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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40)화 (40/80)
  • 40. 이용 가치(1)

    “나 왔수다.”

    태광은 숙희의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어지간한 기업 총수도 숙희 앞에선 없던 예의까지 차리는데, 태광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숙희 역시 그런 태광을 나무라지 않았다.

    태광은 숙희가 자그마한 국밥집을 운영하던 시절, 매일같이 드나들던 동네 건달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 일이라곤 주먹질이 전부였던 그가 사회에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많지 않았다.

    공사판도 얼마간 전전해봤지만, 결국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며칠 못가 잘리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환영해주는 곳은 주먹의 세계뿐이었다.

    조직에 들어간 태광은 위에서 시키는 일이면 그게 뭐든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러나 몸을 사리지 않는 것만으로는 그가 원하는 자리까지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건 주먹질뿐인데, 야망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태광은 점점 권력에 대한 갈증을 느꼈고, 그 무렵 숙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시작은 숙희가 지정한 사람을 찾아가 겁을 주는 정도였다. 그보다 더한 일도 많이 했던 태광이었기에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수록 숙희가 제안하는 일의 위험도가 높아졌고, 그에 따른 보상 역시 쉽게 포기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그렇게 달려와 차지한 것이 지금의 자리였다.

    태광은 숙희의 손을 잡은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숙희 때문에 더러운 일도 많이 해야 했지만, 그가 원하던 권력만큼은 확실하게 가질 수 있었으니 후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달콤하기만 할 줄 알았던 미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태광은 코앞까지 다가온 위협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최숙희는 정말 확실한 라인일 거라 믿었는데, 감히 최숙희에게 대항하겠다고 나서는 놈이 생긴 것이다.

    더욱이 기가 막힌 건 그놈이 숙희의 손주사위라는 사실이었다.

    태광은 미간을 한껏 구긴 채 숙희를 바라보았다. 잠잠해진 듯했던 분이 다시금 밀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회장님 손주사위가 뭐 때문에 회장님 뒤통수를 휘갈기느냐 이 말입니다!”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닫고 있던 숙희가 단박에 형형한 눈동자를 드러냈다.

    숙희는 질끈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곤 태광의 말에 응당 대답해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왜 회장님한테 묻긴! 그럼 회장님 손주사위 얘기를 어디 가서 묻습니까? 어제 회장님 손주사위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기나 해요? 내 회사를 고발한 거로도 모자라 보네르 입점 계약도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답니다! 위약금까지 물어주겠대요!”

    숙희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태광이 이 이상 사고 칠 수 없도록 당장에 불러들인 것인데, 그사이 준혁을 만났다는 게 퍽 기가 찼다.

    그러나 그보다 숙희의 두통을 가중시키는 건 위약금까지 물어주며 보네르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겠다고 했다는 준혁의 입장이었다.

    보네르는 이번 식품 성분 문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큰 문제를 안고 있는 골칫덩이였다.

    태광이 제 사업체로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곤 단속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알아챈 시기가 단단히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러게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돈 가지고 장난질 치는 거 적당히 하라고.”

    숙희는 탄식이나 다름없는 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리를 해야 하는 건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그 와중에도 뭘 잘했다고 씩씩거리는 건지, 태광의 콧김 소리가 더욱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숙희는 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언제나 그랬듯 감정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선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길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좀처럼 보이지 않던 해결 방안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회장님이 좀 나서주셔야겠습니다.”

    태광이 눈치도 없이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차지한 RM푸드 대표 자리인데.

    그의 입장에선 1분 1초가 초조할 따름이었다.

    언제나 명확한 해답을 안겨주던 숙희가 이번에도 모든 일을 척척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는데, 해답은커녕 침묵만 지키고 있으니 그의 속은 점점 더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도록 눈만 감고 있던 숙희가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어.”

    결단코 태광이 기다리던 유의 대답은 아니었다. 그 탓에 힘겹게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에이, 시팔!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대로 물러나기라도 하라고? 내가 이런 식으로 쫓겨나려고 그동안 회장님 뒷수발 다 든 건 줄 압니까??”

    태광은 금방이라도 숙희에게 달려들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무척이나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숙희는 RM그룹의 창업주이자 현존하는 대기업 중 최초의 여성 창업주란 명성에 걸맞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안광을 번뜩이며 단박에 태광의 기를 제압할 뿐이었다.

