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이용 가치(2)
“쉰 소리 집어치우고 넌 하던 대로만 해.”
“하던 대로요?”
“이진이 계속 쇼핑시키라 이 말이야.”
숙희의 말에 태광의 낯빛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혹 말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건 아닐까 잠시 고민하는 듯도 했지만, 태광은 곧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이 노인네가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내가 미쳤수? 이 꼴을 당하고도 그놈 잘되는 꼴을 보게?”
숙희의 미간으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인상은 쓰지 않았다.
수준 떨어지는 말본새가 못내 심기를 건들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은 태광의 도움이 아쉬운 입장이었다.
“당연히 잘되게 둬선 안 되지.”
“당최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듣게 얘기해요!”
“이진이한테 카드 쥐여줘. 대신 HN백화점은 안 돼. HN에서 가장 견제하는 경쟁업체면 좋겠는데…….”
숙희는 답지 않게 고민하는 척했다.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다음은 태광이 눈치껏 움직이는 게 맞았다.
그래도 제 아래에서 배운 게 영 없는 건 아닌지, 골몰하는 표정을 짓던 태광이 금세 답을 찾은 얼굴을 했다.
그거로 충분했다. 그녀의 의중이 무엇일지는 눈치껏 파악했을 것이리라.
숙희는 꺼내지 않은 뒷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태광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을 못 박듯 힘주어 꺼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적당히 압박 주기만 해. 그 이상 일 벌이지 말고. 알겠어?”
“나 원, 이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정준혁이 찾아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럽니까?”
태광은 이런 상황에서도 준혁의 역성을 드는 숙희의 태도가 서운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는 수 없었다.
이대로 RM푸드 대표 자리를 내놓고 싶지는 않으니.
“아무리 내 뒤통수를 쳤어도 정준혁이는 여전히 내 손주사위야. 우리 세라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놈이고.”
숙희는 태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태광에게 준혁의 가치를 명확하게 주입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준혁을 대신할 대안이 당장이라도 나타나 준다면 이렇게 공들일 것도 없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으로선 준혁을 대신할 정도로 가치 있는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이 정준혁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붙잡아 세라 옆에 두어야 했다.
“명심해. 우리 세라가 무사히 회장 자리를 이어받아야 너도 푸드 대표 자리 계속 차지할 수 있는 거야. 알겠어?”
세라를 두고 그린 큰 그림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거짓말쯤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역시나 대표 자리에 대한 언급 앞에서 태광은 속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가 환해진 낯짝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숙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먼저 일어나야 태광도 일어날 것이고,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치를 눈앞에서 치울 수 있었다.
여든이 넘은 노인은 그 나이가 무색할 정도의 고아한 걸음걸이로 서재 문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막 문을 열려던 그 순간.
“아, 그리고 하나 더.”
잊었던 무언가를 떠올리곤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처리해줘야 할 아이가 하나 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숙희는 사뭇 진지해진 눈으로 태광을 바라보았다.
***
“대표님, 다음 주에 예정된 자선 경매 행사 참석자 명단입니다.”
준혁은 하던 일도 미루고 김 비서가 내민 종이를 받아들었다.
다음 주에 있을 자선 경매 행사는 HN 측에서 매년 주최하는 중요한 일정으로, 경매로 발생한 수익금을 전부 사회에 기부한다는 뜻깊은 의미가 담긴 행사였다.
물론 취지대로 수익금 전액을 기부금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는 자리였기에 사교의 장이 되기도 했다.
준혁은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확인하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올해는 최숙희 회장님도 참석하시네요?”
“네. 윤명호 회장 내외와 함께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덧붙은 김 비서의 설명에 준혁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이미 지난 시즌 행사 때 두어 차례 최 회장에게 참석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건강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던 그녀였다.
최 회장에겐 이런 자리가 피곤하기도 할 터였다. 시장통에 있던 국밥집에서 지금의 RM을 일구기까지. 그녀의 일대기는 재계에서 전설처럼 떠돌았다.
그 탓에 최 회장을 보고 싶어 하는 인사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에게 재계 인사들이 잔뜩 모이는 이런 행사 자리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곳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엔 나오시겠다, 그거지.”
준혁은 의미심장한 투로 중얼거렸다.
속내가 너무 뻔히 보이는 수였다.
직접적인 요청에도 거절 의사만 표하던 최 회장이 하필이면 올해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전해온 그 의중이 너무나도 명확한 뜻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희를 보기 위함일 것이리라.
김 비서에게 추가로 보고받은 내용에 의하면 윤세라가 RM 일가 저택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렇다면 가짜 신부 사건의 전말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을 텐데, 최 회장의 입장에선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윤세라와 똑같이 생겼다는 연희가 가장 첫 번째로 궁금할 것이고, 두 번째는 어떻게 정준혁이 신연희가 가짜라는 걸 알고도 RM푸드 비리를 폭로한 것이냐에 관한 것일 터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만 쓰시려니 영 궁금해서 안 되겠는 모양이네. 이렇게 된 거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생각이신 거 같은데.”
