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44)화 (44/80)
  • 44. 자선 경매 행사(1)

    연희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거울을 통해 보이는 제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결혼식에 이어 두 번째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문가의 손에 모든 걸 맡긴 결과물이었다.

    걸치고 있는 명품 브랜드의 옷은 그동안 윤세라 행세를 하기 위해 사 입었던 것과는 또 달랐다.

    그동안은 우아하면서도 스포티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면, 오늘 입은 옷은 HN그룹의 며느리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우아함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맞춤 제작이라도 한 것처럼 몸에 딱 맞아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옷을 걸친 순간부터 연희는 어울리지 않은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단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도 썩 좋지 않던 컨디션이 완전하게 가라앉았다. 온몸 곳곳에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는 날이었다.

    “후우.”

    연희는 심호흡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했다.

    이제 곧 준혁과 함께 자선 경매 행사장으로 향하게 될 터였다.

    그 말인즉 최숙희와도 곧 대면하게 될 거란 뜻이었다.

    그녀와 윤세라인 척 한 차례 마주하긴 했지만, 그때와는 의미가 완전하게 달랐다.

    오늘은 최숙희도 자신의 정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자신이 윤세라가 아닌 걸 알고 어떤 태도를 보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자신을 윤세라로 알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그녀가 제게 해코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숙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닐 거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는 탓인지, 묘하게 긴장이 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연희는 앞에 놓여 있는 클러치를 손에 쥐었다. 그러곤 밀려오는 긴장감을 애써 외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닫혀 있던 룸의 문이 열렸다. 거울을 통해 곧장 보인 건 준혁의 얼굴이었다.

    “준비 다 됐어?”

    그가 물어왔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연희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가자.”

    연희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잘게 요동치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준혁의 손이 꼭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에 대한 신호탄 같았다.

    절대 쉽지 않은 여정일 게 분명했다. 그 생각이 자꾸만 연희의 마음을 약해지게 만들었지만, 연희는 기어이 준혁의 손을 맞잡았다.

    그러곤 그와 함께 나란히 걸음을 내디뎠다.

    ***

    “새아가, 왔구나.”

    서울 중심에 자리한 호텔 연회장에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준혁과 연희의 시선이 동시에 한 곳으로 움직였다.

    시선의 끝에 걸린 건 오랜만에 마주하는 정 회장의 모습이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아버님.”

    그렇지 않아도 긴장한 연희의 목소리가 더욱 경직되었다.

    세라의 것이라기엔 썩 어울리지 않는 음색이었다.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쉬이 고쳐지지가 않았다.

    연회장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나 같이 한껏 신경을 써 격식을 차린 모양새였다.

    고작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느껴지는 아우라가 엄청났다. 그런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은 탓인지, 연희는 통 긴장감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그게 얼굴에 드러나기라도 했는지, 정 회장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새아가, 어디가 많이 안 좋니? 안색이 좋지 않구나.”

    퍽 다정한 말씨였다. 신경 써서 해주는 말이란 걸 알았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도리어 정 회장의 걱정이 연희의 긴장을 더욱 가중시켰다.

    연희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속으로 외우던 주문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괜찮아. 잘 해낼 수 있어. 하던 대로만 하면 돼. 지금까지도 잘 해왔잖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아, 신연희.

    어깨를 짓누르던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지만, 그래도 한결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연희는 그간의 경험을 떠올리며 입가에 힘을 주었다. 윤세라인 척, 수도 없이 지었던 미소가 입가에 휘감겼다.

    “아니요, 아버님.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을 좀 했나 봐요.”

    “하긴, 윤 회장님이 너를 좀 아끼셨어야지. 언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이런 행사 자리에도 대동한 적이 없으니, 새아가 네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준혁 씨가 있어서 안심이에요. 괜히 실수라도 할까 봐 오늘은 준혁 씨만 잘 따라다니려고요.”

    “하하. 우리 새아가한테 준혁이가 그만큼이나 의지되는 사람인 모양이구나.”

    기껍게 휘어 올라간 정 회장의 잇새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연희는 별다른 대답 없이 정 회장을 따라 웃었다.

    이쯤에서 준혁이 저를 데리고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면 좋으련만.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 준혁이 연회장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세한 움직임임에도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연희가 준혁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최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최 회장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 눈에도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건지, 썩 편해 보이지 않는 숙희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사람들은 주변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듣기론 재계에서 전설로서 칭송받다시피 하는 사람이라던데, 그 말이 영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최 회장님이 오신 것 같아서 이만 인사드리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별안간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원래 자리로 돌렸다.

    그러자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 회장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지. 그래야지. 얼른 가서 인사드려라. 새아가도 결혼하고 오랜만에 뵙는 조모님일 텐데, 안부 전해드리고.”

    “네, 아버님. 그럼 조금 이따 다시 뵐게요.”

    연희는 평소보다 한 템포 높은 텐션으로 목소리를 꾸미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기 무섭게 준혁과 방향을 틀어 걸음을 떼었다.

    정 회장에게서 한 발짝씩 벗어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 길 끝에 있는 것이 최숙희라는 게 다시금 마음을 묵직하게 만들었지만.

    “어차피 최 회장도 사람들 보는 앞에선 널 윤세라로 대할 수밖에 없을 거야. 네 예상보다도 더 친근하게 굴 수도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한껏 몰려온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데, 느닷없이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고개를 반쯤 돌려 준혁을 올려보았다. 제 시선이 느껴질 텐데도 그는 고집스레 정면만 바라보았다.

    그게 어디에서 향하고 있을지 모를 시선에 대비한 거란 게 확연히 느껴졌다.

    연희는 꼿꼿하게 편 허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일이었다. 준혁도 이렇게나 열심히 도와주는데, 고작 긴장감 때문에 넋을 놓을 순 없었다.

    최 회장에게로 향하는 걸음마다 복잡하기만 하던 머릿속의 생각들을 하나둘 지워냈다.

    비워낸 잡념의 자리만큼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괜한 걱정들도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최 회장과의 거리를 세 걸음쯤 남겨 두었을 땐, 그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을 만큼 완벽한 윤세라만이 준혁의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연희는 정 회장을 대할 때보다 더욱 뻔뻔한 얼굴로 숙희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할머니.”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그 호칭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뱉어냈다.

    최 회장의 곁에서 시종일관 떠날 줄 모르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멈추고 시선이 쏠렸다.

    연희는 그게 퍽 부담스러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으며 숙희의 앞으로 친근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실 줄 몰랐는데, 오셨네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최 회장이 이번 행사에 참여한다는 말을 처음 준혁에게 들었을 때도, 이 자리를 위해 어울리지도 않은 허울을 뒤집어쓰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한 번도 준비한 적 없는 말이었다.

    되레 최숙희를 마주하면 무슨 말부터 꺼내는 게 좋을지 내내 고민하기만 했는데, 걱정한 것이 무색하도록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세라구나.”

    돌아온 대답은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몇 글자 되지도 않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수도 없이 많을 터였다.

    연희는 굳이 숙희의 대답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추측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던 최숙희가 굳이 이번 행사에 참여했고, 그 이유가 자신을 향해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라면 괜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우리 세라가 왔어.”

    굳이 피곤하기만 할 이 자리에 참석한 거로도 모자라, 줄곧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유가 무엇일지.

    연희는 그게 못내 궁금했지만, 해맑은 웃음 뒤에 진짜 속내를 완벽하게 감추었다.

    그러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정준혁과 최숙희만이 알아들을 법한 의미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네,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정말.”

    한 번쯤 당신이 꼭 보고 싶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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