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8)화 (28/80)
  • 28. 잔인하고도 강력한 무기

    무슨 정신으로 RM그룹 일가의 저택에서 나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택시에 올라타 있었고, 어느새 준혁과의 신혼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기사의 채근이 아니었다면 얼마쯤은 더 정신을 놓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연희는 기사를 향해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곤 택시비를 지불했다.

    차에서 내리고 나니 건물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준혁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금방이라도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은데, 꿋꿋하게 버텨냈다.

    준혁의 앞이라고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준혁도 똑같이 미웠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왜 말을 하지 않았던 걸까.

    그거에 앞서 언제부터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던 것일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준혁을 향한 원망은 지울 수가 없었다.

    연희는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떼었다. 점점 거리가 좁혀지고 인기척을 느낀 준혁이 자신을 발견한 걸 알았지만, 알은척하지 않았다.

    그의 코앞에 도착해서도 걸음을 멈추긴커녕 냉랭하게 그를 지나쳤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자신을 잡으려는 생각이었는지 그의 손이 움직이는 걸 보았지만 묵묵하게 앞을 보고 걷기만 했다.

    곧 뒤를 따라오는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을 마주한 건 집에 들어서고 외투를 벗으면서였다.

    “부모님은 잘 만나 뵈었어?”

    준혁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제 눈치를 보느라 한 말이란 게 여실히 느껴졌지만, 그것까지도 짜증이 치밀었다.

    “누가 내 부모님이야.”

    “…….”

    “낳아줬다고 다 부모야? 나한테 부모님은 병원에 누워계신 분, 그분 한 분뿐이야.”

    연희는 저도 모르는 새에 벼려진 눈빛으로 준혁을 응시했다. 준혁에게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준혁이나 연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희는 굳이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악의 없이 한 말이라고 해도 아직 저조차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부모라고 칭하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연희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외투를 옷장에 걸곤 화장실로 향했다.

    수전을 틀자 ‘쏴아-’ 하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화장실 안을 그득 채웠다. 연희는 그 소리 뒤에 숨어 세면대를 붙잡은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자꾸만 최숙희 여사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세라야, 넌 내 유일한 손녀야. 네가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 그럼에도 할미 뜻대로 해줘서 아주 고맙게 생각하고도 있고. 아직 너는 이 할미의 뜻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할미가 하나만큼은 분명하게 장담하마.’

    ‘…….’

    ‘준혁이는 너에게 아주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게야. 이 할미가 일군 RM도 너에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지만, 네 신랑 자리 또한 우리 집안 못지않게 훌륭해야만 비로소 완벽해지는 거란다.’

    ‘…….’

    ‘너는 네 아비의 뒤를 이어 이 RM그룹을 이끌어가야 할 인재야. 그러기 위해서라도 빈틈이라곤 하나도 두어선 안 돼. 이 회사가 할미에게 어떤 뜻인지 알고 있지? 먼저 간 네 할아버지와 이 할미가 평생을 바쳐 일군 게 지금의 RM이야. 그러니 네가 꼭 이어받아야 한다. 이어받아서 앞으로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이끌어야 해.’

    그 말끝에 최숙희 여사는 윤세라인 줄로만 알고 있는 제 손을 꼭 부여잡은 채 마지막 남은 말을 전해왔다.

    ‘그게 네가 살면서 이루어야 할 과제란다.’

    연희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은근슬쩍 숙희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었다. 그러곤 서둘러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치밀 것 같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최숙희의 얼굴에선 죄책감은커녕 일말의 죄의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할머니의 인자함만이 온몸 구석구석에 가득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이 집안에서 버린 또 다른 자식이 이렇게나 버젓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토록 잘살고 있을 수가 있는 걸까.

    윤세라는 이렇게나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같이 자식인 자신은 어떻게 그토록 매정하게 버릴 수가 있었던 걸까.

    연희는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문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닫혀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았다.

    “연희야. 잠깐 얘기 좀 하자.”

    준혁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여전히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 음색이었다.

    연희는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억지로 삼켜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지, 아직은 그와 어떤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제 출생의 비밀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나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연희는 흘러내리는 물에 손을 적시곤 얼굴을 한 번 훔쳐내었다.

