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9)화 (39/80)
  • 39. 윤세라 행세

    연희는 얼마 전 구입한 세단의 액셀을 꾹 밟았다. 한참을 속력을 내 달리던 차가 멈춘 곳은 갤러리 주차장이었다.

    연희는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끄기 무섭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늘 찾은 ‘더 갤러리’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아티스트들이 1순위로 찾는 전시장인 거로 유명한 곳이었다.

    워낙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 기사로 몇 번 접한 곳이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걸음까지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연정의 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윤세라가 이곳 ‘더 갤러리’의 관장과 친분이 있다는 정보를 지난밤 준혁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희는 핸들을 두 손으로 꾹 쥔 채 상체를 당겨 앞 유리를 통해 보이는 건물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더 갤러리’는 아티스트들에게 인기 많은 갤러리인 것 이외에 국내에서 가장 넓은 부지를 소유한 갤러리로도 유명했다.

    그 탓에 갤러리 건물도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컸는데, 주차장에서 갤러리까지 꽤 걸어야 함에도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돈 쓰는 게 또 일이겠지…….”

    연희는 하릴없이 중얼거렸다. 생각만 하던 걸 눈으로 직접 볼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야 하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돈을 쓰기 위해 시간을 내고 움직인다는 게 영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무기력증까지 찾아와 옴짝달싹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까운 마음은 사그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데, 그들과 같은 부류인 척 굴어야 하는 게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복수를 위해선 그것까지도 이겨내야 했다.

    연희는 얼마 전 준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특별하게 해야 할 일은 없어. 백화점에 가선 쇼핑을 하는 척하면 되는 거고, 갤러리에 가선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는 척만 하면 돼. 그러다 아는 척을 해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들을 하나씩만 하면 되고.’

    연정을 그렇게 만든 세라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세라 역시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아픔의 두 배, 세 배,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 말을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던 건, 어디까지나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에 준혁이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모습으로 제안을 해 왔다.

    ‘윤세라는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체면을 차려야 한다고 교육받아왔어. 그래서 사람들의 눈이 있는 자리면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지켰고, 그렇게 대외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왔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연희는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지키는 세라의 모습은 가히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낯설기만 했다.

    더욱이 그렇게 할 줄 아는 여자였더라면, 제 앞에서 그간의 모습들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연정을 찾아가 이 사달을 내는 일은 더더욱이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의문들이 이어진 준혁의 말에 말끔히 해소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주변 사람들한테는 상상 이상으로 안하무인처럼 굴었다고 하더라. 밖에서 억누른 걸 윤세라가 생각하기에 만만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소하는 식이었던 거지.’

    그 말에 연희는 더욱이나 독기가 솟는 걸 느꼈다. 자신과 연정은 윤세라의 집안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만만한 상대에 속하는 셈이었다.

    제게 한 행동은 차치하더라도 연정을 만만하게 보고 그렇게 행동했다는 게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아마 널 윤세라라고 착각한 사람들은 네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윤세라 측에 연락을 넣겠지. 저들끼리 수군거리다 윤세라 귀에 들어가든 윤세라한테 직접적으로 이야기가 들어가든, 어떤 경로로든 간에 윤세라는 점점 감정적으로 몰릴 거야.’

    ‘…….’

    ‘그러다 윤세라가 직접 나서서 실수라도 해주면 우리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고,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지금껏 만들어온 윤세라의 이미지에는 서서히 금이 가겠지.’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연희는 정신을 차리는 것도 쉽지 않은 와중에 준혁이 한 말을 착실하게 지켜냈다.

    그러기 위해 지금 착용하고 있는 옷과 액세서리, 들고 있는 가방과 여기까지 끌고 온 차까지.

    윤세라로 보이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입했다. 먼젓번 윤세라가 송금해준 4억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4억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을 준혁이 필요하다면 그가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연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그렇지 않아도 준혁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까지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연희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곤 얼마 전 윤세라가 자주 찾는다는 명품매장에 들러, 한 차례 진상을 떨고 구매한 가방을 손에 쥐었다.

    그 안에서 꺼낸 건 가방과 같은 브랜드의 화장품인 립스틱이었다.

    신연희였다면 사지 않았을 색상이었다.

    원래도 쨍한 색깔에 형광빛까지 돌아 무척이나 화려했다.

    연희는 저였다면 바르지 않았을 그 립스틱을 거침없이 입술에 덧발랐다.

    조금 지워진 듯했던 입술 색이 선명해지자, 윤세라라고 해도 손색없을 모습이 만들어졌다.

    연희는 마음을 다잡곤 차에서 내렸다.

    갤러리로 향하는 걸음이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

    “어머, 세라 씨. 역시 이번에도 와줬네요.”

    막 갤러리 입구로 들어서던 찰나에, 고상한 차림새의 여자가 알은척을 해왔다.

    연희는 그 여자가 ‘더 갤러리’의 관장이라는 걸 눈치껏 알아차렸다.

    때마침 지나가던 직원이 여자를 향해 인사하며 ‘관장님’이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니 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관장님.”

    연희는 뻔뻔한 얼굴로 환대에 대한 인사를 차렸다.

