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3)화 (23/80)

23. 이기적인 바람(2)

연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눈을 맞추는 건 물론, 한마디라도 말을 섞었다간 속을 전부 들킬 게 분명했다.

“연희야.”

그러나 준혁 역시 오늘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희의 잇새로 옅은 한숨이 새었다. 아무래도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게, 오늘은 제게서 무슨 대답이든 듣겠단 의지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대답을 하는 것이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목이 막혔다. 복숭아 씨가 꽉 막고 있는 것처럼 아프기만 했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눈동자 위로 무릎 위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제 손이 보였다.

한데로 뒤엉킨 손가락이 서로의 손끝을 못살게 괴롭히고 있었다.

생살이 뜯기고 피가 배어 나오는 게 보이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초조한 모양이었다.

준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제게 이만큼이나 파급력 있는 일인 모양이었다.

“……응.”

연희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었다.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하는데 기어이 울음이 뒤섞이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게 너무 절망스러웠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 불안해하던 그였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고, 한 이불 속에서 뜨겁게 뒤엉키면서도 안심이란 걸 할 줄 모르던 그였다.

그런 그에게 자신은 또 얼마나 큰 상처를 주게 될지.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

“무슨 일, 있어?”

예견했던 질문이 연희의 가슴에 와 꽂혔다.

그가 한 거라곤 말을 건넨 것뿐인데, 연희는 칼에 난도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팠다.

진작부터 한가득 차오른 눈물을 참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또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러곤 또 그를 기만하고 말 대답을 내뱉었다.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텐데. 적어도 그를 기만하는 일만큼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걸 알면서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말뿐이었다.

연희는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 듣고 있다면 제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어도 좋으니,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없어, 준혁아. 아무 일도…….”

제발 그가 먼저 멈출 수 있게 해주세요.

내가 그를 기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또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도록.

이렇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올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나를 버릴 수 있게,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아무 일도 없어, 준혁아.”

그를 기만하는 것보다 더 이기적일지도 모를 바람이었다.

그러나 연희는 아주 간절하게도 바랐다.

준혁이 먼저 자신을 버릴 수 있게 해달라고.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고요한 정적 속으로 준혁의 목소리가 애달프게 울렸다.

연희는 지금껏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시선을 위로 들었다.

거칠게 요동치는 준혁의 눈동자가 제일 먼저 보였다. 그다음으로 보인 건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입매였다.

무언가를 간절히도 원하고 있는 것처럼,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네가 하는 말이면 그게 뭐든 다 믿을 거야.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다…….”

“…….”

“다 네가 해달라는 대로 해줄 거야.”

그러니까 솔직하게만 말하라고.

네가 바라는 게 지금 그 자리라면, 어떻게 해서든 윤세라에게서 그 자리를 빼앗아 네 것으로 만들어 줄 거라고.

그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악물고 참았던 눈물이 볼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네 옆에 있고 싶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너와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정말 그가 그렇게 되도록 어떻게든 해줄 것 같았다. 그게 뭐든 정말 다 이루어줄 것 같았다.

설령 그게 HN그룹과 RM그룹에 맞서야 하는 일이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해줄 것 같았다.

“준혁아…….”

연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준혁을 보았다. 마주한 준혁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확고한 뜻을 담아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그 대답을 해주는 게, 제게도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정말이야.”

이번에도 결국 그를 외면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태어나 처음 해본 사랑이자 다시는 할 수 없을 사랑이라서.

그렇게까지 그를 사랑해서.

도저히 제 손으로는, 그를 망칠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에 젖어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그 길로 곧장 자신의 앞으로 와 매섭게 다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신연희 씨 계좌로 방금 4억 입금했어요. 신연희 씨가 살게 될 집도 내일이면 계약하게 될 것 같은데, 내 연락은 계속 무시할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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