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7)화 (27/80)
  • 27. 최숙희의 손녀딸

    날이 밝았지만, 연희는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는 탁하게 빛을 잃은 채였다.

    꼭 죽은 사람의 것 같았다.

    속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암전된 것만 같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도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저 준혁의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메아리치듯 반복 재생이 되었다.

    ‘윤세라랑 너, 쌍둥이 자매야.’

    믿지 않았다. 준혁의 짓궂은 장난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 그가 제 앞으로 내민 종이를 눈으로 보고 나자 믿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준혁이 건넨 종이엔 윤세연이라는 낯선 이름과 함께 RM그룹 회장 내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외에도 갓 태어난 신생아의 정보가 더 적혀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거라곤 세 사람의 이름뿐이었다.

    더불어 윤세연이란 이름의 아이가 당시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났다는 것까지.

    사실 그것만 가지고 윤세연이란 이름이 제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렇지 않은가. RM 회장 내외가 출산 당시 얻은 게 쌍둥이라고 하더라도 그중 한 명이 운 나쁘게 죽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래서 윤세라만 RM그룹의 자식으로 남은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준혁이 건네 온 출생증명서가 RM 회장 내외에게 쌍둥이 딸이 있었다는 걸 너무도 명백하게 증명해주었고, RM그룹의 딸인 윤세라와 자신은 소름이 끼치도록 똑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다른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신부 대역이라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정도로, 윤세라와 신연희의 생김새에 이질감이라곤 없었다.

    ‘사본이긴 하지만, 그걸 전해준 사람이 네가 태어났을 당시 직접 받았던 담당 간호사래. 심증은 확실한데, 혹시라도 그 사람이 거짓말하는 걸지도 몰라서 계속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너만 괜찮다면 너랑 윤세라, 유전자 검사도 해볼 생각이고.’

    그 말을 하는 준혁의 표정이 전에 없이 진중했다. 적어도 자신을 붙잡기 위해 허튼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란 의미였다.

    ‘윤세라 자리를 네가 대신한 게 아니야. 어쩌면, 네가 태어났을 때 너희 집안에서 널 버리지만 않았으면 진짜 너랑 내가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는 거라고.’

    이어진 준혁의 말 역시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정말 RM그룹의 딸이라면, 이 자리는 윤세라가 아닌 제 것이 될 수도 있는 거였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정준혁의 곁에 있어선 안 되는 신연희와 돈이 있기에 그 자격을 가졌던 윤세라 사이의 괴리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는 거다.

    거기까지 생각이 정리되자 연희는 숨을 쉬는 것조차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그저 태어났을 뿐인 자신이 뭘 그렇게도 잘못해서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야만 했던 걸까.

    생각이 덧대어지면 덧대어질수록 원망만이 더욱 짙어졌다.

    연희는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놓았다. 그러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건 번호는 준혁의 것이었다.

    -어, 연희야.

    신호음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노심초사한 건지 준혁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연희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RM그룹 본가 주소 좀 알려줘.”

    연희는 바짝 메마른 목소리로 용건을 전했다.

    -갑자기 주소는 왜.

    거창한 이유랄 건 없었다.

    연희는 명료하게 대답했다.

    “가 보고 싶어서.”

    -그런 거라면 나 퇴근하고 그때 같이…….

    “아니.”

    걱정으로 가득한 준혁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나 혼자 다녀올게. 그러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연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침실로 향했다. 머릿속엔 그간 보았던 세라의 옷차림에 관한 것뿐이었다.

    제 옷장에 세라가 입던 비싼 명품 브랜드의 옷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백화점부터 들르는 게 순서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연희는 외투를 집어 든 채 다시 한번 핸드폰 너머 준혁을 향해 요구했다.

    “문자로 주소 보내줘. 그런 줄 알고 이만 끊을게.”

    ***

    택시에서 내린 연희는 바로 앞에 보이는 높은 담벼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준혁이 보내준 주소는 성북동 소재의 저택 자리였다.

    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가슴 속에 가득한 원망의 감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연희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발엔 새빨간 색으로 칠해진 굽 높은 하이힐이 신겨져 있었다.

    평소 연희가 선호하는 스타일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먼 디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걸치고 있는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라가 입을 법한 옷이라고 가정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걸친 옷부터 신발, 들고 있는 가방까지 전부 세라의 취향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하물며 착용한 액세서리까지도 세라가 자주 찾는 브랜드의 것들이었다.

    고작 몇 번 본 거로 세라의 취향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단숨에 윤세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준혁의 덕이었다.

    위에 보낸 브랜드들이 윤세라가 자주 찾는 브랜드들이야. 아는 사람 통해서 백화점 VIP 카드 확인한 거니까 확실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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