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7)화 (37/80)
  • 37. 출생의 비밀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르는 법이지요.’

    언젠가 수심에 잠긴 채 찾았던 절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30년도 더 되었지만, 숙희는 여전히 그때를 잊지 못했다.

    잊을 수 없었다. 그날은 세라가 아닌 또 다른 손녀딸을 제 품에서 버리겠다고 작심한 날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건. 그때 그 선택을 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거라고.”

    숙희는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잣말로나마 합리화를 해보았지만, 마음은 편해지질 않았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아이가 아니고서야 세라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숙희는 그날의 일을 자꾸만 반추했다.

    아들 내외는 결혼한 지 5년이 넘어가도록 아이를 얻지 못했다.

    그에 초조한 건 오직 숙희뿐이었다.

    숙희는 명호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식을 간절하게 원했다.

    지금의 명호처럼 제 가르침을 받아 명호의 뒤를 이을 손자를 너무나도 깊이 갈망했다.

    손자를 얻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손에 얻어 유정에게 먹이고 입혔다.

    처음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도 쌍둥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숙희는 제 노력에 하늘이 감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비록 복중의 아이가 아들이 아닌 딸 쌍둥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겐 너무나도 소중한 아이들이었다. 건강하게만 태어나 준다면 숙희는 제 손녀들에게 모든 걸 물려줄 작정이었다.

    배 속의 아이들은 임신 기간 내내 단 한 번도 제 어미를 힘들게 만든 적이 없었다.

    입덧은 물론 다태아 임산부일수록 가능성이 높다는 조산기 또한 전혀 없었으며, 산달까지 가득 채우고 난 뒤에야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분명 하늘이 내려준 아이들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걱정 한번을 끼치지 않으니, 이렇게까지 효심이 지극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정일이 되어 자연분만을 위해 분만실로 들어간 유정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수술 끝에 산모의 건강은 물론 아이들 역시 무사히 태어났지만, 세상 빛을 보기 무섭게 아이들은 곧장 집중치료실로 들어갔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산달도 가득 채워 건강하게 태어날 거라고 의사의 호언장담까지 받았는데, 아이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의식도 찾지 못했다.

    숙희는 충격에 정신줄을 붙드는 일조차 벅차게 느껴졌다. 그러나 마음처럼 정신도 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쓰러진 사이 아이들이 어떻게 되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이대로 아이들을 잃을 순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했다.

    어떻게 얻은 아이들인데.

    그날 이후 숙희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종교에 기대어 도움을 구해보기도 하고, 무속신앙에 거액을 쏟기도 했다.

    그러나 숙희의 노력에도 아이들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나날이 지쳐갔다. 그 무렵 듣게 된 이야기가 불공이라도 드리라는 거였다.

    정성을 다해 삼천 배라도 올리면 부처께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아이들을 돌봐주시지 않겠냐는 게 덧붙은 말이었다.

    숙희는 그 길로 수소문 끝에 찾은 절로 향했다. 제 간절함을 바닥까지 전부 긁어모아 정성을 들일 작정이었다.

    그렇게 찾은 곳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거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뭘 알고 계신 겁니까? 그래요?’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니.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필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단 확신이 들었다.

    스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숙희는 몇 날 며칠 절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을 경건한 몸가짐으로 불공을 드렸고, 절 안의 궂은일이란 궂은일은 전부 도맡아 했다.

    절대 침묵을 깨지 않을 것 같던 스님이 입을 연 건 어디까지나 전부 그녀의 정성 때문이었다.

    적어도 숙희는 그렇다고 믿었다.

    ‘본래 그 집에 태어났어야 할 아이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런 집안에서 아이를 둘씩이나 소생했으니, 화를 부를 수밖에요.’

    ‘스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둘이어도 이미 태어난 아이들인 것을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스님은 합장을 한 번 하곤 멀어져 갔다.

    숙희는 스님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하나만 태어났어야 할 아이가 둘이 되어 화를 부른 거란 말이 자꾸만 뇌리를 맴돌았다.

