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31)화 (31/80)
  • 31. 이기적인 선택

    “RM그룹이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그 밑바탕이 된 게 국밥집이었어. 지금은 돌아가신 이 전 회장님과 최숙희 명예회장님께서 같이 운영했던 식당이었더라고. 그게 입소문이 타면서 요즘 말로 소위 대박이 났고, 할머니 국밥이란 이름으로 시중에 유통까지 됐어.”

    “…….”

    “국밥집 명성을 이어 출시한 제품까지 연이어 완판 행진이었고, 그 이후에 출시한 아이템들도 줄줄이 성공했어. 최숙희 회장님이 확실히 사업수완이 있으셨던 거지.”

    연희는 전에 없이 빛나는 눈동자로 준혁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 관심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최숙희 이름 세글자에 관심은 물론 준혁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박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RM푸드야. RM푸드는 지금의 RM그룹의 기반이 되어준 사업이고. 그래서 그런지 최숙희 회장님이 가장 애착 갖는 계열사가 RM푸드라고 하더라.”

    준혁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연희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최숙희와 RM푸드.

    그 두 가지의 상관관계가 머릿속에 빠르게 정립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애착 갖고 계신 계열사인 것치곤 운영 상태가 엉망이야. 가장 큰 매출을 내고 있는 ‘보네르’는 물론이고 시중에 유통된 제품들도 식품 성분으로 장난질을 치고 있는 거 같아.”

    연희가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식품 성분으로 장난질을 치다니.

    RM푸드가 아무리 경쟁력을 잃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RM푸드에서 출시한 브랜드를 찾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몇몇 냉동 제품 관련하여서는 RM푸드의 브랜드 제품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까지 했으니, 과거의 명성이 완벽하게 빛바랜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나마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제품의 식품 성분마저 거짓말로 점철된 채 유통하고 있다니,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살짝 알아본 것만으로 이 정도까지 나왔는데, 아마 시간만 더 투자하면 더한 것들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뭐, 지금 이 자료만으로도 RM푸드 휘청이게 만들기는 충분할 것 같지만.”

    연희는 말없이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비난받아 마땅했지만, 이건 다른 것도 아닌 먹는 거로 장난질을 친 거였다.

    어떠한 종류의 부정보다도 맹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지금 이 자료들이 식품 성분을 속였다는 내용이라는 거지?”

    “응.”

    연희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처음 준혁에게 ‘비리’와 관련한 문건이란 말을 들었을 때도 가슴이 쿵쿵 뛰었는데, 자료가 담고 있는 내용까지 파악하고 나니 손이 벌벌 떨릴 것만 같았다.

    준혁의 말마따나 대기업을 휘청이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파급력을 가진 문서인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무기가 제 손에 쥐어진 거였다.

    마음 같아선 앞뒤 잴 것 없이 당장이라도 폭로하고 싶었다.

    최숙희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RM푸드가 사람들의 시선에 발가벗겨진 채 맹렬한 비난을 받길 바랐다.

    그거로 최숙희에게 타격을 줄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선뜻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RM푸드의 보네르와 HN백화점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어제 나한테 보여준 건? 그것도 RM그룹 내의 비리랑 관련한 거라고 했잖아.”

    연희는 괜스레 말을 덧붙였다. 오늘 건네받은 자료에 대해선 충분히 파악이 되었지만, 어제 받은 자료에 대한 이해도는 없었다.

    우선은 그것까지도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혹여나 그 자료가 보네르와 HN백화점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백화점 푸드코트에도 보네르가 입점되어 있어. 내가 백화점에 취임하기 전에 대표로 권리 행사하던 박 대표가 적극적으로 추진한 일이었지.”

    “…….”

    “꽤 능력 있는 사람이었는데, 좋은 머리를 좋은 데다 쓰기보다는 자기 잇속 챙기는 데 쓰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잘렸고.”

    역시나 준혁의 잇새로 백화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벌써부터 가슴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연희는 조용히 준혁의 말에 집중했다.

    “저질러놓은 부정이 얼마나 많던지, 급하게 대표 취임하게 되고 한동안 정말 많이 바빴어. 그 일들 다 해결하느라. 그러다 알게 됐어.”

