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47)화 (47/80)
  • 47. 과분한 남자(1)

    “힘들었지.”

    집으로 향하는 조용한 차 안으로 준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탁하게 흐려졌던 연희의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았다.

    정신을 차리긴 차렸는데,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응, 조금…….”

    연희는 힘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설 힘조차 없어 정 회장 내외가 일어나는 걸 보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여긴 내가 알아서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넌 잠깐 숨이라도 돌리고 있어.’

    연희의 컨디션을 눈치챈 준혁이 화장실 앞으로 부축을 하며 그렇게 얘기했다.

    HN그룹의 며느리로서 마지막까지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될 텐데, 그 조금도 버텨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 들어가 겨우 숨을 돌리고 변기 뚜껑 위에 앉아있길 한참.

    연희는 그제야 억지로나마 환하게 웃을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은 차릴 수 있었다.

    나름대로는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나온다고 나왔는데, 그땐 정 회장 내외가 이미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이렇다고는 하나 며느리로서 책잡힐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윤세라를 위해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준혁에게 더 이상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위해 이렇게나 발 벗고 나서주는 준혁이었다.

    그런 그에게 감당하지 않아도 될 숙제까진 만들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출발하시기 전에 아버지가 너 찾으시긴 했는데, 적당히 잘 둘러댔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생각이 또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던 모양이다. 한참을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가 그렇게 말을 건네왔다.

    억지로라도 위안을 삼으려니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들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지만, 더는 그 문제로 감정을 소비할 만한 힘도 없었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연회장을 채웠던 사람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완벽하게 긴장이 풀렸다. 준혁이 부축해주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희는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숙희와의 대화만큼은 무척이나 또렷했다.

    연희는 맥없이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회장에서의 일이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되었다.

    ‘그래, 세라구나.’

    ‘…….’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우리 세라가 왔어.’

    그 말을 하던 숙희의 눈동자는 윤세라인 척 성북동 RM일가 저택을 찾았을 때 봤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그날 보았던 인자한 할머니는 어디에도 없었다.

    윤세라가 본가로 들어간 마당에 그녀가 자신을 여전히 윤세라로 착각할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향한 최숙희의 눈길이 아프지 않을 순 없었다.

    숙희의 눈은 꼭 그랬다.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하찮은 미물을 보는 눈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준혁에게 하는 말 역시 그랬다.


    ‘아닙니다. 남자라면 정 대표처럼 대범할 줄도 알아야지요. 정 대표 입장이 그랬다니,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섭섭하긴 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

    ‘그래도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나한테라도 미리 언질을 주면 좋을 것 같네요. 가족끼리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요?’

    준혁에게 하는 그 말이 꼭 어서 정신 차리고 진짜 윤세라에게 돌아가라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린다면, 이번 한 번만큼은 눈감아주겠다는 듯이.

    그 순간, 연희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잡고 있던 준혁의 팔을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윤세라가 아닌 신연희로 마주한 최숙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엄 넘쳤고, 절대 쉽지 않은 상대일 거란 확신을 강렬하게 주는 사람이었다.

    그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최숙희를 향한 복수심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저와는 별개로 준혁까지 최숙희를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최숙희가 막강한 상대이면 상대일수록 더더욱이나.

    그렇다면 준혁을 놓아야 맞는 건데.

    그런데 연희는 끝끝내 준혁을 놓지 못했다.

    어떻게든, 최숙희에게 별거 아닌 흠집 하나라도 반드시 꼭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만 사그라질 줄 모르는 이 원망의 감정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목표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라도 준혁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준혁에게 기대어 최숙희에 대한 정보를 받은 것이고, 그의 계획을 발판 삼아 철저하게 움직인 거였다.

    모든 일이 시작된 그 순간에,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목표로 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준혁의 말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걸.

    더욱이 준혁의 계획은 저로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떠올리지 못했을 내용들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도 준혁의 도움이 필요했다.

    적당한 때가 되면 그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뻔뻔하게.

    못 할 짓이었다.

    숨겨진 제 출생의 비밀이 이토록 충격적이지만 않았더라도.

    그래서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한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만 됐더라도 이렇게까지 이기적으로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신연희가 정준혁에게 있어 이미 나쁘고 이기적인 년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진 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연희의 입술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줄곧 억눌러 온 서러움이 이 순간 한 번에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손등 위로 느닷없는 손길이 느껴졌다.

    연희는 느리게 고개를 움직여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자 여지없이 제 손을 덮고 있는 준혁의 손이 보였다.

    그를 닮아 듬직하기만 한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게 꼭 제 마음을 쓰다듬고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하.”

    연희의 잇새로 참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붉어진 눈시울로 물기가 가득 차올라 떨어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염치가 없어 차마 울 수도 없었다.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순간, 신연희에겐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정준혁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위로를 하고 품에 자신을 한가득 품어 안을 것이다.

    당치도 않았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상이었다.

    자신이 달게 받아야 할 건 상이 아니라 벌이었다.

    그에게 이기적으로 굴었던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지독한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준혁의 앞에선 울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이를 악물고 견딘 게 무색하도록 준혁의 목소리가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오늘 들었던 말, 전부 다 잊어버려. 한 마디도 기억하지 마.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으니까.”

    얼핏 들으면 강압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희는 알고 있었다.

    지금 준혁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여라도 상처받았을 제 마음을 그만의 방식으로 돌보고 있는 거였다.

    틀림없었다.

    ‘10년을 눈멀고 귀먹은 사람으로 빌어먹을 노인네들 비위 맞추면서 사니까 그제야 네 흔적이 조금씩 찾아지더라. 너 하나 찾겠다고 그렇게 살았어, 나. 그러니까 연희야.’

    ‘…….’

    ‘제발 예전처럼 다시 날 사랑해.’

    매정하게 버리고 떠난 여자를 10년이나 찾아 헤맨 거로도 모자라, 다시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던 그는.

    ‘다 울었어? 얼굴이 엉망이네.’

    ‘…….’

    ‘왜 계속 그러고 서 있어. 다 울었으면 당장 와서 안겨야지. 울고 나면 내가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며.’

    ‘…….’

    ‘안아줄 사람 나타났잖아.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야?’

    10년이나 지났는데도 매정하게 버리고 떠난 그 나쁜 년이 한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품을 내어줄 줄 알던 그는.

    ‘보고, 싶다며.’

    ‘……응?’

    ‘보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내일까지 버틸 수 있겠어.’

    고작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여건도 가리지 않고 단숨에 달려와 주던 그는.

    단 한 순간도 신연희를 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런 그는 어떻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기엔 감히 너무나도 과분한 남자였다.

    “준혁아.”

    연희는 나직이 준혁을 불렀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길이 제게 닿았다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잠깐 닿은 시선마저도 너무 달고 따뜻해서 연희는 가슴이 아팠다.

    “정말 고맙고 미안해. 그리고…….”

    그래도 이야기해야 했다.

    제겐 너무 과분한 남자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욕심내선 안 되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너에겐 너무나도 못 되고 이기적이기만 한 이 나쁜 년이.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염치도 없이 너를 참 많이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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