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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46)화 (46/80)
  • 46. 자선 경매 행사(3)

    “그 자리가 욕심이 날 만도 했겠지. 돈 몇 푼에 시간까지 팔아넘길 정도니 네가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듣지 않아도 알 만해.”

    연희는 맞붙인 입술로 힘을 주었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태연하기만 한 노인의 목소리에는 자신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려 어떻게든 자극하겠단 의도가 다분했으니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준혁만을 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식의 말을 꺼낼 때부터 알고 있었다.

    최숙희는 시종일관 준혁과 대화하면서도 자신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의도가 너무도 뻔히 눈에 보여 반응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애초부터도 없던 여유가 지금이라고 갑작스레 생겨날 리가 없었다.

    연희는 숙희의 의도대로 감정의 절벽 끝까지 몰아붙여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선전포고를 위한 자리 정도에 불과했다. 윤세라의 자리를 순순히 돌려줄 생각은 없다고, 앞으로 자신의 행보를 똑똑히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제 의중을 거기까지 알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숙희 역시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강한 듯했다.

    “그래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니. 그 자리는 감히 네까짓 게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말이다.”

    “…….”

    “오늘만 해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고되었을 거야. 보고 자란 게 없으니 이쪽 사람들한테 있어서 당연한 예의 같은 것도 모를 것이고, 여기서 네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너를 향한 모든 행동과 말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눈치를 살피는 거뿐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정준혁이 뒤에 숨는 일이거나.”

    연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현재로선 이 자리가 윤세라의 것임이 분명했지만, 언젠가 준혁이 했던 말대로 RM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더라면 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자리였다.

    설령 이 자리가 여전히 윤세라의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이런 수모 같은 건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든 당사자가 염치도 없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게 참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보고 자란 게 없다는 말은 연정을 모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목적, 그 이상의 감정을 내색하는 건 불필요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정을 모욕하는 말까지 듣고 무조건적으로 참고 인내할 만큼 자신은 좋은 성격이 되지 못했다.

    여전히 감정적으로 내몰린 기분이었지만, 연희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져 있었다.

    연희는 줄곧 고수하던 경직된 자세를 늘어뜨리곤 나른하게 다리를 꼬았다.

    의자 깊숙이 허리를 묻고는 입꼬리를 묘하게 비틀어 올렸다.

    “맞는 말씀이세요. 보고 자란 게 없어서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그런 예의 같은 거, 전혀 몰라요, 저.”

    연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행사에 집중하는 척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잇새로 흘러나온 말은 모조리 숙희를 겨냥하고 있었다.

    냉정을 찾은 연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게 알게 모르게 숙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할머니, 아무래도 할머니께서 간과하고 계신 게 하나 있는 거 같아요.”

    그 말끝에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숙희의 입장에선 가소로울 것이다.

    그렇겠지.

    그렇지 않아도 무시하고 있던 가소로운 계집애 하나가 객기를 부리는 정도로만 보일 터였다.

    그래서 더욱이나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당신 눈에 하찮게 보인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하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물론이고, 함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걸.

    “태어난 후로 줄곧 밑바닥에서만 살던 저 같은 사람은 보고 자란 게 없어서 이런 자리에서 차려야 할 격식 같은 게 뭔지 잘 모르지만, 무지한 만큼 겁이랄 것도 없거든요. 더군다나 밑바닥만 전전하던 인생에 잃을 게 있으면 뭐가 있을 것이며, 설령 있다고 한들 대기업을 거느린 할머니만 하겠어요?”

    “…….”

    “그래서 원래 저 같은 애들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거든요. 한 번 눈이 돌면 뵈는 게 없는 애들이라.”

    연희는 그 말을 하며 숙희의 얼굴을 눈동자에 똑똑히 담았다.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묘하게 경직되어 있는 게 지금 이 상황이 숙희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건 곧 숙희 역시 자신의 행동에 타격을 받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쾌감에 가슴 정도는 뛰어줘야 맞았다.

    그러나 연희는 기쁘지 않았다.