    수건으로 닦을 새도 없이 화장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 서 있는 준혁이 보였다.

    연희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그가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밥은 먹었어?”

    소파에 앉자마자 준혁이 건네 온 말이었다. 연희는 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한참 만에야 대답했다.

    “할 말이 뭐야. 용건만 간단히 하자. 나 지금도 충분히 혼란스러워.”

    연희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주하고 있던 준혁의 눈을 피했다.

    계속 시선을 얽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 지 고작 24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제게 이 사실을 알린 준혁이 미웠다.

    이 사실을 알린 이유가 자신을 그의 곁에 붙들어두기 위함이란 게 야속했다.

    이런 식으로 그의 곁에 남을 바엔 그냥 이별의 고통을 겪는 게 나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까지도 완벽하게 저 하나만을 생각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연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수시로 극과 극을 오갔다. 그걸 오로지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 통 감당이 되질 않았다.

    그저 갑작스럽게 맞닥뜨린 현실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이어진 준혁의 목소리가 그 바람 역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확고하게 알려왔다.

    “내가 말하기 전에 네 생각을 듣는 게 우선인 거 같아.”

    “…….”

    “네 생각에 따라 내가 할 말도 바뀔 거 같거든.”

    한없이 조심스럽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가 단조로운 톤으로 흘러나왔다.

    내도록 감정에 치우쳐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도 평정을 되찾은 채였다.

    준혁의 걱정을 받을 땐 냉랭하기만 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도리어 감정이 너울지기 시작했다.

    “하, 내 생각을 얘기하라고? 너라면, 네가 나라면 이 상황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 거 같아?”

    연희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을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눈물이 치밀어 올라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넌 갑자기 나더러 윤세라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하고, 정작 내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선택한 게 내가 아니라 윤세라라서 다행이라고 하고. 나는 신연흰데 윤세라랑 쌍둥이인 거고, 그 집안에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고……!”

    혼란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던 연희가 이내 질끈 눈을 감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제 입으로 내뱉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았다.

    혼란한 감정에 완벽하게 집어 삼켜진 채 처절하게 무너져내리는 것 말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얼굴을 가린 연희의 손등 위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연희야.”

    연희는 눈물로 얼룩진 눈꺼풀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코앞에 준혁의 얼굴이 보였다.

    “네 생각이 중요해.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예전처럼 그냥 신연희로 살 수 있겠어?”

    그는 저보다 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제 볼을 적신 눈물을 부드러운 손길로 닦아내었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준혁의 질문이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예전처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아…….”

    연희는 다시금 눈을 질끈 감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고도, 쌍둥이 자매 중 선택한 게 자신이 아니라 윤세라라 다행이란 말을 듣고도.

    그 모든 원망과 미움을 가슴속에 쌓아둔 채 평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연희는 소리 내어 펑펑 울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숨을 쉴 때마다 수천 개의 바늘이 폐부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얼마 동안이나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맞잡고 있는 준혁의 손이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하게 붙잡고 매달렸다는 것밖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후였다.

    “이거.”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연희는 퉁퉁 부은 눈을 간신히 떴다.

    한껏 좁아진 시야 안으로 갈색 서류 봉투가 들어왔다.

    연희는 고개를 들어 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찾은 RM그룹 내의 비리 건들이야. 우리 회사 일 처리하다 우연히 알게 된 정보들이고, 아직 이 자료 이상으로 알아본 내용은 없지만 파고들면 생각지 못한 큰 건까지도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차분하기만 한 준혁의 목소리가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말 중 연희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네가 더 알아보길 바라면 내일부터 바로 지시 내릴 거고, 네가 원치 않으면 나도 이 이상 일 크게 만들 생각 없어. 네가 원하는 게 후자의 경우라면 이 자료도 당연히 폐기할 거고.”

    그러나 이어진 준혁의 말에 연희는 제 앞에 놓인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네가 결정해.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한테 중요한 건 네 생각이니까.”

    연희는 갈색 서류 봉투를 손에 쥐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무게감이 제법 묵직했다.

    딱 그만큼의 위협을 가진 무기가 될 것이다.

    자신이 복수를 꿈꾸는 순간, 제 가족일지도 모를 사람들을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잔인하고도 강력한 무기가 제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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