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8)화 (38/80)
  • 38. 계약 파기

    “거참, 무슨 일이길래 그러시냐니까요.”

    태광은 건너편에 앉은 준혁의 눈치를 살피며 핸드폰에 대고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감히 누구 앞이라고 토를 달아. 내일 점심께 당장 집으로 들어와. 알겠어?

    최숙희의 역정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태광은 준혁과 함께 있다는 것도 잊고 무자비하게 표정을 구겼다.

    “에이, 시팔!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 줄 아나!”

    잇새로 거친 욕설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준혁이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의 전화인지 알 것 같았다.

    준혁은 여유롭게 목을 축이곤 줄곧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기분 나쁜 전화라도 받으신 모양입니다.”

    군더더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무적인 톤이었다.

    그제야 아차 한 태광이 뒤늦게 입매를 휘어 올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닙니다. 제가 정 대표님 앞에 두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 대표님이 더 잘 아실 테니 이해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사업의 ‘사’자도 모르는 놈이 껄껄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준혁은 실소가 다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준혁은 태광이 자리를 청해온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이번 RM푸드 비리 폭로 건으로 연락을 해 온 것이 분명했다.

    김태광은 현 RM푸드의 대표이자, HN백화점 박승준 전 대표와 자금 횡령 도모는 물론 갖가지 부정을 끊임없이 저질러 온 인물이었다.

    최숙희의 수족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수족이라기보다는 최숙희를 대신해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찌끄레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정작 본인은 그걸 최숙희의 약점으로 잡아 제 잇속을 챙기는 데에 이용하는 듯했지만.

    확실한 건 최숙희와 김태광은 서로가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쉽게 버릴 수도 없는 관계라는 거였다.

    그게 쓸데없다고 여기면서도 굳이 여기까지 나온 이유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번 비리 폭로로 인해 윤세라의 실없는 계획이 전부 들통났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면 연희의 존재까지 알아챘을지 몰랐다.

    아니, 최숙희 회장이라면 높은 확률로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후의 대비책을 위해서라도 최 회장의 의중을 알아내야 하는데, 당장은 김태광을 최 회장의 최측근 인물로도 볼 수 있으니 그를 통한다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준혁의 계산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최숙희와의 통화에서 김태광이 한 대답으로 보아, 어쩐지 그 계산에 착오가 있었을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최 회장에게 김태광의 가치가 이용해 먹기 좋은 놈 정도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RM푸드의 대표 자리까지 준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최 회장은, 김태광에게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 두어 감시를 하겠단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럴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준혁에게 태광의 가치 역시 그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원래도 단호하던 준혁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바뀌었다. 그 탓에 태광은 잠깐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늦은 시간에 이렇게 자리를 청해서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근데 아시겠지만, 지금 제 입장이 앞뒤 가려가며 일을 처리할 만큼 여유롭지가 못해서 말입니다.”

    태광은 비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요사스럽게 말했다.

    저보다 훨씬 어린놈 앞에서 이렇듯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야 한다는 게 퍽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HN백화점 전 대표인 박승준의 자금 횡령 사실이 들통나 그의 목이 댕강 잘렸다는 소식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 최 회장의 손녀딸이 새로운 대표로 내정된 놈과 결혼을 했다기에 박승준은 잘렸어도 그 불똥이 저한테까진 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식품 성분 문제를 폭로한 것이 새로 부임한 HN백화점의 대표, 정준혁이란 보고를 받았다.

    태광은 치미는 분노에 어쩔 줄 모르고 한참이나 주변 집기들을 깨부수며 악을 질러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상황에 대한 대비는 철저하게 해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최 회장의 밑에 있으며 배운 거라곤 그런 것들이 전부였는데, 알게 모르게 습득한 지식들이 요긴하게 쓰인 것이다.

    덕분에 뉴스에 보도된 식품 성분 문제에 대해선 처벌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수사를 받으며 HN백화점과의 문제를 들킬 일은 없을 거라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잡음 없이 마무리 짓기 위해선 정준혁의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정준혁까지 입을 다물어줘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일이었다.

    태광은 완벽하게 갈무리하지 못한 분노가 불쑥불쑥 치미는 기분이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그 감정을 억눌렀다.

    그러곤 할 수 있는 최고로 선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마 자리를 청한 이유쯤이야 충분히 알고 나오셨을 것 같은데, 정 대표님과 나 사이에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랄 게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마시고 이쯤 해서…….”

    “입 다물고 모르는 척 눈 감아라.”

    태광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준혁이 맥을 툭 끊었다.

    “그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준혁의 입매가 비틀려 올라갔다. 아까부터 새어 나오려던 실소를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예상하건대 태광은 연희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을 테니까.

