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속보
해가 진 저녁, 연희는 퉁퉁 부은 얼굴로 병원 로비에 앉아 있었다.
내도록 우는 꼴을 보다 못한 미영이 뭐라도 먹고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결국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여기까지 내려오긴 했는데 뭘 먹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올라갈 생각이었다.
한참이나 중환자실 앞을 지켰지만, 연정의 소식에 대해선 알 방법이 없었다.
연정의 담당의를 만나게 된 건 그로부터도 한참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다행히 혈압은 잡혔지만, 아직 안심할 정도는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의 말은 고작 그게 다였다.
몇 시간을 같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건,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행히 안정을 되찾았다고. 곧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을 거라고.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연희는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연희의 마음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 길로 의사는 다시금 중환자실 안으로 사라졌고, 연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아야 했다.
미영의 성화가 아니었다면, 연정이 괜찮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하아…….”
연희의 잇새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연희는 아래로 떨군 고개를 도무지 들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제 탓이었다.
윤세라라면 충분히 이런 일까지 벌일 수 있는 사람인데,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
그것까지 헤아리기엔 제가 견뎌야 할 아픔과 충격이 너무도 컸다.
제 상처 아픈 것에만 정신이 쏠려 미처 다른 경우의 수는 헤아리지 못했다.
연희는 그 사실이 죄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자신이 조심하지 못해 연정이 혼수상태에 빠진 거나 다름없었다.
“하, 엄마, 제발…….”
제발 이대로 가지 말아요.
조금만,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 주세요.
연희는 연정을 향한 바람을 간절한 마음으로 되뇌었다.
이대로 연정이 곁을 떠난다면 정말 견딜 자신이 없었다.
무엇 하나 쉽지 않던 고된 인생을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연정 때문이었다.
연정이 곁에 있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희는 몇 번을 생각해도 아직은, 이렇게는 연정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그 생각에 멈춘 것 같던 눈물이 다시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손바닥 위로 얼굴을 묻었다.
“연희야.”
그때 느닷없이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앞에 서 있는 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만으로 가슴이 울렁거리고, 지금까지 느꼈던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감당할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왔다.
눈물이 쉴 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준혁은 말없이 연희를 품에 꼭 가두었다.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이제라도 그녀가 조금쯤은 편히 쉴 수 있도록, 그녀의 머리 위로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연희야. 내가 너무 늦었지.”
준혁은 미안한 마음을 가득 담아 연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김 비서에게 지시를 내린 후 당장 연희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RM푸드를 확실하게 끌어내리기 위해서 ‘보네르’ 문제까지 엮어 고발하게 되면, 당장 RM푸드뿐 아니라 HN백화점까지 타격을 입게 될 터였다.
제게 흠집이 나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HN백화점에 흠집이 나는 건 저뿐 아니라 백화점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직원들에게까지 흠집이 나는 일이었다.
적어도 직원들에게 돌아갈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그 문제 때문에 당장 연희에게 달려올 수가 없었다.
대비책으로 급하게 꾸려야 할 부분들을 살피고, RM푸드의 비리를 제보하는 것까지 제 눈으로 확인한 뒤 달려온 길이었다.
그녀가 지금껏 어떤 순간보다도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곧장 곁에 달려와 어깨를 내어주지 못한 게 말도 못 하게 큰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준혁은 그 미안함까지 모두 담아 연희를 위로하기 위해 노력했다.
“준혁아, 끄윽. 윤세라 씨가 엄마를 찾아왔던 것 같아. 전부, 전부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엄마가, 엄마가.”
연희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서럽게 흐느꼈다. 준혁은 그런 연희의 등허리를 연신 쓸어내렸다.
“알아, 연희야.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
연희를 달래기 위해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입술을 움직였지만, 한마디 말을 뱉을 때마다 준혁은 심장이 서걱 잘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연희가 괴로워하는 만큼 그 역시 괴로웠다.
그럴수록 준혁은 이가 갈렸다.
연희를 이렇게 만든 그 여자를 어떻게든 망가트리고 싶었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내 손으로 꼭, 그 여자가 네 앞에 머리 조아리고 사과할 수 있도록 해줄게. 오늘 네가 쏟은 눈물, 몇 배로 윤세라 눈에서 뽑아낼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할 거야.”
분노로 가득한 준혁의 목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하지만 연희는 제 설움에 파묻힌 채 어떤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연희가 정신을 차린 건, 준혁의 건네는 위로의 말 때문이 아닌, 로비 한쪽에 걸려있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속보입니다. 냉동식품 시장점유율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던 RM푸드가 식품 성분을 속여 제품을 유통했다는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해당 업체는 시중에 유통하는 모든 제품을 국내산 재료를 사용하여 제조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대부분의 재료가 국내산과 비교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수입되는 외국산이었다고 합니다. 김미나 기자의 보도입니다.」
너무도 익숙한 내용의 뉴스 보도가 단정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곧이어 바뀐 화면엔 RM푸드의 브랜드로 익숙한 브랜드 로고의 제품이 연달아 보도되었다. 관련한 기자의 설명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에 꽂힐 만큼 군더더기가 없었다.
