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42)화 (42/80)

42. 이기적이고 나쁜 년

연희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맞은편의 준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질 법도 한데, 준혁은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메뉴판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얘기해. 그거에 맞춰서 주문할게.”

준혁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 준혁과 함께 도착한 곳은 서울 야경이 한눈에 보인다는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이 지난 무렵 대뜸 전화를 걸어와 저녁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퇴근하자마자 무작정 자신을 끌고 이리로 온 것이었다.

연희는 입술을 고집스럽게 맞붙여 내키지 않는 마음을 드러냈다.

지금이 속 편하게 경치 좋은 레스토랑에서 외식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연정은 의식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윤세라는 본가에 들어가 최숙희에게 그간의 모든 일을 전한 거로 추측이 되었다.

연희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그 지점이었다.

세라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건 다른 사람도 아닌 준혁이었다.

그는 매일 밤마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해주었다.

더욱이 점심 무렵 걸려 온 전화에선 HN그룹 주최하에 열리는 자선 경매 행사에 최 회장이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고 했다.

그게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일이었다.

추측하기론 자신을 보기 위해 참여하는 것 같다는데,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최 회장에 대적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여유롭게 외식이라니.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밥이나 먹자는 거야. 집에 있었어도 어차피 저녁은 먹었을 거잖아. 그 저녁, 오늘은 집 말고 여기서 먹자는 거라고.”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연희가 다시금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메뉴판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연희는 입술을 한번 힘주어 물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꺼내었다.

“꼭 이런 상황에 여기까지 와서 밥을 먹어야 해?”

연희의 잇새로 기어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꾸만 조급해지는데, 저만큼이나 이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준혁이 제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아 야속하기만 했다.

함께 앉아 있는 룸 안으로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제야 준혁이 메뉴판을 내려놓곤 연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먹으면 안 되는 건데.”

준혁이 나직이 읊조렸다. 순간 말문이 탁 막힐 정도로 단조로운 톤이었다.

연희는 대답 대신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뭐든 의미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였다.

혹 오늘 이곳에 RM 일가의 누군가가 자리라도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그가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으니 연희는 홀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때 다시금 준혁의 목소리가 룸 안을 울렸다.

“그냥 저녁이나 먹자는 거야.”

연희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정말 아무 의미도 없이 저녁이나 먹으러 여길 왔다고 생각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밥이나 먹겠다고 온 거면 그냥 일어나자. 지금이 그럴 상황도 아니고, 또 오늘 그럴 기분도 아니…….”

“신연희.”

연희가 막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이었다.

준혁이 잔뜩 경직된 목소리로 연희를 불렀다.

연희에겐 그것까지도 너무나 피곤하게만 다가왔다.

준혁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지옥 속이었다.

연정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바짝바짝 탔고, 그런 와중에 세라인 척 어딘가를 다녀와야 하는 날이면 온몸의 기가 쭉 빠져 서 있을 힘조차 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맘 편히 외식이나 하자는 준혁의 말은 투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연희는 대꾸할 기운도 없어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대로 준혁이 자신을 따라 나오든 나오지 않든, 저라도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었다.

막 두 걸음쯤 떼었을 때였다.

준혁의 말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너랑 나, 10년 만에야 겨우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게 됐어.”

연희는 목 끝까지 한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았다.

모르지 않았다. 저 역시 그가 말하는 그 10년의 공백의 당사자였다.

답답한 건, 지금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꺼내냐는 거였다.

연희는 가방을 쥔 손에 한가득 힘을 주곤 뒤를 돌아 준혁을 보았다.

“그래. 너랑 나 10년 만에 이렇게 다시 만났어. 그래서? 10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까 반갑다고 웃으면서 같이 밥 먹으면 되는 거야? 하, 우리가 지금 그럴 때야? 도대체 너까지 왜 그래, 준혁아.”

연희는 위태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하소연하며 이마 위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처한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벅차기만 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고역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지 그간의 모든 선택들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세라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세라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않았더라면 연정이 이렇게 될 일도 없었고, 머리 아픈 제 출생의 비밀도 여전히 모른 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하루하루 버티는 게 힘은 들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지금처럼 비참하고 지옥 같진 않았을 터였다.

연희는 세라를 만나 돈에 흔들리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사무치게 후회되었다.

그때마다 공식처럼 뒤따르는 준혁의 생각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지만, 죄책감에 스스로를 탓하기엔 현재가 너무 괴롭고 고되었다.

