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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36)화 (36/80)
  • 36. 이실직고

    숙희는 조도를 낮춘 서재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자칫 평안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치미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숙희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쥐었다.

    사태는 파악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숙희는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감정을 억눌렀다. 그럼에도 잇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손 사장. 납니다, 최숙희.”

    -최 회장님.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숙희의 미간 위로 깊은 주름이 팼다. 당장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대꾸하는 말이 배은망덕하기만 했다.

    숙희는 이를 사리 물었다. 그간 뒷구멍으로 받아 처먹은 돈은 생각나지 않는 것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입 안에 가득 차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기엔 지금껏 일구어온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숙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진정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다시금 새어 나온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진 감정이 담긴 채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 시간에 체통도 없이 내가 손 사장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자니 내가 손 사장한테 서운한 마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회장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직원들이 일을 그렇게 처리한 모양입니다. 이걸 어떻게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숙희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한다는 말이 기가 막혔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다. 대체 어떤 회사의 직원이 사장의 승인도 없이 일을 처리한단 말인가.

    더욱이 이번 건은 감히 이 최숙희를 건드리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간덩이가 부은 놈이라고 해도 한 치 앞도 못 보지는 않았을 터. 필히 절차를 거쳐 손 사장의 재가를 받고 저지른 일일 게 분명했다.

    도통 갈무리하기 힘든 감정에 숙희의 턱이 불거졌다.

    손 사장의 입장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손 사장에게 RM그룹 만큼이나 조심스러운 게 HN그룹일 터였다.

    HN그룹의 입지와 가치를 알기에 숙희 역시 세라를 그 집안의 아들과 혼인시킨 거였다.

    천하의 최숙희가 선택할 만큼 으리으리한 집안에서 손 사장을 압박했다면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일을 이런 식으로는 알게 하지 말아야 했다.

    뉴스로 보도하기 이전에 제게 언질을 줄 시간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거기까지도 HN 측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들, 적어도 그것만큼은 최숙희와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손 사장이 지켰어야 하는 선이었다.

    몇 번을 고민해도 달라지지 않는 결과에 숙희는 다시금 눈꺼풀을 내려 닫았다.

    도통 감정이 추슬러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고작 김 사장 따위가 제 심기를 거슬렀다고 해서 체면까지 내려놓은 채 반응해줄 순 없었다.

    “죄송해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일단 그거로 됐습니다. 내가 이 시간에 손 사장에게 전화까지 넣은 건 죄송하다는 말이나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오늘 이후로 내가 손 사장에게 체통 없이 전화를 걸 만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RM그룹과 관련한 일을 다시 한번 더 뉴스로 보도한다면 그땐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숙희는 잠자코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선뜻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거로 봐선 오늘 보도한 내용 이외에 추가로 보도될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숙희는 더욱이나 침묵을 지켰다.

    선택은 손 사장의 몫이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으니 이러나저러나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자신의 손을 거쳐야 할 수많은 일 중 손 사장을 위한 일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한들, 이미 예정된 피로는 마찬가지였다.

    -아닙니다, 회장님. 내일 당장 RM과 관련해 보도될 예정인 자료가 있으면 전부 파기하라고 지시 내리겠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대답이었지만, 깍듯하기까지 한 손 사장의 목소리가 숙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지게 만들었다.

    원래라면 만족스러운 대답에 대한 대가를 하사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숙희는 여전히 차갑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입술을 떼었다.

    그런데 그때, 예고 없이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어머님, 세라 왔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건 며느리인 유정이었다.

    숙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손 사장과의 전화에 다시 집중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군요. 오늘 일은 오래도록 잊지 않겠습니다, 손 사장.”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숙희는 정작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전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리라.

    손 사장에게 볼 일은 거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제 손녀에게서 답을 얻으면 그만이었다.

    숙희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

    세라는 거실 소파에 앉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숨통이 다 죄는 기분인데, 연신 숙희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도무지 숙희와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유정이 나서서 세라를 채근했다.

    “세라야. 어떻게 된 일인지 얼른 할머니께 말씀드려야지. 그렇게 계속 입만 다물고 있으면 어떡해, 응?”