    연희는 시선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숙희의 뒤로 연신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윤세라와 닮은 얼굴을 가진 여자.

    그리고 자신과, 닮은 여자.

    누구인지 굳이 묻지 않아도 제 친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러곤 이내 그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보였다.

    “…….”

    연희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그간 전달받은 정보에 의하면 제 부모는 숙희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쌍둥이 딸 중 하나는 죽은 줄로만 알고 살았던 거다.

    요동치는 여자의 눈동자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게 못내 연희의 마음을 약해지게 만들었다.

    연희는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러곤 다시금 숙희의 옆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숙희의 표정은 시종일관 바뀌는 법이 없었다. 딱 하나, 불편한 속내를 대변하며 파르르 나부끼고 있는 노인의 속눈썹만을 빼고.

    연희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뭉클함 따위는 깨끗하게 지워버리곤 준비한 말들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고 하셨었죠? 30년도 더 된 옛날에 그 말을 직접 들으셨다고.”

    “…….”

    “그 옛날에 할머니가 욕심부리신 건 과연 뭐였을까요.”

    누가 숙희에게 그런 말을 한 건지, 그 말을 왜 한 건지, 연희가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것이 30년도 더 된 옛날이란 걸 보니, 윤세라와 자신이 태어나던 무렵인 것만은 확실했다.

    연희는 확신에 찬 얼굴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마.”

    “…….”

    “윤세라가 아니었을까…….”

    윤세라의 이름을 언급함과 동시에 숙희의 눈가로 깊은 주름이 무자비하게 팼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눈가의 균열이 끝도 보이지 않았다.

    그거로 확신은 사실이 되었고, 연희의 복수심은 더욱이 단단하게 다져졌다.

    “그래서 저도 똑같이 해드리려고요.”

    “…….”

    “할머니가 저한테서 인생을 빼앗았듯이, 저도 할머니가 가장 욕심부리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망쳐볼까 해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최숙희가 가장 욕심을 부렸던 RM그룹에 흠집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최숙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윤세라를 철저하게 망가뜨릴 작정이었다.

    숙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더 이상 없었다. 볼일이 끝났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듯 연희는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장내는 경매사의 진행에 맞춰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아직 행사가 끝이 나기까진 한참이나 더 남았는데, 연희는 벌써부터 너무도 피로했다.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을 만큼.

    잠시 숨이라도 돌리기 위해 화장실에 다녀올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때, 감정이 실린 숙희의 말소리가 불시에 귀를 찌르고 들어왔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내가 너한테서 인생을 빼앗았다, 라……. 우스울 정도로 건방진 착각을 하고 있는 게야.”

    “…….”

    “네까짓 계집애의 인생이 가치가 있으면 얼마나 있으려고 내가 네 인생을 뺏었다는 건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구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날 것 그대로의 음색이었다. 그러나 낯빛은 어느새 여유로운 척 원래의 색을 되찾았고, 노인은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허리를 빳빳이 세운 모습이었다.

    그 꼴이 못내 눈엣가시처럼 여겨져 어떤 말로든 완벽하게 기를 죽이고 싶은데, 그 순간 차갑게 식은 손등 위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제 손을 꽉 움켜쥐고 있는 익숙한 손이 눈동자 가득 들어찼다.

    “…….”

    그 손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미세하게 고개를 젓는 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희는 이를 사리물었다. 최숙희의 말을 받아치지 못한 채 멈추어야 한다는 게 못내 분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준혁의 신호대로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연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했다.

    심호흡을 몇 번 더 반복하자, 격렬하게 너울지던 감정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숙희의 말에 기가 질린 것처럼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생각으로 방심하고 계셔준다면야, 저로선 더없이 감사할 따름이고요.”

    연희는 기어이 의미심장한 투로 말을 뱉었다.

    끝까지 오기를 부리는 게 결국엔 지는 것이나 다름없을지언정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그 뒤로 숙희의 말소리는 따라붙지 않았다.

    연희는 준혁에게 붙잡힌 그대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경매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연희는 남모르게 한숨을 나직이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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