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처리해줘야 할 아이
태광은 이진의 앞으로 핸드폰 액정을 내밀었다.
한참을 끈질기게 태광을 노려보던 이진이 핸드폰 액정을 흘끔 보았다.
무슨 숫자가 이렇게도 많은 건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위에서부터 쭉 훑던 시선이 제일 하단에 도착하고서야 그녀는 액정을 통해 보이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태광이 이렇게까지 소리를 지른 것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
하지만 통화 중에 소리를 질러 친구에게 쪽팔림을 준 것까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진은 팔짱을 척 끼곤 의기양양하게 태광을 보았다.
“이게 뭐?”
“이게 뭐어? 너 지금 이게 뭐냐고 물었냐? 어?? 이걸 콱!!”
태광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이나 습관처럼 손을 올렸다.
“아악!!”
순간 화들짝 놀란 이진이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느껴지는 고통은 없었다. 하지만 놀란 가슴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진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곤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태광을 보았다.
두꺼운 태광의 손이 여전히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그에 한 번 더 놀라곤 뒤로 나자빠졌다.
태광은 이진이 놀라 넘어가는 꼴을 보고서야 손을 내렸다. 그러곤 허리춤을 잡은 채 다스려지지 않는 화를 마구 쏟아내었다.
“너 지금 제정신이야? 1억? 쇼핑 좀 하라고 했다고 가서 1억을 쓰고 오는 게 말이 돼? 네가 지금 생각이 있어?!”
“오, 오, 오빠가 쓰라고 준 거잖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이진의 같잖은 변명에 태광이 뻐근하게 조여오는 뒷목을 붙잡았다.
“야, 너 지금 회사 문제 터져서 나 언제 나가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란 거 몰라?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네 친구들이랑 같이 가라고! 그럼 너는 적당히 쓰고 네 친구들이 돈을 쓰게 만들었어야 할 거 아니야! 이 일 하루 이틀 해? 어?!”
이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 안 여린 살을 꽉 물었다.
돈 때문에 태광의 곁에 붙어 있는 거긴 했지만, 언제나 더럽고 치사했다.
태광이 제게 쇼핑을 명목으로 카드를 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했다.
마음에 드는 가방을 하나 이상 사기라도 한 날이면 태광은 잔소리를 퍼부었고,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순간 손이 올라갔다.
인생의 유일한 낙이 쇼핑인데, 언제나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에게 쇼핑은 사업 수단에 불과했다.
백화점 실적을 올려주는 명목으로 뒷돈을 챙기는 식이었다.
하지만 정작 뒷돈의 대가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움직여야 하는 건 이진이었다.
재계 사모님들을 상대로 입에 발린 말을 아끼지 않았고, 제 또래의 여자들과는 어떻게든 친근한 사이가 되어 명품관에서 지출을 하게 만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태광의 카드로 산 가방 하나 정도는 그날 그녀가 사교 모임 회원들을 상대로 소비하는 감정 노동의 대가쯤이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그렇게라도 제 손에 명품 가방을 쥘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힘들지언정 비위만 조금 맞추면 고가의 명품백이 제 손에 떨어지는데, 술을 따르며 더러운 손길에 몸을 내주어야 했던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태광이 손을 올리는 날이면, 이렇게까지 버티는 게 맞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건 그렇게라도 마음에 둔 가방을 살 수 있어서였는데, 이젠 그나마 하나 사는 가방도 못마땅해하니 이진은 억울해서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토는 달지 않았다. 거칠게 일렁이는 태광의 눈동자를 보아하니 오늘은 정말 한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진은 모서리 구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그때, 잠잠하던 태광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 진짜. 이 노인네는 시간이 몇 신데.”
태광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입 안 가득 차오른 한숨 같은 심호흡을 내쉬길 몇 번.
전화가 끊기려던 찰나에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전화 받는 예절하고는, 쯧쯧.
곧바로 들려오는 숙희의 목소리에 태광이 힘주어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아도 열이 뻗쳐 죽겠는데, 사사건건 자신을 무시하는 숙희의 말까지 들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만 같았다.