    해결법이란 없는 뜬구름같은 말일 뿐이라고, 숙희는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내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성적으로 상황을 보고 판단할 통찰력이랄 게 바닥나고 없는 상태였다.

    그 길로 숙희는 병원을 찾아갔다. 비서를 시켜 간호사를 매수했고, 아이들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둘 다 제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손녀들이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나마 더 건강한 아이를 택해야 했다.

    그 조건에 맞았던 것이 세라였다.

    그날 밤 숙희는 매수한 간호사를 찾아가 은밀하게 제안했다.

    ‘둘째 아이를 애초부터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만들어줬으면 합니다.’

    ‘네?? 그, 그게 무슨……!’

    ‘죽여도 좋고, 고아원에 내다 버려도 좋아요. RM그룹의 핏줄로 이 병원에서 퇴원하는 일만 없으면 되는 겁니다.’

    그 말을 뱉으면서도 가슴이 찢어졌다. 명호의 뒤를 이을 아이들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는 게 숙희로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봐야 했다.

    더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눈 씻고 찾아봐도 나오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이 방법으로 한 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그날 숙희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돈의 효과는 톡톡했다.

    바라던 대로 둘째 아이가 치료 중 운명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소식 앞에 유정은 오열을 했고, 명호 역시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멀쩡한 건 오로지 숙희뿐이었다.

    제 말처럼 간호사가 아이를 죽인 것일지, 아니면 고아원에 내다 버린 것일지.

    그다음 일은 묻지 않았다.

    아이의 소식에 대해 더 알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숙희 역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려보지 못한 동생과 떨어진 후 세라는 신기할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그 덕에 지금까지 명호와 유정의 아이로 살고 있는 건 세라 하나뿐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사경을 헤맸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건강하게 자라주어 숙희는 당시 자신이 버렸던 쌍둥이 중 하나, ‘세연’이 죽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스님의 말대로라면 하나였어야 할 아이가 둘이 되어 화를 입은 것이니, 둘로 나뉜 것이 다시 하나가 되어 남은 하나만큼은 별 탈 없이 자라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탓에 며칠 전 비서가 올린 보고도 깡그리 무시했던 것이었다.

    ‘회장님. 33년 전에 세연 아가씨를 처리했던 담당 간호사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길게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돈을 받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사람이 이제 와 다시 나타날 이유가 너무도 뻔했다.

    또 돈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숙희는 그 말에 대번에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비서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만 지시했다.

    잊었던 아이와 함께 잊고 살았던 죄책감까지 떠오르게 만든 치가 괘씸하긴 했지만, 그치 덕분에 세라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라고 여기며 괘씸함을 삭이는 거로 세라를 보살펴준 부처에 대한 예의를 대신했다.

    그런데 그렇게 가벼이 넘길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이야…….”

    숙희는 앓는 목소리로 탄식을 뱉었다.

    문득 며칠 전 거실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어나자마자 집중치료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몇 번 보지도 못한 얼굴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세라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닮아있었다.

    그것만으로 자신이 버렸던 또 다른 손녀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없던 애틋함까지도 생겨나는 기분이었다. 하나, 마음 놓고 반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네가 감히 우리 세라의 자리를 넘봐선 안 되는 건데.”

    숙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냉정을 되찾았다.

    잃어버렸던 손녀를 되찾게 된 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나, 애석하게도 잃어버린 손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계획한 그림에 차질을 주지 않은 채로 나타났더라면, 그랬다면 환영해줬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세연이 세라의 자리를 탐하고 있는 거라면, 제아무리 최숙희의 손녀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세라는 RM의 차기 회장이 되어야 할 아주 귀중한 인재였다.

    그러니 세라의 앞길을 막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제 손으로 다 치우는 게 마땅했다.

    숙희의 고민은 밤이 깊어가도록 끝나지 않았다. 그 끝에 결정을 내린 숙희가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나다. 너, 당장 나 좀 봐야겠다. 네가 해결해줘야 할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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