    “…….”

    “보네르랑 HN백화점이 검은돈으로 엮여있다는 걸.”

    연희의 손끝이 잘게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예상은 했지만, 검은돈이란 직접적인 표현까지 듣고 나니 손에 쥐어진 자료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사이 준혁은 더욱 담담해진 얼굴로 재차 설명을 이어붙였다.

    “너도 알겠지만, 백화점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은 전체 고객의 1%도 안 될 VIP 고객들이야. 그 VIP 고객들을 타 백화점에 뺏기지 않으려고 머리 쓰는 게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

    “회사 법인 카드로 매달 여러 차례에 걸쳐 보네르에서 적지 않은 금액의 돈이 결제됐어. 명목은 흔히들 말하는 사업상 접대였고.”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서론인지 시작부터 의미심장하기만 했다.

    연희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냈다.

    자신이 물어 시작된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과부하가 올 지경이었지만, 끝까지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사업에 있어 접대는 필수 불가결한 문제고, 그 명목으로 법인 카드를 사용한 거니 겉으로 보기엔 문제 될 게 없지. 그런 식으로 매달 보네르에 들어간 총금액이 억 단위의 금액만 아니었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았을 거야.”

    “……억, 이라고?”

    “보네르에 결제된 금액이 크면 클수록 그달의 HN백화점 실적 역시 이전이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았어. VIP들이 대거로 쇼핑을 했다는 의미지.”

    기어이 참지 못한 한숨이 연희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녀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알아보니까 RM푸드 대표의 아내 되시는 분이 그 VIP 고객 명단 안에 포함되어 있더라. 물론 그달에 결제한 금액 역시 VIP 고객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컸어.”

    “하, 도대체 그게 무슨…….”

    연희는 혼란한 눈으로 준혁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는 듯 입매를 가로로 늘였다.

    “결국 박 대표는 HN백화점 대표 자리를 놓치기 싫었던 거야. 그러기 위해선 능력을 증명할 만한 실적은 필수 조건이었고, 그걸 위해서 자금 횡령을 택한 거지. RM푸드 입장에서도 한 번 하던 쇼핑을 두 번 하면 억 단위의 매출이 발생하니 손해 볼 거 없는 장사였을 거고.”

    “…….”

    “이건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RM푸드 대표 와이프가 사교계 모임에서 힘 좀 쓰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 그렇지 않고서야 실적이 그렇게까지 좋을 수가 없거든. 한 사람 때문에 늘어난 매출이라고 보기에도 어렵고.”

    연희는 밀려오는 두통을 참지 못하고 관자놀이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과부하가 오다 못해 방전이 될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HN백화점에서 보네르로 검은돈이 흘러 들어갔고, 그 대가로 보네르에서는 VIP들이 큰돈을 소비할 수 있도록 입김을 가했다는 거였다.

    “하.”

    연희는 저도 모르게 헛숨을 내뱉었다.

    백화점에서 직원으로 일을 하며 비싼 명품을 척척 사는 사람들을 종종 보곤 했다. 그들은 제 연봉 값을 하는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아무렇지 않게 사며 백화점 명품관을 누비고 다녔었다.

    그들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부러웠다. 그들처럼 사치스레 살고 싶은 것까진 아니더라도, 저 역시 돈 걱정 없이 살아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보았던 그 사람들이 그저 사치나 위안을 하기 위해 돈을 쓴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어떻게 해야 하지.

    자꾸만 복잡해지는 생각들에 평정을 유지하는 일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확실한 건, 이 자료를 언론을 통해 터트리면 최숙희를 비롯한 RM푸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준혁이 대표로 취임한 HN백화점에도 타격이 갈 거란 사실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이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복수하고 싶었다.

    최숙희에게 보란 듯이, 당신이 버린 내가 이렇게나 잘살고 있고, 당신이 하찮게 생각한 내가 당신을 이렇게도 끌어내릴 수 있다고.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거면 충분히, 그 사람을 밑바닥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선 끌어내릴 수 있을 텐데.

    연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아프다 못해 어지럼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연희야.”

    그때 별안간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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