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4)화 (34/80)

34. 청천벽력 같은 소식

혼자 남은 연정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세라를 통해 들은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빼곡히 들어차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연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 딸 연희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돈을 받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했단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그런 일을 제게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저질렀다는 게, 연정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내가, 내가 도대체…….”

엄마가 도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연희야.

연정의 눈망울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차마 흐느끼는 소리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연정은 이불을 꽉 움켜쥔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연희가 아닌 삼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은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조금 전까지 병실에 함께 있던 여자는, 소름 끼치도록 연희와 닮아있었다.

얼굴이 너무 똑 닮아서 하기 싫은 결혼식에 대신 세웠다는 여자의 말을, 도무지 어불성설이라고만 치부할 수가 없었다.

분위기부터가 부티가 가득 흐르는 여자였다. 말마따나 여자가 정말 대기업 집안의 딸이라도 된다면 연희에게 대신 결혼하는 걸 대가로 충분히 돈을 줄 법했다.

그리고 연희는…….

제 딸 연희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충분히 그 돈을 선택할 수 있는, 미련할 정도로 착한 딸이었다.

연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던 퍼즐이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느닷없이 VIP 병실로 옮겨진 것도, 너무 비싸 엄두도 내지 못했던 항암치료는 물론 갖가지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네 인생이랑 엄마 목숨을 맞바꿨구나…….”

슬픔으로 가득한 연정의 목소리가 큰 폭으로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있는 힘껏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이 경련하듯 떨리기 시작했다.

연정은 크게 어깨를 들썩거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설움이 토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쯤엔 흐느낌조차도 잦아들었다. 그런데 일순 잦아든 감정 사이로 불길한 신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호흡까지 거칠어졌다.

연정은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이불을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무섭게 밀려오는 수마 앞에서 연정은 어쩌지 못하고 무릎 꿇고 말았다.

연정의 몸이 순식간에 힘없이 늘어졌다.

동시에 연정의 주변으로 늘어진 기계에서 소름 끼치도록 단조로운 기계음이 빠른 박자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

“아, 아저씨. 한국대학병원이요. 빨리요! 제발, 제발 빨리 좀 가주세요!”

연희는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로 택시 기사를 향해 애원하듯 말했다.

그녀의 모습에 택시 기사가 당황한 듯했지만, 곧 분위기를 파악한 건지 서둘러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빠른 속도로 차가 출발했지만, 연희는 잠깐도 손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

초조해서 미칠 것 같았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연희야, 혹시 말이다…….

‘네, 말씀하세요.’

-내가 오해한 거라면 정말 미안한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이야.

‘네, 아주머니.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미영은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별안간 밀려오기 시작한 이 불안은 그저 기분 탓일 거라고.

연희는 그렇게 넘기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깨진 유리 파편들로 시선이 갔다.

-……혹시 너 지금 어디니?

이어진 미영의 질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별거 아닌 말이었다.

그 탓에 온몸에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까지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희는 뒤늦게 웃음을 되찾곤 가볍게 말했다.

‘어디긴요. 집이죠. 별거 아닌 질문인데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놀랐잖…….’

-하, 역시 네가 아니지? 그치? 그럼 그 여잔 도대체 누구란 말이야? 아니, 그건 둘째치고 너랑 어쩜 그렇게 똑같이 생길 수가 있니? 응?

하지만 곧장 들려온 미영의 목소리에 연희의 몸이 다시금 경직되기 시작했다.

연희는 꽤 오랫동안 멍한 얼굴로 한 곳만 응시해야 했다. 미영의 말이 빠르게 이해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미영의 목소리를 서너 번쯤 되뇌자 단숨에 윤세라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고 나선 무슨 정신으로 미영과 통화를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저 무섭게 밀려오는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 미영을 연신 채근했던 기억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아, 아줌마. 빨리요. 빨리 병실로 가셔야 돼요, 얼른요!’

-그렇지 않아도 내가 영 찝찝해서 병원 로비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어. 지금 병실로 가는 중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연희야. 자리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설마 그사이에 별일이라도 있……! 에구머니나! 연정 씨! 연정 씨!! 연정 씨 정신 좀 차려봐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경악에 찬 미영의 목소리만이 귓속을 뎅뎅 울렸다.

그 길로 연희는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차창 너머로 주변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갔지만, 이보다 더 빠르게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연희는 야속하기만 했다.