다행인 건 아직까진 보네르와 HN백화점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하지만 곧장 들려오는 준혁의 목소리에 연희는 잠깐도 방심할 수 없었다.
“식품 성분 문제가 언론을 탔으니, 아마 압수수색부터 받게 될 거야. 그 과정에 보네르 문제도 터질 거고. 네 선택에 맡기겠다고 했는데 내 멋대로 터트려서 미안해. 근데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게 맞는 거 같다, 연희야.”
준혁의 목소리는 확고하다 못해 다부지기까지 했다. 연희는 목 끝까지 한숨이 밀려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리가 정말 이대로 펑 하고 터질 것 같았다.
준혁의 뒤에 숨어 필요하다면 그를 이용하는 것까지도 마다치 않겠다 마음먹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준혁이 입게 될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이 문제는 터트려도 그때 터트리려고 했는데.
모든 게 엉망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연희는 속수무책으로 지쳐갔다.
***
세라는 스위트룸 통유리창 앞에 서서 초조한 얼굴로 손끝을 물어뜯었다.
이따금 한 번씩 시간을 살폈지만, 그러고 나면 더욱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그런 세라의 낯빛이 조금쯤 환해진 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 비서를 보고 난 후였다.
“아가씨.”
“어, 어떻게 됐어요? 신연정 씨 어떻게 됐대요?”
세라는 다급하게 물었다. 연정에게 충격적일 말이란 건 알았지만, 그 말 때문에 혼수상태에까지 빠질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경과가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 진짜 미치겠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신연희 좀 설득해 달라니까 쓰러지긴 왜 쓰러져, 도대체!!”
세라가 발을 세게 구르며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무엇 하나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상황에 더는 히스테릭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연정을 찾아가는 것만이 최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제 말로는 어떻게도 합의점이 찾아지지 않았지만, 엄마인 연정이 연희를 설득하면 일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 같았다.
연정을 찾아가기까지도 일이 술술 풀렸는데, 왜 마지막에 와서 이 사달이 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 이렇게 되면 할머니한테 연락하는 거 말곤 이제 방법이 없는데…….”
세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방법만큼은 절대로 쓰고 싶지 않았다. 숙희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제 자리는 무사히 찾을 수 있겠지만, 한동안 삼엄한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싫어서 신연희까지 내세운 건데, 결국 그 길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니.
세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씹어 물었다.
그때 잠자코 세라를 응시하고 있던 이 비서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아가씨, 그보다 먼저 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이 상황에 내가 봐야 할 게 뭐예요, 도대체. 지금 내 자리를 신연희한테 뺏길지도 모르게 생겼는데 그것보다 먼저 봐야 할 게 뭐가 있……!”
세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 비서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었다.
곧장 뉴스 화면이 떠올랐다.
보도되고 있는 내용은 RM푸드와 관련한 건이었다.
“하, 이건 또 뭐야? 이게 뭔데. 뭐길래 나더러 보라는 거예요?”
세라는 앙칼진 눈으로 이 비서를 응시했다.
이 비서에겐 아무 잘못도 없단 걸 알았지만, 억누르지 못한 신경질이 향할 곳도 이 비서뿐이었다.
이 비서는 그런 세라의 모습쯤이야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반응 없이 뉴스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담담히 설명했다.
“RM푸드 김 대표님이 식품 성분을 속여 제품을 유통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걸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안 그래도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뭐, 나보고 저 일까지 해결이라도 하라는 거예요? 도대체 왜 그래요, 이 비서까지!!”
높아진 언성 뒤로 참지 못한 고함이 이어졌다.
세라는 한참이나 씩씩거리며 진정하지 못했다. 그제야 이 비서의 미간 역시 좁아졌다.
이 비서는 잠시간 세라의 상태를 살펴보다 미처 전하지 못한 사실을 덧붙였다.
“제보자가 정준혁 대표님이신 거 같습니다.”
“하, 뭐라고요?”
“제보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까지 어려움이랄 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HN 측에서 제보했다는 걸 일부러 알릴 작정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쉽게 알아낼 수가 없는데…….”
이 비서는 착잡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 탓에 더욱 초조해진 건 세라였다.
세라는 마른침까지 삼키며 이 비서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정준혁 대표님의 선전포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비서의 보고를 남김없이 듣고서야 세라는 연정을 만난 게 제 실수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가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 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세라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 위로 떠오른 이름은 그간 세라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 숙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