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3)화 (33/80)

33. 불길한 기분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뭐예요.”

연정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세라의 미소가 비웃음이란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별 타격은 없었다.

고작 그 정도에 타격을 받아 감정적으로 굴기엔 그간 살아온 그녀의 인생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다.

더욱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죽음까지 마주한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 정도쯤은 아주 담담히 인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에이, 반응 되게 시시하네. 나보면 되게 놀랄 줄 알았는데.”

세라가 투정 부리듯 말을 뱉으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제법 약이 오를 만도 한 태도인데, 연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왜긴요. 잘 봐요. 나, 신연희 씨랑 진짜 똑같이 생겼는데 안 놀라워요? 난 처음에 신연희 씨 보고 되게 놀랐거든요. 세상에 이렇게까지 나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지, 하고요.”

세라는 아이처럼 해맑기까지 한 얼굴로 연희를 처음 봤던 순간에 느낀 감상을 조잘거렸다.

이번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연정의 태도에 되레 약이 오른 건 세라였다.

세라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휘감겼다. 같은 핏줄도 아닌데 신연희와 신연정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게 세라의 마음을 더욱 독해지게 만들었다.

“신연희 씨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세라는 비뚜름하게 휘어 올린 입매를 그대로 유지한 채 용건을 꺼내었다.

일순 연정의 얼굴로 긴장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제야 세라의 마음속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즐겁게 이야기할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뻗어 나갔다.

연희는 놀란 얼굴로 제 아래 흩어진 유리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별일이었다. 그저 목을 축이고 싶어서 물을 따랐을 뿐인데. 손이 미끄러질 일도 아니었는데, 유리컵을 잡기 무섭게 놓치고 말았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 넋을 놓을 만큼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연희는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욱이 괜스레 불길한 기분까지 들었다.

왜 유리컵을 놓쳐선…….

연희는 조심하지 못한 스스로를 타박하며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깨어진 파편 중 우선 커다란 것만 집어 한 곳으로 모아두는데,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손끝에 스며들었다.

“아……!”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때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여보세요? 연희야. 무슨 일 있어? 어?

걱정으로 가득한 준혁의 목소리에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고개를 저어봤자 그가 볼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인지하곤 입술을 떼었다.

“아니야. 물 마시려다가 유리컵을 깼어. 좀 놀라서 그래. 신경 쓰지 마.”

-안 다쳤어? 집으로 사람 보낼 테니까 건들지 말고 그냥 둬.

“됐어. 뭘 이런 일로 집에 사람을 보내. 내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괜찮아.”

-고집부리지 말고 말 들어.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연희는 준혁의 과보호에 피가 배어 나오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로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지금이 이렇게 속 편하게 웃을 때가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웃음이 잦아들진 않았다.

얼마 만에 웃어보는 일인지 모르겠다. 연이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일만 맞닥트린 탓에 줄곧 눈물 바람이었다.

평생 쏟을 눈물을 최근 며칠간 다 쏟아낸 것 같았다.

지금이라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연희는 잠깐이나마 그 기분을 만끽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순간이 지나면 언제 또 이렇게 웃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집으로 사람을 보낸다는 준혁을 말리는 게 우선인 것 같고.

“진짜 괜찮아. 나 안 다쳤어. 집으로 사람이 오는 게 더 불편하니까 내 걱정 때문에 그런 거면…….”

그럴 거 없어.

그렇게 말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을 맺기도 전에 귓가로 낯선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연희는 핸드폰을 떼어 액정을 살폈다. 연정을 간병해주는 아주머니로부터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연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던 말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다른 용건을 전했다.

“준혁아, 내가 다시 전화할게. 간병인 아주머니 전화 들어온다.”

-알겠어.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는 거 잊지 말고.

“알겠어. 끊을게.”

연희는 준혁과의 전화를 갈무리하곤 액정을 몇 번 터치했다.

“여보세요? 아주머니. 무슨 일이세요?”

