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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48)화 (48/80)
  • 48. 과분한 남자(2)

    처음이었다. 그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이야기해본 것이.

    언젠가 떠날 생각을 하면서 전하기엔 역시나 염치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주어졌을 때 꼭 해야만 했다.

    10년을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말이었다.

    그게 못내 사무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사랑한단 말이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말이 하고 싶어서.

    연희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참 많은 날을 괴로움 속에 살아야 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것까지 아주 못되고 못된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사랑해, 준혁아.”

    애달프게 이어진 사랑 고백에 연희의 것과 맞물린 준혁의 손으로 한껏 힘이 들었다.

    그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고, 너무 느닷없는 고백이라 불안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순간 연희의 머릿속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이 차오르고 있었다.

    ‘윤세라랑 너, 쌍둥이 자매야.’

    처음 윤세라와 쌍둥이 자매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자, 자신이 그를 또다시 버리려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내 옆에 있어. 네 자리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필요하다면 이용도 당해 줄게.’

    ‘…….’

    ‘네가 또 날 버리려고 했다고 해도, 그래도 난 여전히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다 할 거야. 널 위한 거라면 내가 못 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신연희.’

    ‘…….’

    ‘그렇게라도, 나를 이용하겠단 마음으로라도 내 옆에 있어, 제발.’

    연희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두 눈 가득 운전에 집중한 준혁의 모습이 빼곡하게 차올랐다.

    이제 와 연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날 그 이야기를 하던 순간에, 그렇게까지 자신을 붙잡아야 했던 그의 마음은 어땠을지.

    두 번이나 그를 버리려던 자신을 붙잡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입장을 바꿔 자신이 준혁이라면 준혁이 했던 것처럼 할 수 있었을지.

    연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짧게만 생각해도 그처럼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대체 그는 어떤 마음이기에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신연희가, 자신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생각이 더해질수록 그렇지 않아도 울컥거리던 마음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할 것 같았다.

    그때, 막힘없이 달리던 차가 집 앞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왔다.

    “…….”

    그 찰나 연희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은 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이지만 당황한 그의 입술이 경직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자연스레 힘이 빠지고 부드럽게 얽혀들었다.

    짝이 맞는 퍼즐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준혁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을 뻗어 연희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러곤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숙이 그녀의 잇새를 파고들었다.

    고르게 자리한 치열을 훑고 여린 속살을 거칠 것 없이 내찔렀다.

    그때마다 참지 못하고 새어 나온 연희의 신음이 준혁의 혀를 타고 진동했다.

    오랜만에 마련된, 오롯이 두 사람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제법 격정적이던 키스는 꽤 오래 이어졌고, 숨이 모자라 헐떡거릴 지경이 되어서야 입술은 떨어졌다.

    연희는 진한 여운에 선뜻 눈을 뜨지 못했다.

    밭은 숨을 내뱉으며 호흡을 가다듬길 한참, 가라앉은 준혁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한테 미안할 필요 없어.”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눈을 떴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입술이 단박에 보였다.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던 그 입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용하라고 한 건 나였고, 네가 날 이용하기도 전에 자진해서 움직인 것도 나니까.”

    “…….”

    “그러니까 넌, 네 마음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그것만 나한테 알려주면 돼. 그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연희는 준혁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는 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려웠다.

    지독할 정도로 변하지 않는 그가.

    미동도 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만 바라보는 그의 마음이, 이제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헌신하는 그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그는 끝까지, 저로 인해 벌어진 모든 상황까지도 그의 선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넌.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네 손에 쥐여줄게.”

    그렇게라도 지금처럼만 옆에 있어 달라고.

    “하아…….”

    연희의 잇새로 헛숨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잦아든 듯했던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엉망인 모습으로는 준혁을 볼 수가 없는데, 그런데 연희는 굳이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마주한 자신이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칠게 요동치는 딱 그만큼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는 거였다.

    연희는 손끝에 닿는 준혁의 정장 재킷 소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곤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나마 준혁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준혁아. 나도 우리에게 끝이란 건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오래오래 너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

    준혁 못지않게 저 역시 간절하게 바라마지않던 일이었다.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나 걱정 없이, 그냥 마음 편히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렇게 오롯이 그만 바라보며 사랑하고 싶었고, 입 맞추고 싶었고,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행복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준혁과.

    죽는 그 날까지 오래도록.

    “…….”

    연희는 맞물린 잇새로 한껏 힘을 주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밀려오는 감각이 도통 감당되지 않을 정도로 심장이 격렬하게 뛰어댔다.

    하지만 기분 좋은 꿈은 그저 꿈에서 그칠 거라는 걸, 연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준혁, 그에게.

    “준혁아. 부탁이 있는데…….”

    우리가 바람처럼 오래도록 함께할 수 없게 된다면 말이야.

    어떻게도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한다면…….

    “…….”

    그땐 간절히 바라건대, 버려지는 게 네가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어. 아주 매몰차게, 네가 나를 버렸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제 바람대로 꼭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해 달라고.

    그 말이 입 안 가득 들어찼지만, 연희는 끝끝내 소리 내어 뱉지 못했다.

    대신 제 말을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투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한 번만 안아줄래?”

    대단한 말이라도 기대했던 건지, 그가 딱딱하게 굳혔던 표정을 풀곤 제법 허탈하게 피식거렸다. 그러더니 곧장 팔을 뻗어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연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새까만 시야로 준혁과 제 모습이 그려졌다. 그 안에서 자신은 차마 준혁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준혁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냉랭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처럼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통보를 해왔다.

    ‘우리 그만하자.’

    준혁에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자, 이 순간 연희가 그에게서 가장 바라는 그 말이 생생하게 귓속을 울렸다.

    과연, 너에게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데 …….

    내리감은 연희의 눈꺼풀이 위태롭게 진동했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꼬리를 타고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지만 거칠게 부르튼 그녀의 입술만큼은 기쁘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정말 진심으로 바랐다.

    그에게 처참히 버려질 수 있는 순간이, 너무 머지않은 미래에 머무르고 있기를.

    연희는 준혁 몰래 그 한 가지를 무척이나 간절하게 바랐다.

    ***

    핸드폰을 바라보던 태광의 미간이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보고 또 봐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길게 늘어진 숫자를 살펴보아야 했다.

    그러나 몇 번을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태광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거실로 박차고 나갔다.

    “야, 송이진! 너 어딨어! 당장 안 나와?!”

    잔뜩 흥분한 채 이진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그새 또 어딜 간 건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태광은 쿵쾅거리며 방마다 문을 열어 이진이 있는지 확인했다.

    이진을 찾은 건 복도 가장 끝에 있는 게스트 룸에서였다.

    이진은 손님맞이용 침대에 누운 채 누구와 통화 중인 건지 깔깔대고 있었다.

    그게 태광의 화를 더욱 솟구치게 만들었다.

    “야, 송이진!!”

    태광은 격양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화들짝 놀란 이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광을 보았다.

    그런 와중에도 태광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상대에게로 건너갈 거라고 생각하니 퍽 자존심이 상했다.

    이진은 미간을 좁히면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상대를 향해 나중에 전화하겠단 말을 건넸다.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뭐! 나 통화 중인 거 안 보여? 쪽팔리게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렇게 소리를 꽥꽥 지르는 건데?”

    이진 역시 욱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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