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5)화 (25/80)
  • 25. 도망

    불이 꺼진 침실 안.

    연희는 잠이 든 준혁의 얼굴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새벽이 깊어가는 시각인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자신은 곧, 그의 곁을 떠나야 했으니까.

    세라에게 약속한 시간은 주말, 딱 이틀이었다.

    그러니 일요일이 지나 월요일이 오고 있는 이 새벽, 자신은 떠나야 하는 게 맞았다.

    가만히 준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틀간의 시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네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희 너니까, 그래서 믿는 거야.’

    정장 세트를 선물하는 자신을 향해 건네진 준혁의 말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숨기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제발, 털어놓아 달라고.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 전부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더라도, 지금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그게 세라와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이기에 믿는다고 말하는 건 마지막까지도 제게 기회를 주고 싶어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기회인지,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저로서는 도무지 잡을 수 없는 기회였다.

    저 하나만 걸린 문제였다면 한 번쯤은 그의 손을 잡아보자고. 그를 믿고 모든 걸 맡겨보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제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자신을 거두고 친자식처럼 여겨준 연정을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은 그녀였다. 힘겹게 버티는 중이었고, 앞으로 살날이 얼마나 될지 장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연정을 HN그룹과 RM그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업에게 짓밟히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연정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하는 선택이 정준혁을 버리고 떠나는 일일지라도, 도저히 연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

    연희는 베고 있던 두 손 중 한 손을 들어 준혁의 얼굴 근처로 가져갔다. 살짝만 건드려도 그가 깰 것만 같아, 차마 그의 얼굴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그에게 가져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손을 멈추곤 그의 얼굴선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만져지진 않지만, 그의 온기는 또렷하게 전해졌다.

    따뜻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하던 그의 눈빛만큼이나.

    연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속을 헤매고 있을 그가 깨어나는 일은 없도록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설 때까지, 준혁은 여전히 곤하게 잠든 얼굴이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고 가슴이 아렸다. 멀찍이 떨어져 보고 있을 게 아니라 온기 가득할 그의 품속을 파고들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중 어느 하나도 제겐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연희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등을 돌렸다. 그러곤 느리게나마 다리를 움직였다.

    거실로 나와 준혁 모르게 꺼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으로 나가자 움직임을 읽은 센서 등이 환하게 불을 밝혔다.

    연희는 묵묵하게 신발을 신곤 신발장 문에 달린 거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언제나 휑하던 목 주변으로 펜던트가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준혁아, 처음으로 선물 줘 놓고 이런 말 하기 좀 민망하긴 한데…….’

    ‘뭔데?’

    ‘나도 선물 하나만 해주면 안 돼?’

    ‘뭐가 갖고 싶은데?’

    ‘음, 목걸이…….’

    연희는 반짝이는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목걸이가 갖고 싶다는 말에 준혁은 잠깐이지만 의아한 표정을 했었다.

    무언가 갖고 싶다는 말도, 사달란 말도 처음으로 한 것이니 그의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그를 대신해 지닐 수 있는 물건이 갖고 싶었다. 무엇이 됐든 그를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이면 충분했다.

    그 생각으로 고른 게 목걸이였을 뿐이었다.

    선물을 해 달란 말로 그의 의심을 한 꺼풀 벗겨낼 수 있었던 건 의도하지 않은 성과였다.

    준혁은 흔쾌히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다. 그게 신연희의 이기심을 투영한 물건일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그가 알아채기 전에 조용히 사라져야 했다.

    연희는 조심히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곤 문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나마 보금자리였던 곳을 떠나는 사람치고 너무나 간소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목에 걸린 목걸이 하나면 충분했다.

    잠시 후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이 없어졌다는 걸 눈치챌 준혁에게 어떻게든 혼란을 주고 그렇게나마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면 제 짐은 그대로 두는 것이 맞았다.

    몸이 전부 빠져나오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걸로 정말 끝이었다. 준혁과의 행복한 미래 같은 건,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신 꿈꿔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생각 하나로 독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마음속에 한가득 남은 미련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자고 속삭이기라도 할까 봐 잠깐도 멈칫거리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와 도로변까지 걸었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택시 한 대가 보였다.

