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최숙희에 이어 제 아버지까지 적으로 돌아서기 전에.

    정 회장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 가능한 한 많은 일들을 진행해야 했다.

    ***

    연희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를 초점 잃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준혁이 집에 오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각이었다.

    이른 저녁 준비란 걸 알지만, 오늘은 더 이상 할 일도 보이지가 않았다.

    며칠간 윤세라 행세도 멈추고 집만 지키는 중이었다.

    당분간은 쉬는 게 좋을 것 같단 준혁의 말 때문이었다.

    ‘당장은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대부분이니까, 너는 좀 쉬어. 마음 좀 잘 가다듬고.’

    연희는 그 말끝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간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으로선 몸도 마음도 너무 지친 상태였으니까.

    준혁의 말대로 당분간은 좀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하아…….”

    연희는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혁과 참석했던 자선 경매 행사 이후 좀처럼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았다.

    숙희와의 대면이 꽤나 벅찬 일이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그날 숙희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한시도 잊히지 않았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날엔 모르고 넘어갔던 숙희의 멸시가 새삼스러운 깨달음으로 밀려왔다.

    그게 연희를 더욱 괴로움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서였다.

    아직은 자신이 할 일이 없다는 말에 집만 지키고 있었지만, 잠깐도 가만있지 않았다.

    온 집 안을 헤집으며 청소를 했고, 잡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해야만 그나마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컨디션이 나아지지는 않을지언정 더욱 악화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날을 거듭할수록 움직일 수 있는 일 역시 점점 제한되었다.

    집 안에서만 일거리를 찾다 보니 할 일이 점점 줄어드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그나마 하나씩 있던 일거리조차 찾아지지 않아 모처럼 쉬어보자고 마음먹었지만, 그 마음이 10분 이상을 가지 못했다.

    연희는 연거푸 한숨만 푹 내쉬며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정신이 조금쯤은 차려지는 것도 같았다.

    한결 맑아진 눈을 끔벅이자 보글보글 끓던 찌개가 곧 넘칠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이것마저 마무리가 되면 그땐 정말 할 일이 없어지는데…….

    그 생각을 하면서도 연희는 불을 끄고 가스를 잠갔다.

    할 일을 만들기 위해 찌개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냄비 뚜껑을 덮고 주방을 한 번 휘이 둘러보았다. 역시나 할 일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잠잠하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연희는 건조한 손길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액정 위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기 무섭게 동공이 한껏 팽창했다.

    연희는 다급한 손길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아,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혹시 엄마한테,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

    -연희야! 엄마 깨어나셨어! 얼른 병원으로 와, 얼른!!

    연희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울먹이는 미영의 목소리가 성급하게도 넘어왔다.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 보았던 주치의에게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단 말을 듣고 연희는 거의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데…….

    연희는 쥐고 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진 것도 모르고 다급히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외투만 챙겨 서둘러 집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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