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복수의 서막(2)
세라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순식간에 두려움에 휩싸인 것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연희는 웃음이 다 날 것 같았다.
고작 말 몇 마디에 이렇게나 두려워할 거면서 감당도 하지 못할 말을 내뱉은 세라가 우스웠다. 그 생각은 곧 연희의 마음은 더 큰불을 지폈다.
“윤세라 씨 말처럼 없이 살아서 5억 준다는 말에도 손이 벌벌 떨렸는데, 윤세라 씨 대신해서 정준혁 씨 와이프로 살아보니까 그사이에 통이 커져서 5억 받고는 사라져주기 싫어졌어요.”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단조로운 투였다. 그래서 더 진심처럼 들렸다.
세라는 꽉 쥔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곤 악에 받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나랑! 돈이 더 필요해? 그럼 얼마가 필요한지 말을 해. 얼마든 더 줄 테니까!!”
세라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상황 전개에 당혹함을 넘어 패닉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준혁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도 겁이 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돈만 주면 신연희가 제 자리를 돌려줄 거라고 생각했으니, 한편으론 준혁의 말을 어깃장 정도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큰일이었다.
당장 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신연희가 이렇듯 자리를 돌려주지 않겠다고 하니,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마주하고 있는 신연희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듯했지만, 저로선 알 수 없는 독한 감정이 깃들어있는 게 분명했다.
“미안하지만 윤세라 씨가 주는 돈 필요 없어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이 순간 세라가 가장 두려워할 말이 연희의 입을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마침 정준혁 씨가 내가 윤세라가 아닌 걸 알고도 상관없다고 하니 더더욱 이 자리를 돌려줄 이유가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이 자리 가져보려고요.”
“…….”
“어차피 양쪽 집안 어른들도 내가 윤세라가 아닐 거라곤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시고. 내가 당신인 척 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뺏을 수 있겠던데요.”
세라의 눈매를 타고 기어이 눈물이 떨어졌다. 연희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못내 자존심이 상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연희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래요, 그럼.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말인 거 같은데 열심히 해봐요. 나도 궁금하네. 신연희 씨가 진짜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을지.”
세라는 볼 위를 적신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표독스럽게 말했다.
악착같이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자존심이 완벽하게 뭉개지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먼저 일어서는 것이 못내 기분이 더러웠지만, 더 자리를 지키고 있는다고 해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계산이 섰다.
뻔히 보이는 미래가 제게 득 될 게 없다는 걸 알고도 부득불 고집을 부릴 만큼 등신은 아니었다.
오늘 뭉개진 자존심에 대한 복수는 훗날을 도모하면 될 일일 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세라는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몇 발짝 채 떼지 않은 자리에 잠깐 멈추어 다시금 연희를 내려다보았다.
“달콤한 꿈이 길어지면 꿈에서 깨어난 후에 감당해야 할 괴로움은 훨씬 더 커질 텐데. 그거 감당할 준비는 됐나 봐요?”
고작 이까짓 말로 신연희의 자존심을 건들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었다.
그 말이 운이 좋아 신연희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라도 내면 땡큐인 일이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밑져야 본전인 일이었으니까.
그 길로 세라는 현관 쪽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신연희를 사들이지 않았다면 제집이었을지도 모를 집에서 쫓겨나듯 나가는 게 퍽 기분이 이상했지만, 곧 되찾게 될 것에 불과했다.
그 생각 하나로 버티며 세라는 건물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곧장 한 일은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는 일이었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세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예, 아가씨.
“이 비서, 나예요. 처리해줘야 할 일이 생겼어요.”
-말씀하십쇼.
깍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건방지다 못해 주제를 모르던 신연희의 말대꾸를 듣다 충성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뭉개졌던 자존심이 조금은 회복되는 것도 같았다.
세라는 그 기세를 몰아 머릿속에 정리되는 이야기들을 서둘러 전달했다.
“지난번에 이 비서가 보고한 내용대로라면 신연정 씨 병실 앞을 정준혁 씨가 고용한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맞아요?”
-예, 아가씨. 맞습니다.
“그중에 한 명만 매수해요.”
세라는 쭉쭉 뻗던 다리를 멈추곤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러곤 고개를 꺾어 조금 전 자신이 앉아있었던 집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신연희, 네가 날 너무 쉽게 봤어. 고작 너 따위한테 쉽게 질 내가 아닌데. 계속 정준혁 믿고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굴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어떤 건지, 내가 똑똑히 알게 해줄 테니까.
“원하는 금액 물어보고 그거의 두 배로 준다고 해요. 대가로 해야 할 일은, 한 시간 정도만 자리 비우면 된다고.”
세라는 연희를 향해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은 말을 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빠르게 일 처리 부탁할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안간 전해진 지시사항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김 비서가 되물어왔다.
세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입에 담기도 불쾌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정신 나간 미친년한테 보란 듯이 코 꿰인 거 같아요.”
그래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크게 생각할 일까지는 아니니까 이 비서는 내가 지시한 것만 빠르게 처리 부탁할게요.”
천하의 윤세라가 고작 신연희 따위에게 질 리가 없었다.
세라는 미련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곤 주차해둔 차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확인해봐.”
준혁은 퇴근하기 무섭게 옷만 갈아입은 채 연희의 앞에 앉았다. 그러곤 두툼한 종이 뭉치를 연희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연희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준혁이 건네는 건 그게 뭐든 두렵기부터 했다.
이번엔 얼마나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담긴 서류일까, 그 생각부터 들었다.
“어제 말했던 RM그룹 비리 관련한 내용이야. 그게 전부는 아니고 계속 알아보는 중인데, 오늘 새롭게 알게 된 내용만 해도 꽤 많더라고. 한꺼번에 보는 것보단 너도 차근차근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어진 준혁의 말에 연희는 미간을 좁혔다.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서류를 손에 쥐곤 빼곡하게 들어찬 글자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쉽게 이해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사회생활이야 고작해야 매장을 관리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 이런 사업 용어들이 익숙할 리 없었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준혁을 보았다. 그러자 준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붙였다.
“HN그룹 푸드코트에 입점된 브랜드 중에 ‘보네르’라고 있어. RM푸드에서 관리하는 프리미엄 레스토랑이야.”
“……프리미엄 레스토랑?”
“일반 프렌차이즈랑은 개념이 조금 달라. 보네르가 입점된 건 HN백화점을 포함한 3개 그룹 백화점의 본점과 분점 몇 군데뿐이거든.”
연희는 눈썹을 사선으로 세웠다. 준혁의 설명에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건지 준혁이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백화점 VIP 손님을 위한 레스토랑이란 말이야. 돈 있는 사람들만 상대하겠다는 취지의 비싼 레스토랑인 거지.”
“아…….”
“10년 전만 해도 업계 1위 자리를 지키던 RM푸드가 경쟁력을 잃고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는데, 그나마 명목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가 보네르 때문이더라고. 연간 보네르로 잡히는 매출이 상상 이상이야.”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설명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말을 차분히 듣고는 있었지만,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썩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곧바로 이어진 준혁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희는 이 상황이 지루하기만 했다.
“꼭 보네르가 아니더라도 RM푸드가 쉽게 망할 것 같진 않긴 하더라.”
“…….”
“RM그룹 최숙희 명예회장님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사업이, RM푸드야.”
연희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최숙희라는 이름만으로도 감정이 너울지기 시작했다.
“지금 네 손에 있는 그 자료가 RM푸드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리와 관련한 내용이야.”
종이 뭉치를 쥐고 있던 연희의 손에 불현듯 힘이 들어갔다.
연희는 다시금 제 손에 쥐어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