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43)화 (43/80)
  • 43. 신경쇠약

    준혁은 평소와는 달리 침묵한 채로 운전에만 집중했다.

    원하던 대로 연희와 저녁 식사를 했는데, 예상한 뿌듯함 같은 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의 외식 자리를 연희가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질색할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그게 퍽 당혹스럽다가도 못내 서운해서 저답지 못하게 감정적으로 굴고 말았다.

    그게 외식을 마친 지금까지도 계속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연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이 속 편하게 외식이나 할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주면 당장 최 회장이 참석할 자선 경매 행사에 가야 했고, 그 자리는 연희가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상황보다 어렵고 피로한 자리가 될 것이었다.

    불 보듯 뻔하게 예견되는 상황이라 독려 차원의 밥 한 끼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작 밥 한 끼로 최 회장을 대적할 만큼의 힘이나 뾰족한 수가 생기겠냐마는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의미가 무엇이든 그런 소소한 행복을 잠깐쯤은 즐겨도 되지 않을까 했던 건데.

    준혁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한숨을 눌러냈다.

    좋은 마음으로 준비한 자리를 망친 건 둘째치고, 사그라진 것 같던 불안감까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준혁은 곁눈질로 연희를 흘긋 보았다.

    줄곧 위태로워 보이던 그녀였다.

    윤세라와 쌍둥이란 말을 듣고 처절할 정도로 무너져 내리던 연희가 복수심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긍정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버텨주어서, 그렇게라도 제 곁에 있어 주어서 무척이나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가 완벽이게 표정을 지운 채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금도 유추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포커페이스였다.

    세상에 무서울 거라곤 무엇도 없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에 손이 다 떨릴 것 같았다.

    준혁은 맞붙은 입술로 꽉 힘을 주었다.

    자꾸만 목구멍이 묵직해지고 눈가가 시큰거렸다. 딱 그만큼, 설명할 수 없는 괴로운 감정이 연신 그를 괴롭혀댔다.

    최근 일련의 시간들이 연희에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겠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연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했던 건 어디까지나 연희의 일이기 때문이었고, 그렇게나마 시간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준혁은 연희가 지금 제 곁에 있기는 하지만, 떠나기로 작정했던 그녀의 마음이 완벽하게 돌아섰다고 확신하지 않았다.

    연희는 그게 언제가 됐든 자신을 떠날 것이다.

    연희에 대해 전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한 번 결심한 일은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란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땐 일의 경중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진중했다.

    이번엔 더욱이나 고심했을 것이다.

    연희라고 자신을 다시 한번 버리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연희라면 돈으로 얽힌 윤세라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제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 터였다.

    문득 연희를 붙잡던 순간,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러지 마. 네가 이런다고 해서 윤세라랑 정준혁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기사까지 나갔고, 너랑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윤세라가 정준혁의 아내가 되었다는 건 변하지 않아.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너랑 난 헤어져야만 하는 거라고.’

    대대적으로 보도된 윤세라와 제 결혼식 기사.

    아마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윤세라와 결혼한 거로 알려진 정준혁이 실제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다른 여자라거나 혹은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거나.

    어느 쪽으로든 세간에 알려진다면 자신을 향한 비난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연희가 자신을 위해 평생을 윤세라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론은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서로를 놓지 않거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놓는 것.

    앞으로 맞닥뜨려야 할 미래는 그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연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준혁은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몰랐던 사실도 아니고, 연희가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걸 짐작했을 때부터 각오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밀려오는 초조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정면을 향하던 준혁의 시선이 다시금 연희를 찾았다.

    연희는 여전히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미칠 듯한 초조함 속으로 자꾸만 밀어 넣는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건지.

    준혁은 차오른 한숨을 내뱉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 그녀에게 저까지 걱정을 보탤 순 없었다.

    그 생각 하나로 액셀을 밟으며 준혁은 괴로운 감정들을 견뎌냈다.

    ***

    “하아.”

    세라는 습관이나 다름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지 셀 수도 없었다.

    방 안에만 있어 답답한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보다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건 이 비서를 통해 신연희의 행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으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처지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신연희가 자신의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가 박박 갈렸다.

    -너 요즘 왜 그래?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다녀서 괜히 구설에 올라? 요즘 애들이 너 미친 것 같다고 엄청 수군거려. 그건 알고 있어?

    처음 연희가 제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된 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 지영을 통해서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안 하던 짓을 하고 다닌다니? 나 요즘 계속 집에만 있었는데.’ 

    -집에만 있긴. 너 저번 주에 백화점 갔었다며. 가서 온갖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렸다고 벌써 소문 파다하게 났어.

    세라는 아직까지도 그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수치심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집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세라는 언제나 철저했다.

    무엇 하나도 남들의 입방아에 오를 일은 하지 않았고, 자신이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에 처해서도 웃으면서 아량을 베풀었다.

    그게 RM 가에서 나고 자라며 배운 것이었고, 숨 막히는 숙희의 교육을 견디며 만들어낸 제 이미지였다.

    그 과정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타인의 앞에서 연기하는 게 제 인생이 되었고, 남들의 시선 속에 비치는 제 모습이 결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에 이르렀다는 걸 알았을 땐 쾌감까지 느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그런데 평생을 바쳐 만든 그 이미지를, 단 며칠 만에 신연희가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진상을 피우다니.

    윤세라 인생에 있어서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지영의 말은 그렇지 않아도 애가 타는 세라의 마음에 단숨에 불을 지폈다.

    -쇼핑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용한 가방은 왜 환불해 달라고 한 거야? 내가 그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진짜 윤세라가 그런 거 맞냐고 몇 번이나 되물었어.

    그 말을 듣는데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사용한 가방을 환불해 달라는 건, 보통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신연희가 감히 자신인 척 굴며 저질렀다는 거다.

    이 비서의 보고에 의하면 신연희가 찾은 곳은 백화점뿐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세라의 속을 더욱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신연희.”

    손톱을 물어뜯던 세라가 초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다 밀려오는 짜증을 감당하지 못하곤 이내 눈을 질끈 감으며 양손 가득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잡았다.

    속이 타서 미칠 것 같았다.

    타는 듯한 갈증에 아무리 물을 마셔봐도 도무지 해갈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초조함은 극심한 불안으로 이어졌고, 악이라도 내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신경쇠약증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까지도 세라는 분통이 터졌다.

    고작 신연희 따위가 뭐라고 자신이 이런 기분까지 느껴야 하는 건지,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지 않을 방법도, 그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도 없었다.

    ‘앞으로는 할미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세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말거라.’

    ‘…….’

    ‘정준혁이랑 널 대신해 식장에 들어간 그 애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 세라야.’

    ‘…….’

    ‘앞으로는 할미가 다 알아서 할 테지만, 너 또한 당분간은 외출도 삼가고 근신해야 할 거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숙희의 전언은 거기까지였다.

    예상했던 역정이 없어 의외였지만, 상의 없이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은 여지없었다.

    숙희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제 자리를 뺏길까 하는 노파심은 갖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기꺼이 감당해야 할 불안감이나 초조함은 변함이 없다 못해 이전보다 더 가중되었다.

    세라는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이렇게나마 억지로라도 지금의 이 감정을 인내해야 했다.

    그러는 것만이 지금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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