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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집착 (29)화 (29/80)
  • 29. 복수의 서막(1)

    세라는 스위트룸 통유리창 앞에 서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따금 한 번씩 반대쪽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바라보았지만, 며칠째 기다리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연락한다더니 진짜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신연희!”

    세라가 참지 못한 신경질을 쏟아내며 핸드폰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잇새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제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1분 1초가 초조함에 미칠 것 같았다.

    더욱이 주말 동안만 기다려달라던 여자가 연락도 없이 깜깜무소식이니 속이 터져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세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전히 목 끝까지 차오른 짜증은 해소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흥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뇌었다.

    가까스로 호흡이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까지도 감정은 널을 뛰었지만, 그렇다고 제 몸 하나 어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세라는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바닥에 나뒹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연락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계속 이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신연희가 연락을 해 올 것 같지 않았다.

    세라는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연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신호음은 빨리 끊겼다. 세라는 당장에 튀어나오려는 신경질을 꾹꾹 억눌렀다.

    -……여보세요.

    곧장 귓속으로 파고드는 상대의 목소리가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지 다 죽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며칠 내리 제 속을 뒤집어놓은 여자를 배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예요.”

    세라는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기 무섭게 핸드폰 너머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꼭 귀찮다는 뉘앙스로 느껴졌다. 속절없이 세라의 미간으로 주름이 팼다.

    -알아요, 얘기하세요.

    “허, 뭐라고요?”

    -하실 말씀 하시라고요.

    연이어 들려온 말은 더욱이나 기가 찼다. 안다니, 제 전화를 받고도 이렇게나 태연하다니.

    세라는 연희의 행태를 통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목소리가 다 죽어가는 이유가 몸이 많이 아파 그런 거라고 해도 화가 날 판이었다.

    그런데 아프긴커녕 연희의 태도는 배 째라는 수준이었다.

    “나랑 장난해요, 지금? 나한테 저번 주말 동안만 시간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연락 주겠다더니 연락은 고사하고 아직 그 집에서 나가지도 않은 모양이네요?”

    세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 가까스로 억누른 감정이 다시금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성격대로 패악을 부리고 싶은데, 제 자리를 되찾기 전이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치미는 성질을 또 한 번 억누를 자신은 더더욱이나 없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죠. 나한테 돈은 다 받아 처먹어 놓고. 돈은 돈대로 받고 막상 그 집에서 나가려니 내 남편이 탐이 나기라도 했나?”

    -네.

    “야, 신연희!!”

    꾹꾹 눌러 참았던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세라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뻔뻔해도 유분수지 이건 정도를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제게 이따위로 나올 수는 없는 거였다.

    세라는 이를 악물고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신연희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고민하는데, 느닷없이 연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로 이럴 게 아니라 얼굴 보고 얘기하죠.

    허, 하는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도대체 뭘 잘못 먹고 이렇게 배짱을 부리는 건지 세라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화로 실랑이를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세라로서도 더 좋은 방법이었다.

    제 앞에 앉혀두는 편이 입맛대로 상황을 끌어가기에도 편했고, 무엇보다 뭣하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신연희의 자존심을 뭉개놓을 생각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나 지금 호텔 룸이니까 한 시간 후에 여기서.”

    -아니요. 여기에서 봐요.

    그러나 오늘따라 무엇 하나도 쉽게 되는 것이 없었다.

    세라의 눈썹이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사선을 그리며 찌푸려졌다.

    “여기라니, 지금 어딜 얘기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 집이요. 정준혁 씨랑 윤세라 씨 신혼집.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그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

    세라는 처음 들어와 보는 제 신혼집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크기였지만, 그에 비해 채워진 가구들은 생각보다 소소했다.

    그렇다고 해도 신연희의 기준에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고급스러운 것들이었다.

    고작 이 정도에 제 자리가 탐이 나기라도 한 건가.