“에이, 시팔! 내 속 뒤집으려고 전화했수?”
욕지거리하는 걸 숙희가 제일 싫어한다는 걸 알았지만, 태광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가 가득 차다 못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회사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보였고, 자질 문제로 대표 해임에 관한 소문까지 나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힘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는데, 믿고 있던 최 회장마저 해결책은커녕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속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겠지?
순간 태광의 눈이 번뜩거렸다.
역정을 들을 걸 알고도 욕설을 참지 못한 건데, 웬걸. 최 회장의 음성은 나긋하기만 했다.
태광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최 회장의 말이 자신이 당장 잡아야 할 동아줄이란 걸.
머릿속을 구석구석 뒤졌다.
최 회장이 지난번에 한 말이 무엇일까.
그러던 중 귓가로 최 회장의 목소리가 섬광처럼 번쩍 터지며 상기되었다.
‘네가 처리해줘야 할 아이가 하나 있다.’
그래. 분명 최 회장이 그랬었다.
자신이 처리해줘야 할 아이가 있다고.
태광의 입매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속절없이 호선을 그렸다.
드디어 때가 온 모양이다.
태광은 지금의 상황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최 회장은 상대하기 피곤한 스타일이긴 했지만, 계산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번 일은 그간의 어떤 것보다도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기 찝찝하고 더러웠지만, 까다로운 일이니만큼 셈은 더욱이나 확실할 터였다.
태광은 안광을 번뜩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언제 움직이면 됩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시기는 네가 적당한 때를 고르고, 방법 역시 뭐든 좋으니 확실하게만 처리해.
태광의 입술이 기괴하리만큼 비틀린 채 올라갔다.
최 회장이 일을 지시하며 구체적인 시기와 방법을 정해주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하다는 소리겠지.
그리고 딱 그만큼, 저 역시 원하는 바를 강하게 요구할 수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정해지는 게 있으면 연락드리죠.”
-꾸물거리지 말아야 할 거야.
“나야 그런 쪽으론 확실한 사람이니까 걱정 말고, 회장님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뭐든 꼭 들어줄 준비나 하고 계세요.”
태광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드디어 각고 끝에 얻은 RM푸드를 잃을지도 모른단 두려움에서 벗어나도 될 것 같았다.
잠시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보던 그가 별안간 무언가를 떠올리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너무 오랜만에 찾는 연락처인지라 무어라 저장해두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전화번호부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는데, 무언가 꿈지럭대는 게 시야 끄트머리에 걸렸다.
태광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여전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이진의 모습이 보였다.
태광은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도 잊고 이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진이 몸을 움찔 떨었다.
뒤늦게 이진이 겁을 한 움큼 집어먹었다는 걸 눈치채곤 자리에 멈춰 서서 말을 건넸다.
“너, 그동안 내가 잘 가지고 있으라고 했던 자료들, 잘 챙겨뒀지?”
퍽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이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료, 들?”
“금고에 넣어두라고 준 USB랑 사진들 있잖아.”
“아, 응. 그거 잘 챙겨뒀어.”
“잘했네. 가방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내일 가서 사. 그 자료들은 혹시나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계속 신경 쓰고.”
“……응?”
이진이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태광을 보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드값에 눈이 뒤집혀서 화를 내던 사람이 별안간 가방을 사라니.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물을 새도 없이 태광은 등을 돌렸다. 놀란 이진의 눈에 그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는 게 보였다.
“어, 나야. 그동안 잘 지냈지? 오랜만에 상의해야 할 일이 좀 생겨서 말이야.”
태광은 핸드폰 너머의 누군가에게 집중을 한 채 방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이진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가방을 사라니 우울했던 기분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마침 마음에 둔 가방이 있던 참이었다.
가격이 좀 센 편이라 계속 눈여겨보고 있기만 했는데, 흔쾌히 사라는 걸 보니 이번 기회에 사면 좋을 것 같았다.
눈물에 얼룩진 얼굴로 금세 환한 빛이 스며들었다.
이진은 언제 서글퍼 했냐는 듯 다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내일 함께 쇼핑할 사람을 찾아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