    인연이란 단어를 운운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정준혁과 결혼한 건 윤세라가 아니라 신연희였다. 더욱이 신연희가 RM 가의 숨겨진 비운의 딸이란 사실까지 알게 된 마당이었다.

    그런 제 앞에서 감히 인연을 운운하며 어물쩍 넘어가 달라고 청하는 모습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준혁은 이번 일을 이대로 묻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적당히 겁만 주고 넘어갈 생각이었다면, 일을 이런 식으로 크게 키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고 싶었다면, 적어도 연희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일은 없게 해야 했다.

    물론 태광이 직접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네르’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더욱이 적당한 선에서 처리를 하기엔 연희의 가슴에 대못이 박힌 후였고, 그로 인해 준혁은 지금껏 그 어느 때보다 독하게 마음을 다진 후였다.

    준혁은 앞에 앉은 사내를 맹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 사내의 기세가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황한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까지 전부, 준혁은 같잖기만 했다.

    이 이상 함께하는 시간은 낭비일 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준혁은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압수수색 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김 대표님께서도 최숙희 회장님의 사업수완을 배워 아주 철저한 분이시라고 하던데, 하루 이틀 사이에 저지른 일도 아니고 이 정도쯤은 가뿐하게 넘어갈 만하시겠죠?”

    “하, 하하. 당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빈틈없는 직구에 태광이 당황한 얼굴로 억지웃음을 너털거렸다.

    그럴수록 준혁의 비웃음을 살 뿐이란 건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비책은 진작부터 강구해두셨을 테니 고작 해봐야 불구속 수사로 진행될 일에 불성실하실 이유야 없으실 테고, 그럼 그 정도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되겠죠.”

    “이봐요, 정 대표. 내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이런 식으로 몰아가는 건……!”

    “뭐, 최숙희 회장님이 눈뜬장님은 아닐 테니 김 대표님께 형이 떨어지는 걸 두고만 보고 계시지도 않을 테고요. 그럼 벌금형 정도로 마무리가 되겠네요.”

    준혁의 말에 제 발 저린 태광이 변명조로 말을 덧붙였지만, 이번에도 말을 완성하진 못했다.

    준혁의 비아냥 앞에 가까스로 유지하던 페이스가 속수무책으로 깨져가기 시작했다.

    “보네르와 HN백화점 간의 유착 관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거론이 되지 않을 겁니다. 김 대표님이 철저하게 숨겨오신 것, 보네르가 사실 매년 수십억에서 많게는 수백억까지. 온갖 구린내란 구린내는 다 풍기는 돈의 자금세탁 경로였다는 사실을 검찰 측에선 짐작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요.”

    “…….”

    “어떻게도 알아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두셨겠죠. 작정하고 숨긴 문제를 검찰이라고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제가 계속 입만 다물고 있다면 앞으로도 그 문제를 검찰이 알아낼 일은 생기지 않겠죠.”

    준혁은 전에 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빤히 보이는 앞으로의 일을 친절하게 나열했다.

    제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이 세상 모든 기업인 중 청렴하기만 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김태광은 비열해도 너무 비열했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까발려지는 꼴을 보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워하기는커녕 여전히 분을 못 이기는 모습뿐이었다.

    준혁은 손에 쥐고 있던 물잔을 다시금 입가에 기울였다.

    그 모습을 태광이 매섭게 벼려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아직 그를 감정적 한계로 몰아붙일 말은 따로 남아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서면으로 통보해 드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만나 뵌 김에 직접 말씀드리죠.”

    준혁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완벽하게 각 잡힌 모습으로 태광을 응시했다.

    이 자리까지 굳이 걸음한 진짜 이유를 태광에게 알릴 차례였다.

    “HN백화점과 보네르와의 계약은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파기할 생각입니다. 계약 기간 만료 전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니 그로 인해 발생하는 위약금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지급하겠습니다.”

    거액의 위약금까지 감수할 만큼 이번 문제에 대해 함구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절대로 가벼운 내용의 말이 아니건만, 준혁에게선 일말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태광은 이를 사리물었다. 정준혁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더는 최 회장에게 아쉬운 소리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럼 이만 일어나죠.”

    그 속도 모르고 준혁은 여유 그 자체의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광을 지나 룸을 빠져나가기까지, 준혁에게선 조금의 망설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태광의 화를 더욱이 치밀게 만들었다.

    “내일 점심께라고 했지……. 시팔, 진짜 일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거야.”

    태광은 이를 벅벅 갈며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식품 성분 문제 폭로에 이어 일방적인 보네르의 입점 계약 파기, 그리고 최 회장의 갑작스러운 연락까지.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태광은 신경질이 가득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앉아서 자리만 지키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