연희는 자꾸만 감정적으로 변해가는 제 마음을 추스르곤 다시금 뒤를 돌았다.

이렇게 계속 준혁을 마주하고 있다간 해선 안 되는 말까지 전부 해버릴 것 같았다.

“너랑 내가, 10년 만에야 겨우 이렇게 같이 밥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하지만 오늘따라 준혁이 집요하게 이 자리를 고집했다.

연희는 참을 생각도 없이 입 안에 가득 들어찬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줄곧 힘들지 않던 날이 없었는데, 오늘은 유난히도 힘겨운 날이었다.

준혁까지 이러니 더욱이나 이 자리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자꾸만 이어지는 준혁의 목소리가 몇 번이고 발길을 붙잡으며 외면하는 것조차 허락하질 않았다.

연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억지로라도 발을 떼어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지언정 지금은 그를 피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우연히 길 가다 마주친 것도 아니고, 내 결혼식장에서 그것도 신부로 예정돼 있던 여자를 대신한 너를 봤을 때.”

언제나 연희의 마음속에 죄책감의 씨앗으로 묻혀있던 이야기가 그의 목소리를 타고 새어 나왔다.

“윤세라가 아닌 네가 나올 거라는 걸 진작부터 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널 봐야만 했던 나는. 그렇게라도 너를 다시 찾고 싶었던 나는.”

“…….”

“그 모든 순간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널 봤을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연희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생각했었다. 그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줄곧.

10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진한 감정이 담겨있다는 걸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끝끝내 준혁에게 그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던 건 정준혁과 신연희의 미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윤세라와 신연희가 쌍둥이 자매라는 사실만 알지 못했더라도 그의 집에서 나왔던 그 날, 기어이 그를 남겨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가 붙잡는다고 해도, 몇 번이든 기회를 엿봐 그의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정준혁과 윤세라의 결혼 이야기가 그토록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는데, 앞으로라고 자신의 자리가 새로 생겨날 리 없었다.

준혁의 옆에 반드시 제 자리를 만들겠다고 작정한다면 준혁이 어떻게든 그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애쓰겠지만, 연희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신연희로서 정준혁 곁에 남는 순간 불륜이란 말이 주홍글씨처럼 준혁을 따라다닐 것이다.

그 사실은 준혁의 곁을 욕심낸 게 신연희든 윤세연이든, 그게 누구인지와는 관계없이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연희는 준혁이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그의 위치부터가 대중의 시선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가 평생을 비난 섞인 시선 속에서 살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러니 준혁을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준혁의 마음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이기적으로 구는 게 맞았다.

그런데. 그런데…….

“연희야. 나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하루도 널 잊어본 적이 없어.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널 다시 되찾기 위해서였고,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도 난 네 생각에 단 하루도 너 없이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매정하게 버리고 떠난 여자가 뭐가 이쁘다고, 10년을 그 여자 하나만 기다리며 언제나 함께였다는 남자를 두고 차마 먼저 가버릴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나고 이렇게 외식한 적, 한 번도 없잖아. 그러니까.”

“…….”

“그러니까 오늘 하루쯤은 이렇게 좋은 데 와서 같이 밥 좀 먹자.”

연희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그러곤 준혁을 마주 보고 섰다.

이까짓 외식이 뭐라고 그가 무척이나 간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너무 속이 상해서 눈살이 다 찌푸려질 지경이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윤세라를 향한 복수를 핑계로 이렇게 다시 그의 옆에 남기로 했지만, 언젠가 적당한 때가 되면 다시 그를 떠날 생각을 자신이 하고 있다는 걸.

신연희가 그렇게까지 이기적이고 나쁜 년이라는 걸, 과연 알고 있을까.

“그러고 있지 말고 와서 앉아, 연희야.”

아니, 모를 것이다.

아무리 정준혁이라고 하더라도,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저녁만 먹고 들어가자, 우리.”

그가 추호도 눈치챌 수 없도록, 태연한 얼굴의 신연희가 기어이 그의 맞은편 자리에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버렸으니까.

“스테이크 괜찮아? 여기 스테이크 잘해.”

연희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속이기 위함인지,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없을 것 같은 이 자리를 마지막으로나마 함께하고 싶었던 것인지.

결국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연희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저 오늘만은 준혁이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오늘 하루쯤은 그래도 되겠지.

그 생각을 반복적으로 되뇌며 연희는 통유리창 너머로 공허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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