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명백한 비웃음
연희는 감았던 눈을 뜨곤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진중한 눈길로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이제 이 자료의 용도는 네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어.”
준혁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떨리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이 순간 연희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질 온기가 양손 가득 퍼졌다. 신기하게도 손의 잔떨림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벌써부터 가슴이 아릿해지는 기분이었다.
“RM푸드를 무너트릴 엄청난 자료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자료가 될 수도 있겠지.”
“…….”
“확실한 건 식품 성분으로 장난질 친 거랑 보네르 문제까지 엮어서 터트리면 아무리 최숙희 회장님이 뒷배로 있다고 해도 RM푸드, 쉽게 재기할 수 없을 거야.”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딱 그만큼 연희는 숨이 막혔다.
더 듣지 않아도 그가 제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떤 대답도 쉬이 할 수가 없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당장 결정 못 내리겠다면 천천히 생각해도 상관없어. 나는 너랑은 상관없이 이번 문제를 계속 알아볼 생각이야. 어쨌든 보네르와의 관계는 정리해야 하는 부분이니까.”
연희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준혁의 말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는 벌써 마음의 준비까지 다 마친 모양이었다. 제 손에 이 자료를 쥐여주면 그 역시 타격받게 될 거란 것까지 다 알면서도, 제게 선택지를 준 것이다.
“내가, 이 자료를 터트리면, 그럼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연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해올 대답이란 게 무엇일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의 안위에 대해 물어본 건, 알량하게나마 죄책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것까지도 너무나 염치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준혁에게 너무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에게 상처 주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번번이 그에게 상처를 줘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야속했다.
그 현실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수긍하는 자신은 더욱이나 진저리가 났다.
신연희는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배려하는 정준혁 앞에서 이기적이기만 한 여자였다.
그리고 이번 역시 예외란 없었다.
예외가 없긴 정준혁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이 없을 거라고는 못 하겠지. 참고인으로 검찰 수사를 받아야 할 수도 있고. 그렇다고 해도 내가 떠안아야 할 문제는 아니야. 자금 횡령을 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 그 문제는 그 사람이 안고 가면 되는 거고, 나는…….”
“…….”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일하면 돼.”
그는 늘 그랬듯 이번에도 신연희를 위한 희생을 자처했다.
처음 그를 떠났을 땐 그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남자란 걸 알지 못했다.
그를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결코 쉽게 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그가 그런 남자라는 걸 몰랐던 딱 그만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연희는 준혁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 남자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연희야, 내 입장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 나한테 필요한 건 너고, 너만 내 옆에 있으면 그거로 충분해.”
그렇다면 이번만큼은 그에게 상처가 될 선택은 해선 안 되는 건데…….
“……미안해, 준혁아.”
그러나 연희는 이번에도 결국 준혁의 뒤에 숨어 그를 이용해 복수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연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눈매를 타고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차마 준혁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죄스러워서.
그가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선택밖에 하지 못하는 제 이기심이 증오스러웠다.
그런데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그 어떤 것보다도 최숙희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정준혁을 이용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복수심을 삭일 자신이 없었다.
최숙희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너 하나 가졌단 이유로 내가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면 기꺼이 감내할 거야. 그게 뭐든 이겨낼 자신도 있고. 그러니까…….”
“…….”
“그러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마, 연희야.”
준혁이 나직한 미소를 감아올리며 속삭여왔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마음이 더욱이나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연희는 참지 못하고 설움을 토해냈다.
그러면서도 제 손을 꽉 부여잡은 준혁의 손을 내치지 못했다.
그거로 확실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최숙희를 향한 복수를 위해 필요하다면 준혁도 이용하겠다는 다짐이.
연희는 끝끝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
“지금 들어가면 된다는 거죠?”
세라는 병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앉아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네, 아가씨. 저희 측에서 매수한 직원이 2시부터 교대로 근무를 선다고 방금 연락받았습니다. 그때쯤 아가씨가 도착할 거라고 귀띔해뒀으니, 적당히 신호보내시면 눈치껏 할 겁니다.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세라는 간단하게 대답하곤 그대로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막 들어선 로비는 내원한 환자들로 시끄러웠다.