왜 오늘은 연정에게 가 볼 생각을 못 한 걸까.

연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신이란 게 존재한다면 꼭 한 번은 패악질을 부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마음은 씻은 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연희는 신께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연정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해 달라고. 제발 이 택시에서 내리고 나면 연정과 무사히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혹 거기까지도 제게 허락되지 않는 거라면. 그럼 마지막 인사할 시간만이라도 달라고.

연희는 빌고 또 빌며 어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길 바랐다.

멀리서 병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잠잠하던 연희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준혁은 정신없이 병원 로비를 가로질렀다.

주차할 정신도 없어 병원 입구에 차를 세워둔 채 그대로 달려오는 길이었다.

-준혁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흐윽.

사람을 보내겠다는 걸 극구 만류하던 연희가 다친 데 없이 깨진 유리를 잘 치웠는지.

준혁은 단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게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을 뿐인데, 신호음이 멈추기 무섭게 서럽게 우는 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아, 엄마가, 흐윽……. 엄마가 쓰러지신 거 같아. 어떡하지? 나, 어떡해야 되지. 정말, 정말, 혹시라도 엄마가, 정말 혹시라도, 흐윽…….

준혁은 지금껏 그렇게까지 서럽게 우는 연희의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우는 모습이야 최근 들어 자주 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전화로 들은 연희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그것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올 이유가, 준혁에겐 넘치도록 충분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곧장 병원으로 오긴 왔는데, 막상 같은 건물 안에 연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이나 마음이 급해졌다.

1분 1초라도 빨리 연희에게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준혁은 최대한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저라도 그래야 했다. 지금쯤 연희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닐 테니.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준혁은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연희가 말한 대로 오긴 했는데, 연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준혁은 선 자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연희의 털끝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때, 낯설지만은 않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고민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준혁은 서둘러 소리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연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조금만 더 걸어가면 연희에게 닿을 지점이었다. 그런데 준혁은 선뜻 연희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준혁은 본능이나 다름없이 오른쪽으로 트인 복도에 몸을 감추었다.

“연희야, 일단 진정 좀 해봐, 응? 엄마 괜찮으실 거야. 그러니까 그만 좀 울어. 이러다 너까지 쓰러지겠다.”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간병인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연희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연희의 울음소리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연희에게 달려가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아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준혁은 여전히 연희의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연희가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숨이 넘어가도록 울고 있는데, 아직은 연희에게 가선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이곳에 숨어 연희를 위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몇 번을 생각해도 지금 중요한 건 연희를 안아주는 일인 것 같은데. 그런데.

“아휴,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야. 아무리 똑같이 생겼기로서니 너를 못 알아보고 자리를 비워선…….”

그 이상한 직감의 근거가 되어줄 이야기가 미영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가 미안해, 연희야. 나는 정말 너인 줄 알고…….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는데, 너랑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타나서 대뜸 나갔다가 오라고 눈치를 주니 나가지 않을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 하, 아무리 그래도 그 자리에서 바로 너한테 전화 한 통은 해봐야 했던 건데. 내가 정말 미안하다, 연희야. 내가 정말 미안해.”

준혁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쉬었다.

연희와 똑같이 생긴 여자.

그 말이 의미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윤세라.

그 여자가 기어이 사달을 낸 것이다.

준혁은 맞물린 이 사이로 한가득 힘을 주었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신연희는 어떤 식으로든 울리지 않기 위해 저조차도 늘 안달복달하는 여자였다.

가능하다면 웃기만 했으면 싶어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뭐든 다 해주고 싶은 여자였다.

그런데.

“윤세라, 네가 기어이 일을 치는구나.”

준혁은 이를 사리 문 채 우뚝 멈추었던 걸음을 억지로 떼어냈다.

발끝이 향한 방향은 연희가 울고 있는 자리와 정반대로 향하는 길이었다.

준혁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비상구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일말의 지체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은 길게 지나가지 않았다.

준혁은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용건을 꺼내었다.

“김 비서, 납니다. 급하게 처리해줄 일이 생겼습니다.”

-네, 대표님.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확보한 RM푸드 관련 비리 자료들.”

오로지 연희의 결정에 맡길 생각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순간, 연희에게 맡길 문제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건 저쪽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뿐이었다.

“보네르 문제랑 같이 터트리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방법으로 응징하는 것.

준혁은 그 응징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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