최 회장의 의중은 완벽하게 파악이 되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알겠습니다. 추가로 지시할 사항이 생기면 호출하도록 하죠. 이만 나가봐요.”
“예, 대표님.”
준혁은 김 비서가 대표실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곤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게 가지 않았다.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혁이 입매를 다정하게 휘어 올리곤 입술을 달싹였다.
“나야, 연희야.”
***
“뭐?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이진은 넥타이를 푸르는 태광의 팔을 붙잡곤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제법 날카로운 소리에 태광의 미간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태광은 조금쯤 거친 손길로 이진을 밀쳐내곤 푸르다 만 넥타이에 다시금 손을 가져다 댔다.
“귀먹었냐? 내가 목소리 데시벨 좀 낮추고 얘기하라고 몇 번을 얘기해! 귀청 떨어지겠네, 아주!!”
태광의 불호령에 이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곤 태광의 손에 들린 넥타이를 받아들었다.
“우리 오빠 귀 아팠어? 미안, 미안. 방금 오빠가 한 말이 대체 무슨 소린가 해서 놀라서 그랬지, 나도.”
이진은 태광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어댔다.
자신을 대하는 태광의 태도에 무시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게 못내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태광의 명의로 된 카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존심 같은 건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이진은 언제 기분이 나빴냐는 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빠, 다시 한번만 말해봐. 최 회장이 뭘 어쨌다고?”
“하여튼 꼭 두 번 말 하게 하지! 최 회장 지시 떨어졌다고.”
이진은 최 회장이란 말에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미간을 좁혔다.
태광은 최 회장이 제 인생을 바꿔줄 금싸라기 줄이라고 했지만, 이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최 회장만 만나고 오면 태광은 늘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르고 돌아왔고, 한동안 한껏 날이 선 채로 이진에게 화풀이하기 일쑤였다.
화풀이야 그냥저냥 받아줄 수 있었지만, 태광이 최 회장의 사주로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르는 게 이진은 너무나도 싫었다.
태광을 사랑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태광에게 최 회장이 금싸라기 동아줄이듯, 이진에겐 태광이 그랬다.
지긋지긋한 룸살롱 생활을 청산하게 해준 게 태광이었고, 그와 호적을 합친 덕분에 지금껏 팔자에도 없을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 말인즉 태광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도 끝이라는 의미였다.
이진은 조금쯤 초조한 얼굴로 태광을 바라보았다.
“일단 대표 자리 지키기 위해서라도 최 회장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느낌이 좀 그래.”
태광의 말에 이진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렇지 않아도 최 회장이 시키는 일을 태광이 도맡아 한다는 게 못마땅할 따름인데, 태광까지 느낌이 좋지 않다고 하니 이진은 덩달아 초조해지는 기분이었다.
“느낌이? 느낌이 왜? 뭐 이상한 뉘앙스라도 풍겨?”
“최 회장이 어디 속마음 내색할 양반이야?”
“그럼?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느낌이 좀 그렇다는 거야?”
“몰라. 그냥……. 그냥 좀 찝찝해.”
태광은 한참 만에 눈살을 구기며 대답했다. 그러다 무언가 번뜩 생각난 얼굴로 이진을 보았다.
“일단 너 내가 준 자료들, 잘 가지고 있지?”
“당연하지! 오빠가 잘 챙겨두라고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했는데, 내가 설마 잃어버리기라도 했으려고?”
이진은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미소까지 머금었다.
이진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태광의 입매도 덩달아 휘어 올라갔다.
“잘했어. 그거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잘 정리해서 가지고 있어. 알겠지?”
“알겠어. 잘 챙겨둘게.”
태광은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하곤 와이셔츠를 벗었다.
막 파자마 상의로 갈아입은 찰나, 태광은 잊고 있던 최 회장의 지시사항을 떠올리곤 이진을 향해 말했다.
“아 참, 너 쇼핑 좀 해야겠다.”
“어? 쇼핑? 진짜? 진짜야, 오빠?”
이진이 한껏 신이 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태광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너는 애가 참. 이런 와중에도 쇼핑하란 말에는 그저 신나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이거로 내일 쇼핑 다녀와.”
이진은 태광이 내민 카드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받아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리 문제가 터지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 최대한 띄지 않기 위해 칩거하다시피 하던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거리던 참인데.
이진은 한껏 오른 흥을 감추지 못하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때 태광이 다시 한번 이진을 바라보았다.
“아, 내일은 HN백화점으로 가면 안 된다.”
“어? 왜?”
“안 된다면 그냥 안 되는 줄 알아. 그리고 쇼핑 같이 다니는 친구들 꼭 데리고 가고. 알겠어?”
명령조의 기색이 적나라할 정도로 묻어났지만, 이진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아, 그럼 내일 다들 뭐 하는지 연락부터 좀 해봐야겠다!”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이진은 분주한 손길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