    유정 딴에는 세라에게 떨어질 불호령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부추기는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의 배려를 세라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말도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숙희가 기다리는 말은 왜 정준혁이 RM푸드의 비리를 언론에 터트렸냐는 것일 텐데, 자신의 경솔한 실수로 그렇게 됐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그 말을 하기 위해선 신연희와의 일을 비롯해 결혼식장에 가짜 신부를 세웠다는 얘기까지 해야 했다.

    세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이 자리는 결코 어물쩍 넘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님이 분명한데, 한 마디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얼마 전 집으로 왔을 때 세라 네 입으로 분명히 그랬다. 정준혁이와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한참이나 지속되는 정적에 참지 못한 숙희가 딱 붙이고 있던 입술을 떼었다.

    평소 인자하던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순간 세라가 눈에 띄게 어깨를 바르작거린 건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라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손끝만 괴롭혔다.

    얼마 전에 내가 집을 왔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은 준혁과의 결혼식 날 이후 단 한 번도 집을 찾은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혹여라도 마주치기라고 할까 봐 집은 물론 RM그룹 본사와 계열사까지.

    자신을 알아볼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 근처도 얼씬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숙희가 자신을 만났을 리가 없다. 더욱이나 이 집에서 자신을 마주했을 가능성은 제로나 다름없었다.

    세라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몇 번을 생각해도 제 얼굴로 이 집에 찾아올 사람은 연희밖에 없었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운 건 둘째치고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고작 돈을 받고 저를 대신한 주제에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던 것일까.

    세라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집으로 불려 들어온 이상 피할 길이 없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이제는 정말로 도망칠 수 있는 구석이 없었다.

    세라의 잇새로 체념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우선 죄송해요.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를…….”

    정말 해야 할 말은 아직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게 향한 세 사람의 시선이 족쇄로만 느껴졌다.

    앞으로 자신이 하게 될 말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이 가진 파급력만큼은 절대 작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 말을 꺼내야만 한다는 게 세라를 괴롭게 만들었지만.

    “모두를 속였어요, 제가.”

    기어이 그 말을 내뱉었다.

    세라는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

    ***

    새벽이 깊도록 숙희는 침소에 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뉴스에 보도된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데 그토록 믿었던 손녀의 말은 숙희를 더 큰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정준혁 씨랑 결혼식에 들어간 여자…….’

    ‘…….’

    ‘그거, 저 아니에요.’

    기함할 소리였다. 손주사위가 된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제 손녀가 아니라니.

    세라와 준혁의 결혼식엔 숙희 역시 참석했었다.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은 숙희가 살면서 수많이 달성했던 목표 중 하나를 이룬 날이었다.

    세라를 두고 그린 그림에 있어 가장 크게 두드러지던 문제를 보완한 날이기도 했다.

    숙희는 세라가 제 아들의 뒤를 이어 RM의 차기 회장이 되길 원했다.

    한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이루고야 말았던 숙희는 이번에도 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과정이 고단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평생을 그렸던 숙원 사업의 마지막을 장식할 세라의 모습만 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물론 그 모습까지 제 눈으로 보는 건 욕심이었다. 제 나이가 여든을 넘기고 있는 데다 제 아들인 명호가 아직 건재하기도 했고, 한두 해 안에 세라를 그 자리에 앉히기엔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저 자신이 눈 감는 그 날, 차기 회장으로서 세라의 입지를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 숙희가 계획한 것이 준혁과의 결혼이었다.

    숙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게 되는 사회적인 차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그 인식이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할 순 없었다.

    지금이야 세라가 제 품 안에 있으니 그 누구도 쉬이 무시할 수 없겠지만, 자신이 떠나고 난 후에도 그럴 거라곤 장담할 수 없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놈들에게 수시로 공격받게 될 것이다.

    그 상황으로부터 세라를 지켜줄 수 있는 최고의 방공호가 필요했고, 숙희가 선택한 건 HN그룹이었다.

    그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자신이 들인 노력을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결혼식에 들어간 게 제 손녀가 아니라니.

    숙희는 앓는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분명 세라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세라가 아니란 말이지.

    그 생각을 곱씹기 무섭게 숙희의 머릿속으로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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