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쌍둥이 자매
연희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내뱉었다.
준혁을 만난 후로 한순간도 준혁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너무 사랑해서 고통스러웠고, 그래서 억지로나마 지우고 살아야 할 만큼, 언제나 그를 향한 마음은 진심뿐이었다.
그걸 준혁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의심할 정도로 그의 마음이 다친 모양이었다.
제 손으로 직접 안겨준 상처였다. 그래서 어떻게 제 마음을 의심할 수가 있는 거냐고 원망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준혁과 신연희는 만나선 안 되는 인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뿐 아니라 정말로 지독한 악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었다.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제 의지로 준혁을 떠나고자 했던 적은 없었다. 도리어 언제까지나 그의 곁에 머무르고만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선 자꾸만 준혁을 떠나라고 종용했다. 자신이 준혁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야속한 현실에 괴로운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결국 또 이렇게 헤어지게 할 거면 다시 만나게라도 하지 말지.
신이란 게 정말 있다면 연희는 울며불며 패악질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겐 그렇게나마 감정을 쏟아내고 원망할 수 있는 곳조차도 없었다.
눈앞에 처한 현실을, 오로지 그녀 스스로 이겨내야만 했다.
연희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곤 힘주어 물고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응. 계속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지, 너.”
전에 없이 냉정한 목소리였다.
잠깐만 방심해도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연희는 그렇게나마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잡고 채찍질했다.
“근데 너만큼은 아니었나 봐.”
그 말을 뱉기 무섭게 연희는 숨을 참았다.
길지 않은 말을 뱉는 동안 가슴이 갈가리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
고통스럽게 구겨진 준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는 데도 있는 힘을 다해 외면했다.
“하, 뭐……?”
준혁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스로 막고 있는 제 감정의 둑도 무너질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버텼다.
“네가 날 사랑했던 만큼은 널 사랑하는 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두 번이나 이렇게 널 버리고 떠날 수 있을 정도.”
“…….”
“난 딱 그 정도였나 봐.”
여기까지가 그녀가 할 수 있는 한계치였다.
그러니 제발, 준혁이 이쯤에서 진저리를 치며 자신을 버리기를, 연희는 온 마음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매정하기 짝이 없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자꾸만 볼 위를 적셨지만, 제발 준혁이 속아 넘어가길.
그 간절한 마음이 준혁에게 닿기라도 한 건지, 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연희를 바라보기만 했다.
준혁으로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연희가 야속하다가도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고되어 보여 마음 편히 그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상처 되는 말을 듣고 있는 건 정작 자신인데, 당장에 무너질 것 같은 건 연희였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텐데.
그동안 그렇게나 이야기했는데, 연희는 이번에도 자신을 믿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살면서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자신을 믿지 못할 수가 있는 건지. 그런 연희가 미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신연희까지도 너무 좋아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다.
“윤세라랑 너, 쌍둥이 자매야.”
준혁은 참고 참았던 그 말을 쏟아냈다.
이런 식으로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다면 아껴둘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말이 연희에게 커다란 혼란을 안겨준다고 해도, 이거로 그녀를 제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하, 너 지금 무슨 말을……!”
“네가 태어나자마자 널 버린 부모는 RM그룹 회장 내외고, 어떻게 봐도 너랑 똑같이 생긴 윤세라가 네 쌍둥이 언니라고.”
요동치던 연희의 눈동자가 일순 정지되듯 멈추었다. 들썩이던 어깨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던 손목도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연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준혁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윤세라와 쌍둥이 자매라니. 자신이 RM그룹의 딸이라니.
살면서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궁금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누구일지. 왜 낳자마자 자신을 버린 건지. 이럴 거면 왜 자신을 낳은 건지.
순수한 궁금증이라기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제 삶이 너무 고되어 원망이라도 할 곳이 필요했다. 그게 얼굴도 모르는 제 부모였다.
그러나 그렇게 원망을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더욱 답답해지기만 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턴 제 부모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었을 거라고. 도저히 자신을 키울 여력이 되지 않아 그랬을 거라고. 그들도 자신을 버려놓고 마음 편히 살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합리화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위한 이유를 만들어내며 위안해야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제 부모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RM그룹 회장 내외라고……?
“……거짓말, 하지 마.”
연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제발 준혁이 거짓말이라고 해주었으면 했다.
아무리 자신이 밉다고 한들 이건 너무 과한 장난이었다.
연희의 눈동자가 준혁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입술 위에서 멈추었다.
저 입을 통해 나와야 하는 말은 사실은 장난이었다고, 네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어 나도 심한 장난 좀 쳐봤다고, 미안하다고, 그 말뿐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신은 마지막까지도 연희를 철저하게 배반했다.
“난 너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준혁이 올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를 향한 시선까지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든 게 조금 전 그가 내뱉은 그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절대 장난이 아님을 완벽하게 의미하고 있었다.
연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좀 전부터 눈매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음 편히 흐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따금 잇새로 새어 나오는 꺽꺽거리는 소리만이 연희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서재에 네 출생증명서가 있어. 못 믿겠으면 네 눈으로 직접 봐. 보여줄 테니까.”
준혁은 다리를 굽히고 앉아 연희와 시선을 맞추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는 연희를 보고 있자니 제 가슴이 다 뭉개지는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기에 차마 그간 연희한테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던 거다.
어떻게 꺼내도 연희에겐 상처밖에 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몇 날 며칠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민했던 건데…….
하지만 그렇게나 고민한 게 무색하도록 결국 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 그 말을 이용하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번엔 정말 영영 연희를 손에서 놓치고 말 것 같아서.
그래서 준혁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린 연희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연희의 앞에 완벽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온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다.
“내 옆에 있어. 네 자리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필요하다면 이용도 당해 줄게.”
“…….”
“네가 또 날 버리려고 했다고 해도, 그래도 난 여전히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다 할 거야. 널 위한 거라면 내가 못 할 일은 없어. 그러니까, 신연희.”
준혁은 다부진 목소리로 연희를 불렀다.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기는커녕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그녀의 털끝도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았지만, 준혁은 연희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제야 위로 들린 연희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잠깐도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할 수 없도록, 단단히 얽어맸다.
“그렇게라도, 나를 이용하겠단 마음으로라도 내 옆에 있어, 제발.”
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붙잡아두기 위해 내뱉는 모든 말이 제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혔다.
고통스럽다 못해 죽을 것 같았지만, 견뎠다.
이보다 더한 고통은 신연희 없는 삶을 사는 거였다.
한 번 한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이깟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닌 척 견뎌내야 맞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연희일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에게 당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그녀를 버린 부모보다도 자신일지도 몰랐다.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라도 곁에 남겠다고 하길 바랐다.
부디, 그녀가 자신을 떠나겠단 마음을 완전히 단념하길 바랐다.
연희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준혁을 초조함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래도 준혁은 견딜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가시밭길이 제 앞에 놓여 있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었다.
연희만 제 곁에 있다면. 그렇다면 그게 뭐든, 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 더 고통스럽다고 할 수 없을 밤이 점점 더 깊어갔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두 사람은 오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