    지금껏 쭉 그래왔듯, ‘더 갤러리’의 관장도 자신이 윤세라가 아닐 거라는 의심은 조금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연희는 안으로 들어서는 관장을 따라 하이힐에 올라선 다리를 움직였다.

    갤러리 내부는 북적거린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전시된 작품을 관람하고 있었다.

    연희는 관장과 함께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관람을 하기 전 관장과 더 많은 대화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관장은 그저 침묵을 지킨 채 가이드 역할만 자처할 뿐이었다.

    연희는 아직 타이밍이 아니란 걸 직감하곤 묵묵히 관장을 따라 전시된 그림을 바라보았다.

    으리으리한 건물 크기에 걸맞게 전시 구역도 꽤나 많았다. 관장을 따라 절반 이상을 다 관람했을 즈음이었다.

    내도록 조용하던 관장이 새롭게 들어선 구역에 전시된 그림을 보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세라 씨, 이 그림 어때요?”

    관장의 목소리는 기대감에 잔뜩 젖어 있었다. 연희는 직감적으로 이 그림의 작가가 관장이 눈여겨보고 있는 화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이라면 조예는커녕 기본적인 지식조차도 없었기에 대답할 말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꽤 높은 집중력으로 그림을 관찰한 후에야 그림에 담긴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관건인데…….

    연희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이 부분에서 말을 잘해야 윤세라 대역이란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관장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요즘 제가 관심 두고 있는 작가님 작품이에요. 사실 아직 우리 갤러리에 전시할 정도의 명성이 있는 분은 아니에요. 데뷔한 지 꽤 되었는데, 영 빛을 못 보더라고요.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내가 먼저 연락해서 초청했어요. 이번 기회를 통해선 부디 빛을 봤으면 좋겠는데.”

    연희는 그림에 대한 감상평으로 고민하던 것을 멈추곤 입매를 휘어 올렸다.

    관장의 말을 듣기 무섭게 윤세라의 이미지를 망치기 위한 말로 적절한 것이 단박에 떠올랐다.

    교양 없는 모습을 보이기에 너무도 적절한 판이 깔렸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연희는 신연희로서 느끼는 감정을 싹 지우곤 과거에 본 적 있던 윤세라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렸다.

    완벽히 흉내 낼 자신은 없었지만, 그때의 얼굴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안면근육을 움직였다.

    “작가님이 여러모로 운이 좋네요. 관장님 눈에 띈 덕에 분에 넘치는 갤러리에서 전시도 하시고.”

    연희는 새빨간 입술을 조잘거렸다. 해맑은 미소는 시종일관 입가에서 지우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장이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아직 빛을 못 보셨다 뿐이지, 분에 넘치는 게 저희 갤러리가 될 수도 있죠. 저희 갤러리를 통해 작가님이 주목을 받으신다면 작가님께도 저희 갤러리가 특별해질 거고, 그렇게 상부상조하는 거 아니겠어요?”

    관장은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지만, 그게 억지로 만들어낸 거란 걸 연희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했던 말이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대성공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방만 더 날린다면 이대로 갤러리를 나서도 될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연희가 다시금 무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요.”

    “네, 저는 언젠가 이 작가님이 꼭 빛을 보실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그림도 벌써 몇 점이나 사두었…….”

    “어머! 이를 어쩌죠? 오후에 선약이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연희는 손바닥까지 찰싹 소리가 나도록 부딪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탓에 조용히 그림을 관람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끌 수 있었다.

    시선이 불편한 건지, 제 행동이 불편한 건지.

    줄곧 온화하던 관장의 표정에 은근슬쩍 금이 간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준비한 말을 이었다.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시간 내주셨는데 끝까지 못 보고 가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관장의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희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번엔 그림 한 점 살 생각으로 왔는데, 죄송한 마음에 대한 성의는 그거로 대신할게요.”

    “어머,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었어요?”

    언짢은 기색으로 가득하던 관장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졌다.

    그 꼴이 어찌나 우습던지.

    연희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샐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대신 조금 전까지 관장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그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사겠다고 마음먹은 그림이 그것인 양 착각할 수 있도록.

    한참을 그림 위에 박아넣었던 시선을 돌려 관장을 보았다.

    예상대로 관장은 자신이 응원하는 작가의 그림을 구매하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연희는 온 힘을 다해 이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순수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러곤 지체 없이 준비한 말을 꺼내었다.

    “아까 제일 처음 본 그림이요. 그 그림, 제가 살게요.”

    “아, 한 작가님 그림이요? 전 또 이 그림을 빤히 보시기에 이 그림을 마음에 두신 줄 알았는데…….”

    돈을 들인다는 말에 미소는 지우지 못했지만, 관장의 낯빛은 온통 실망감으로 가득했다.

    그거로 충분했다. 준비한 마지막 대사를 위한 판으로는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다.

    “아무렴 그림도 투자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성으로만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순 없는 거니까요.”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아무리 당신의 안목이라고 해도 상술이 조금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냐고.

    관장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을 표정 또한 잊지 않았다.

    관장의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그 모습을 꿋꿋하게 응시하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윤세라 행세를 위한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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