    “그 입.”

    “…….”

    “다물라고 했다.”

    주먹질 하나로 뒷골목을 평정하던 태광이었지만, 숙희의 카리스마 앞에선 화려했던 과거 이력도 무용지물이었다.

    태광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면서도 온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어떻게도 분을 참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누구 앞이라고 입을 막 놀리는 거야.”

    숙희는 고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매섭게 으름장을 놓았다.

    “다시 뒷골목 건달 생활 시작하고 싶어?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네가 딱 그 짝이야. 내가 말버릇 고치라고 몇 번을 얘기해. 네가 그러고도 RM푸드의 대표 자리를 욕심낼 자격이 있어?”

    따끔한 일침도 마다치 않았다.

    그제야 태광이 간신히 분을 삭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숙희가 얼추 갈무리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러곤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태광을 응시했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어. 제아무리 정준혁이라고 해도 제까짓 게 HN그룹 회장 아들일 뿐인데, 그놈이라고 별수 있으려고. 저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이 최숙희 상대로는 어림도 없지.”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겁니까?”

    좀 전까지와는 달리 여유를 되찾은 숙희의 모습에 태광이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숙희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속이 보여도 이렇게까지 훤히 보일 수가 없었다.

    원래도 상대를 파악하는 데 능한 편이긴 했지만, 태광은 노력조차 들일 필요도 없을 만큼 새하얀 도화지 같았다.

    자신이 등에 업고 가야 할 놈이 그런 놈이라는 게 마뜩잖았지만, 단순한 만큼 이용해 먹기에도 좋으니 어쩔 수 없는 카드였다.

    “그 집안 아들이 그놈 포함해서 셋이야. 야망이 있는 놈이라면 섣부른 행동은 못 하겠지. 저 위로 형이 둘씩이나 있는데, 제 점수 깎아 먹는 짓이야 하려고.”

    숙희는 태광을 향한 진심을 완벽하게 숨긴 채 정리된 생각을 하나둘 꺼내었다.

    그것까지도 태광을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태광이 미끼를 물 수 있도록 물밑 작업을 시작한 거란 속내 역시 새까맣게 숨겼다.

    “그걸 기회로 삼아야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정준혁이한테 적당한 압박 좀 줘야겠다.”

    숙희는 여우 같은 눈으로 태광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곤 꿈에도 알지 못하는 듯 태광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숙희의 입가로 만족스런 미소가 휘감겼다.

    “적당한 압박이라니? 나더러 뭐 어쩌란 말이요?”

    “어쩌긴. 네 놈이 뒷돈 받아먹을 수 있던 게 이진이 이용해서 그 백화점 실적 쥐고 흔들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

    숙희가 태광을 나무라는 척 말을 뱉었다.

    뒷돈이나 받아먹겠다고 제 와이프까지 이용하는 놈이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감히 RM의 기반이 된 푸드 사업체를 욕심낸다는 게 못내 언짢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사실 숙희는 태광이 그따위 짓거리를 일삼고 있었다는 걸 안 순간, 되도록 빨리 태광을 내쳐야겠단 생각부터 했었다.

    마침 태광을 RM푸드 대표 자리에서 해임시킬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비리가 터진 건 다른 의미로 보면 적당한 기회가 찾아와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자신이 제일 아끼는 RM푸드 명성에 한 차례 먹칠을 했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큰일을 위해선 그 정도 피해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더욱이 태광을 내치고 나면 그 자리에 세라를 앉힐 생각이었다.

    적당한 시기가 되기도 했고, 돌아가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지금이 적기인 듯했다.

    그러니 그러기 위해서라도 태광을 잘 구슬려 이용 가치를 최대로 활용해야 했다.

    “회장님도 참. 내가 이용하긴 누구를 이용했다고…….”

    숙희가 머릿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이, 태광이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숙희는 그 모습까지도 가증스러워 태광을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꿋꿋하게 인내했다.

    자신이 그린 최고의 그림을 위해서라도 당장은 지저분한 일들을 해결해줄 태광이 필요했다.

    숙희는 생각을 갈무리하곤 명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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