    연희는 팔을 뻗었다. 자신을 발견한 듯 비상깜빡이를 켠 택시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멈춰선 택시 앞으로 연희는 한 걸음 내디뎠다. 뒷좌석의 문손잡이를 잡는데 선뜻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지금쯤 그가 잠들어 있을 집을 찾아 고개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끝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보고 나면 달려가고 싶고, 달려가고 나면 다신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돼. 정신 차려, 신연희.”

    연희는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지만, 고집스럽게 정면만 노려보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힘주어 당긴 택시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곤 그 안으로 몸을 구겨 넣기 위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어디가, 너.”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손목을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

    내도록 뒤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정작 뒤를 돌아봐야 하는 순간에 와서는 돌아볼 자신이 생겨나지 않았다.

    “신연희.”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속으로 내리꽂혔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런 식으로 붙잡히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그토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어떻게 알고 나온 것일까.

    하지만 지금이 그런 거나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연희는 우선 잡았던 택시를 그대로 보내곤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어떤 말로든 둘러대야 했다.

    “……준혁아.”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다음으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디 가느냐고 물었어.”

    그가 너무나도 절망스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고 원망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붙잡고 있었다.

    차마 그 얼굴을 보고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그를 기만한 주제에 더는 그를 기만할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 준혁아.”

    연희는 준혁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속절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그의 온기를 느끼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근데 아무래도 이제 그만 원래 주인한테 자리를 돌려줘야 할 거 같아.”

    무너지는 마음을 겨우 붙들며 그에게 사실을 고했다.

    부디, 그가 더는 자신을 붙잡질 않길 바라며.

    “그 자리 주인이 누군데, 도대체.”

    그러나 준혁의 마음은 연희의 생각과는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연희는 준혁에게 붙잡힌 손목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에게 붙잡힌 자리가 찌릿하게 아팠다. 이렇게 세게 붙잡으면 도망치려던 자신을 다시 옆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손목을 잡은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연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쩌면 많은 말은 필요치 않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도망치듯 떠나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으니까.

    “윤세라 씨가 본인 자리 다시 찾고 싶대. 그럼 난 비켜줘야 하는 게 맞잖아. 이 자리 주인은 원래 윤세라 씨니까. 윤세라 씨가 네 진짜 아내이니…….”

    그러나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준혁에게 붙잡혀 찌릿거리던 자리로 그새 멍이라도 든 것처럼 묵직한 고통이 전해졌다.

    “누구 마음대로.”

    “……준혁아.”

    “누구 마음대로 내 옆이 윤세라 자리인데.”

    연희는 떨리는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준혁은 이를 악문 채 치미는 감정을 최선을 다해 억누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제 마음이 다 무너져 내릴 만큼, 그는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내 옆자리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다른 사람 몫이었던 적이 없어.”

    “…….”

    “적어도 널 만난 이후로는, 네가 내 옆에 있든 없든 줄곧 네 자리였다고.”

    연희는 숨을 멈추었다.

    그러길 바라고 원했던 적이 분명 있었다.

    언제까지고 정준혁의 옆자리는 신연희의 것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말을 준혁의 입을 통해 듣게 되었는데 기쁘기보단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어쩌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떠나는 일밖에 없는데, 어쩌자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나 맹목적인 건지.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약해져선 안 되었다.

    연희는 단호한 표정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이러지 마. 네가 이런다고 해서 윤세라랑 정준혁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기사까지 나갔고, 너랑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윤세라가 정준혁의 아내가 되었다는 건 변하지 않아. 지금이 아니더라도 결국 너랑 난 헤어져야만 하는 거라고.”

    “그래서 이렇게 또 몰래 도망치는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서? 정준혁이랑 결혼한 게 윤세라라고 알려져서?”

    “하, 준혁아.”

    “도대체, 넌!”

    줄곧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던 준혁이 일순 연희의 어깨를 붙잡곤 거칠게 감정을 쏟아냈다.

    연희는 놀란 얼굴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준혁의 얼굴을 빠짐없이 두 눈에 담았다.

    “넌 나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단 한 순간이라도 있어?”

    “…….”

    “날 사랑하는 건 맞아?”

    포효나 다름없는 말에 연희의 두 눈 가득 눈물이 빼곡하게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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