대학 병원이니 환자나 보호자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 정도는 이해하지만,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세라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로비에서 벗어나자 산만했던 정신이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는 기분이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세라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 비서에게 전달받은 호수의 병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독 한 병실에만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누가 봐도 그곳이 신연정이 입원해 있는 병실이었다.
세라는 적당히 거리를 좁힌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섰다.
복도를 울리던 구두 굽 소리가 일순 멈추니 이상함을 감지하기라도 한 건지 병실 앞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세라는 남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이 비서를 통해 매수한 사람이 제법 눈치는 빠른 모양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두 번 까닥이곤 걸음을 떼더니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세라의 옆을 지나쳐 갔다.
세라는 입꼬리를 한껏 휘어 올렸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시작부터 순조로운 것이 벌써부터 오늘 일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얻은 기분이었다.
“좋아. 그럼 시작해 볼까?”
세라는 퍽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남기곤 다시금 다리를 움직였다.
복도 가득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울렸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벨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세라는 걸음에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내 구두 굽 소리가 멈춘 건 병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대신 울리고 난 후였다.
***
“어머, 연희 아니야?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세라가 병실에 들어서자 연정의 곁에 앉아있던 미영이 반가운 얼굴로 말을 건네왔다.
세라는 자신을 보며 연희라고 하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지만, 입가에 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근처 지나다가 들렀어요. 별일 없죠?”
“아이, 그럼. 별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있었으면 내가 진작에 연희 너한테 연락을 했겠지.”
미영은 마주 보고 있는 사람이 연희일 거란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연정은 반가운 표정은커녕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라는 연정이 무언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모르는 척 미영의 앞으로 다가갔다.
“고생이 많으세요. 오늘따라 날씨도 참 좋더라고요.”
“그렇지? 안 그래도 햇살이 좋아서 오늘은 날이 좀 따뜻한 모양이라고, 엄마랑 그 얘기 하고 있었어.”
“이런 날에는 산책이 딱이죠.”
“그래? 그럼 엄마 모시고 이 앞에 산책이라도 나갈까?”
세라의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미영이 덥석 미끼를 잡아 물었다.
세라로서는 미영의 반응이 기껍기 그지없었다.
입가에 활짝 핀 미소가 그 마음에 대한 증거나 다름없었다.
세라는 미영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을 하면서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엄마가 나가시기엔 아직은 좀 쌀쌀한 건 같아서 좀 그렇고, 아주머니가 산책하시기에는 좋을 거 같은데. 산책 좀 다녀오세요. 이렇게라도 바깥바람도 좀 쐬셔야죠. 병실엔 제가 남을게요.”
웃으며 말했지만, 어투에 실린 묘한 뉘앙스가 미영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뒤늦게 무언가 감지한 미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겉옷을 챙겼다.
“그렇지 않아도 은행에 볼일이 좀 있었는데, 잘됐네. 그럼 나는 잠시 나갔다 올게. 한 시간 정도 걸릴 거 같은데, 괜찮지?”
“그럼요, 당연하죠. 조심히 다녀오세요.”
세라는 눈매까지 곡선으로 휘어 접으며 미영의 외출을 환영했다.
곧 연정에게 눈인사를 건넨 미영이 병실 문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미영의 걸음마다 세라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세라는 연정에게 등을 보인 채 미영이 나가는 마지막 모습까지 두 눈에 꼭꼭 담으며 확인했다.
병실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을 먼저 깬 건 연정이었다.
“아가씨는 누구예요? 우리 연희는 아닌 거 같은데…….”
내도록 말이 없던 연정이 세라의 정체를 대번에 의심했다.
그게 퍽 신기하기도 하고, 제겐 같잖기만 한 신연희의 이름을 애정 어리게 부르는 목소리가 가소롭기도 했다.
세라는 그 마음을 숨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어도 자식은 자식이란 건가?”
“…….”
“꽤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빙그르르 몸을 돌려 연정을 바라본 세라의 입가에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미소가 걸려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