    세라는 연희를 따라 걸으면서도 가소로움에 비웃음이 다 날 것 같았다.

    나란히 내딛던 걸음을 멈춘 건 거실 소파 앞에서였다.

    내도록 등만 보이던 연희가 처음으로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앉으세요.”

    연희는 세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별 뜻 없는 말에도 세라가 표정을 구기는 게 보였다.

    원래라면 자잘한 표정 하나까지도 의식하며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앉지 말라고 해도 앉을 거예요. 신연희 씨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집은 신연희 씨 집이 아니라 내 집이에요. 나랑 정준혁이 같이 사는 신혼집이라고요.”

    언제나 그랬듯 세라가 한마디도 지지 않겠다는 듯 말을 되받아쳤다.

    이전이라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준혁을 운운한 말에 상처까지 받았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 세라의 말은 더 이상 상처도, 자극도 되지 않았다.

    “좋을 대로 생각해요. 윤세라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으니까.”

    연희는 소파 상석에 털썩 앉아 커피가 반쯤 채워진 잔을 들어 입가에 기울였다.

    목을 축이면서도 세라에게 음료를 대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윤세라는 손님으로 이 집에 온 것도 아니고, 더 이상 자신이 잘 보여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할 말 있으면 해요. 계속 그렇게 입술 물고 있지 말고. 피 나겠어요. 세게도 물고 있네.”

    연희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읊었다. 그러자 세라의 미간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미쳤어요?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면, 없이 살다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생활 좀 해보니까 진짜 신분 상승이라도 한 거 같아요? 눈이 회까닥 돌기라도 했어?”

    연희는 그저 눈을 깜빡이며 세라의 말을 듣기만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상처 주겠다고 작정하지 않은 말이 없었다.

    세라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그렇게 들리는 데에 크게 한몫하기도 했다.

    그걸 보고만 있자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아마 세라는 자신이 쌍둥이 동생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원망스러웠다. 제게 상처 주겠다고 작정한 얼굴로 모진 말만 내뱉는 세라가 미웠다.

    연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지만, 독하게 마음을 다졌다.

    제게 상처 주기로 작정한 언니라면, 아무리 제 언니라고 해도 가만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네. 그런 거 같아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하, 뭐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잖아요. 평생 정준혁 씨 와이프로 살면 윤세라 씨가 준 5억보다 더 큰 돈도 손에 쥘 수 있는데, 고작 5억 때문에 이 자리를 돌려준다는 게 맞는 일인가 싶더라고요.”

    연희는 단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이야기를 담담한 얼굴로 차분히 뱉어냈다.

    세라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는 게 보였다. 받은 만큼 돌려주겠단 다짐이 성공한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연희의 속은 시원하지 않았다. 되레 더욱 답답해져만 갔다.

    “진짜 단단히 미친 모양인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그 자리는 네가 나한테 돌려주네 마네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원래부터 내 거였고, 지금도 내 거란 사실은 변함없어. 알아?”

    세라가 분에 못 이긴 얼굴로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연희는 그런 세라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도대체 어쩌다 제 친언니일지도 모를 여자와 한 남자를 두고 이렇게 싸우게 되었을까.

    감정이 자꾸만 부글부글 끓어댔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벌써부터 주저앉고 싶을 만큼 지쳤다.

    “근데 왜 그렇게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 뭐?”

    준혁은 처음부터 자신의 남자였다. 더욱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남자였다.

    자신이 준혁의 곁에 남아선 안 되는 이유는 가진 게 없어서였다. 그런데 이젠 없이 자랐다는 타이틀조차 버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더욱이 준혁을 다른 여자에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게, 제 친언니라고 하더라도.

    “윤세라 씨 당신 말이야. 이 자리가 당신 자리라면서 초조해 죽겠다는 얼굴 하고 있잖아. 정말 나한테 뺏기기라도 할까 봐 겁먹은 것처럼.”

    연희는 전에 없이 독기 가득한 눈동자로 세라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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