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45)화 (45/80)

45. 자선 경매 행사(2)

곡선을 그린 숙희의 눈매가 일순 움찔거렸다. 그럴수록 연희의 입매는 더욱 기껍게 휘어졌다.

준혁은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나,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심상치 않은 기류가 목을 옥죄어왔다.

아직 RM 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모르고 있을 사람들에겐 그저 가족 간의 애틋한 만남처럼 보일지 몰라도, 준혁의 눈엔 둘의 신경전이 정확하게 보였다.

더욱이 둘의 페이스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감정이 고조되는 건 시간 문제란 판단이 들었다.

준혁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 두 사람의 시선을 교묘히 단절시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머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적당히 친근하면서도 격식을 차린 말씨였다.

불시에 끼어든 준혁의 목소리에 숙희와 연희의 시선 모두 준혁에게 향했다.

준혁은 긴장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도 없이 평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숙희를 향해 올곧은 시선을 박아넣었다.

그러길 얼마쯤 지났을까.

언짢은 기색으로 가득하던 숙희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그 표정을 감추곤 인자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그래요, 정 대표. 나는 아주 잘 지냈습니다. 우리 정 대표도 세라랑 같이 잘 지냈지요?”

다정하기 그지없는 음색이었다. 연희를 마주하고도 죄책감은커녕 무슨 일이 있었냐는 모습이었다.

그 뻔뻔한 자태에 준혁마저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지금쯤 연희의 속은 오죽할까.

그렇지 않아도 제 팔에 감겨 있는 연희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준혁은 연희가 감정에 휩쓸려 이성이라도 잃을까 봐 연희의 손을 묵직하게 붙잡곤 숙희의 말에 대답했다.

“네, 회장님. 여러 가지로 세라 씨가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회사 일에 더 집중하게 되기도 했고요.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은 하나 틀린 게 없다는 걸 실감하는 중입니다. 딱 그만큼, 세라 씨와의 결혼에 만족하고 있어요.”

유려하게 이어지던 말소리가 마지막에서만큼은 은근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숙희의 심기를 거스르겠단 의도가 너무도 다분히 묻어나 있었다.

그 뜻을 숙희라고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 말을 뱉기 무섭게 숙희의 표정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렇지요. 본디 내실이 튼튼해야 무얼 해도 자신감 있게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세라가 그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니 내 마음이 다 흐뭇해지는군요.”

숙희의 말끝에 푸근한 웃음이 곁들여졌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통의 인자한 할머니 같던지, 준혁은 그녀의 본모습을 알면서도, 그 가식적인 모습에 깜빡 속을 뻔했다.

곧바로 이어 붙은 말이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아, 우리 RM 계열의 외식 사업부인 보네르에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요? 위약금을 전부 감수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숙희의 눈동자로 순식간에 이채가 감돌았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어울리지도 않는 푸근함까지 가장한 모양이었다.

준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숙희를 만만한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지만, 보네르와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대놓고 언급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새삼스레 깨달음이 밀려왔다. 최숙희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막강한 상대였다.

준혁은 표정을 갈무리했다. 긴장했다는 걸 숙희에게 들켜선 안 되었다.

포식자와 다름없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긴장을 느꼈다는 걸 들키는 것만큼 약점을 쥐여주는 일도 없었다.

준혁은 빈틈없는 모습으로 맞받아쳤다.

“제가 자질이 부족해서 그런지 해임된 박 대표님이 운영해오신 방식 그대로는 이어나가기 힘들 것 같아 부득이하게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갖가지 비리 문제로 해임된 만큼 박 대표님이 진행해오신 일은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맞기도 하고요.”

예기 띤 준혁의 눈동자가 정확히 숙희를 응시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숙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찰나를 정확하게 포착한 준혁의 입꼬리가 기껍게 휘어 올라갔다.

“그 말은 꼭 우리 보네르가 박 대표와 같이 비리를 저질렀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오해십니다. 박 대표님이 진행하셨던 일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제 방식대로 운영하기 위해 세팅을 한 거란 뜻이었는데, 제 말이 회장님께 결례를 범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준혁은 적당히 고개를 숙이며, 손주사위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대외적인 태도를 거리낌 없이 선보였다.

물론 그것까지도 계산에 선 행동이고 말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겠지만, 연희를 직접 보고도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에 약이 올랐고, 괘씸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나마 숙희가 흔들리는 꼴을 제 눈에, 그리고 연희의 눈에 보여주고 싶었다.