그러곤 반갑게 미영의 전화를 받았다.

***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우리 연희는, 우리 연희는……!”

연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고,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낯빛이 더욱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세라는 그 모습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충분히 예상한 모습이라 그저 시시하기만 했다.

지루함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폭 내쉰 세라가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한 말 중 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건지 잘 모르겠네요. 신연정 씨 눈엔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하자고 여기까지 올 만큼?”

독기라곤 하나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해맑기만 한 목소리로 내뱉은 모든 말들이 연정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었다.

세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이 연정에게 치명적인 상처가 될 거란 사실을.

더불어 그 말을 하겠다고 굳이 의미심장한 목소리까지 내며 겁을 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까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가볍게 이야기해도 그녀에겐 충분히 충격적일 만한 일이었다.

신연정에게 신연희는 친자식은 아니어도 평생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키워온 딸이었다.

그 딸이 엄마 목숨 구하겠다고 돈 몇 푼에 인생을 팔았다는데, 그 말이 충격적이지 않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마침 연정의 표정도 그랬다.

갑자기 들이닥친 충격을 도통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이 이상 힘 빼지 않아도 되겠단 확신이 들었다.

세라는 도도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곤 다시금 연정과 시선을 맞추었다.

“나도 내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라고 이런 말 하는 게 좋겠어요? 아픈 사람한테 할 소리가 아니란 것쯤은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고요.”

뒤늦게 동정심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연정에겐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신연희 씨가 주제도 모르고 내 자리를 뺏겠다고 날뛰고 있는데, 유치한 방법인 줄은 알지만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되면 그 여자 엄마라도 찾아야지. 엄마 된 입장에서 설마 이 상황을 가만히 보고 계실 건 아니죠?”

“…….”

“신연정 씨가 신연희 씨 따끔하게 혼 좀 내주세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는 게 아니라잖아요. 근데 이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수준도 아니고 기어이 올라와 차지를 하겠다는 뜻인데.”

딱하단 눈으로 연정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세라의 눈동자가 일순 냉랭해졌다.

연희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렇잖아요. 아무리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고 해도, 어떻게 그 여자가 내가 될 수 있어요? 가당치도 않지. 안 그래요?”

말을 하면서도 고작 별거 아닌 여자 때문에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준혁과의 신혼집에서 제 자존심이 있는 대로 뭉개졌던 걸 생각하면 없던 화도 생겨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게 연정의 잘못은 아니었다.

연정에게 굳이 잘못이 있다면.

“가정 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닌데.”

“…….”

“조금만 더 신경 써서 키우시지 그랬어요. 인성 교육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신연희의 인성 교육을 똑바로 하지 못한 죄, 그것뿐이었다.

“어쨌든 난 신연정 씨가 충분히 알아듣도록 얘기한 거 같고, 나머지는 신연정 씨한테 맡기면 될 거 같은데.”

세라는 넋을 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연정을 향해 다시 한번 딱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눈길을 받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게 썩 안쓰럽긴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도 신연희가 제 말은 듣지 않을 것 같으니 이런 방법이라도 쓰는 수밖에.

가방을 챙긴 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시간을 살피니 간병인과 이야기했던 한 시간까지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을 꽉 채울 생각은 없었다.

연정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은 이만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리라.

그녀에게도 생각할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

“아마 내 선에서 이 일을 해결하는 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일 거예요. 신연희 씨가 이 이상으로 고집 피우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지 나도 장담 못 해요. 그러니까 신연정 씨가 신연희 씨 좀 잘 설득해주세요.”

그다음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만큼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연정을 통해서도 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정말 숙희에게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숙희는 제게 한없이 인자한 할머니이긴 했지만, 인자함 그 이면엔 저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무자비한 성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역시 웬만하면 숙희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세라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니 그다음 일까진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신연희에게는 신연정이 꽤나 소중한 사람인 듯했다. 그러니 연정이 설득한다면 신연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세라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곤 병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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