준혁은 눈동자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시야 안으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숙희의 주먹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숙희의 페이스가 완벽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표정을 감추는 것이야 RM그룹을 일구며 지겹도록 한 일일 테니, 그녀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숙희가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감정을 미처 숨기지 못할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 이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의 쾌거를 거둔 셈이었다.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준혁은 연희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 길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가 연희에게 잠깐이나마 숨 쉴 수 있는 틈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연희를 향해 말을 건네기도 전에 최숙희의 목소리가 준혁의 목을 옥좨왔다.

“아닙니다. 남자라면 정 대표처럼 대범할 줄도 알아야지요. 정 대표 입장이 그랬다니,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섭섭하긴 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극히 비꼬는 말이었다. 부드러운 톤이었다고는 하나 고작 그 정도에 바보처럼 속아 넘어갈 정도로 준혁 역시 하수는 아니었다.

필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뼈 있는 말을 던진 게 분명한데, 그렇다면 무어라 응수해주어야 할까.

짧게 고민하는 사이 숙희의 목소리가 덧대어 들려왔다.

“그래도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나한테라도 미리 언질을 주면 좋을 것 같네요. 가족끼리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요?”

숙희는 가족이란 말을 핑계로 기꺼이 ‘을’의 입장을 자처했다.

애초에 진심이라곤 한 톨도 담기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준혁은 분노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내도록 평정을 유지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감정이 거칠게 요동쳤다.

주변을 의식하며 인자한 척하는 숙희의 태도가 가소로워서도 아니고, 팔에 맞닿은 연희의 손끝이 잘게 떨려서도 아니었다.

가족이란 말을 하며 숙희가 끈질기게 바라보던 것이 저 하나뿐이어서.

숙희의 그 행동이 연희를 향한 일말의 죄책감이 없다는 건 물론, 앞으로도 연희에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갖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인 것 같아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원래도 적당히 하고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오늘을 시작으로 최숙희의 말로를 두 눈 똑똑히 지켜봐 줄 생각이었다.

최숙희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이 비참하기만 하다면 그게 어떤 식이든 다 좋을 것 같았는데.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 처음으로 맡은 대표직이라 제가 많이 경직돼 있었나 봅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절망과 비참함, 그리고 수치심을 안겨주고 싶었다.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저 눈에서 눈물을 뽑아야 지금의 이 분노가 조금은 위로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숙희를, 가능하다면 나락 끝까지 몰아붙여야 했다.

준혁은 시종일관 숙희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닙니다. 바깥일을 하다 보면 실수야 누구나 하는 법이지요.”

제 손으로 직접 이 빌어먹을 노인네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면 그땐.

“물론,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땐 여유롭게 휘어져 있는 저 입술 사이로 연희를 향한 사죄의 말이 한마디라도 나올 수 있을지, 그게 문득 궁금해졌다.

준혁은 숙희를 똑바로 마주하며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비장한 웃음이었다.

그거로, 숙희를 향한 대답을 대신했다.

***

삼삼오오 대화 나누는 소리로 소란하던 연회장 안이 정숙을 되찾았다.

단상 위에선 경매가 한창이었다.

연희는 정해진 자리에 앉아 행사에 집중했다.

아니,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

연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신 눈을 끔뻑이면서도 바로 옆자리에 온 신경이 쏠리는 걸 말릴 수가 없었다.

행사장은 원형 테이블 하나에 적게는 세 사람, 많게는 대여섯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각 테이블에는 참석한 인원 중 부부 혹은 가족 단위가 함께 앉을 수 있도록 배정이 되었는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함인지 테이블 위엔 참석자의 이름 대신 회사명이 프린팅된 푯말이 놓여 있었다.

연희는 준혁, 그리고 정 회장 내외와 함께 ‘HN그룹’이라고 프린팅된 푯말이 놓인 테이블을 쓰게 되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가장 가까운 옆 테이블엔 현진건설 가족 내외가 앉았을 터였다.

테이블 중앙에 놓인 푯말 위로 ‘현진건설’이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었으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았어야 맞았다.

그런데…….

“30년도 더 지난 옛날에 누군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단다.”

숙희의 목소리가 불시에 귀를 뚫고 들어왔다.

연희는 속절없이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정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숙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완벽하게 시선이 맞물린 순간.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라고 말이다.”

기가 막힐 정도의 개소리가 연희의 뒤통수를 둔중하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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