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0)화 (20/80)
  • 20. 반갑지 않은 연락

    준혁은 곤히 잠들어 있는 연희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저녁을 해주고 싶었다던 연희의 바람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기엔 신연희는 정준혁에게 있어 시종일관 너무나도 자극적인 여자였다.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던 입맞춤은 그의 인내를 빠른 속도로 갉아먹었다.

    기어이 단정하던 연희의 옷가지를 흐트러뜨렸고, 짧은 시간 동안 느꼈던 불안을 전부 해소하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 연희를 괴롭혔다.

    늘 그랬다. 연희를 상대로는 도무지 자제할 수가 없었다.

    반쯤 미친놈처럼 그녀의 품을 파고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덧 연희는 실신 직전의 모습으로 피로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미안한 감정이 밀려왔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런 마음을 가졌냐는 듯 리셋이 되었다.

    불가항력이란 말이 딱이었다.

    신연희와 관련한 모든 일은 제게 있어 언제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윤세라와의 일 때문에 더욱이 연희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말았다.

    다른 때였다면 연희에게 여유를 주어야 한다는 생각 정도는 이따금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

    ‘하아, 준, 혁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읏……!’

    연희가 보내온 신호가 버겁다는 의미라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연희가 집을 비웠던 그 짧은 시간이 제겐 정말 지옥보다도 더한 지옥이었으니까.

    ‘이봐요, 정준혁 씨! 말 같은 소리를 해요! 신연희는 그냥 내가 돈 주고 산 여자일 뿐이야!! 약속한 돈만 주면 내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사람일 뿐이라고!’

    오기로 한 말이란 걸 알면서도 표독스럽기만 하던 세라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동시에 며칠 전 연희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1년 동안 결혼 생활 유지하면, 돈 더 준다고 했어. 나…….’

    ‘…….’

    ‘나, 그 돈 받고 싶어, 준혁아.’

    1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 윤세라에게 돈을 더 받을 거라고 했다. 그 돈이 받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니 적어도 1년 동안은 연희가 제 발로 자신을 떠날 일은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굳이 1년을 채우지 않더라도 윤세라가 연희에게 돈을 쥐여줄 수 있다는 경우의 수는 완벽하게 간과하고 있었다.

    그 허점을 윤세라를 내쫓듯 돌려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도저히 업무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분에 찬 얼굴로 나서던 윤세라가 그 길로 연희를 만난 건 아닐지,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칠게 운전을 하면서도 연희에게 전화를 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 두 눈으로 직접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여라도 자신이 전화를 건 순간, 이미 윤세라를 만난 연희가 떠날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면 제 전화 자체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는 힌트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마 전화도 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집에 도착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연희가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쳐댔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연희의 흔적을 찾아 침실 구석구석을 뒤졌다.

    연희의 옷가지나 짐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그런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짐까지 전부 버리고 떠나기라도 한 거면 어떡하지.

    그 생각에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때마침 연희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정신줄을 놓은 미친놈처럼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아…….”

    준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연희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제 손으로 직접 연희를 만질 때마다 10년이나 잊고 살았던 행복이 가슴속에 빼곡히 차올랐다.

    미치도록 행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치도록 불안했다.

    이 행복이 또 말없이 멀리 달아나지는 않을까. 그렇게 영영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시종일관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준혁은 조금 더 대범한 손길로 연희의 볼을 쓸어내리며 불룩한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이마와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내도록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연희가 몸을 뒤척이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준혁은 슬쩍 미간을 좁힌 채 조금쯤 미안한 얼굴로 연희를 보았다.

    그러자 연희가 잠기운이 가득한 눈을 간신히 뜬 채 배시시 웃는 게 보였다.

    “깼어?”

    “……깨라고 계속 건드린 거 아니었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걸 보니 피곤하긴 해도 컨디션이 나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준혁은 반쯤 일으키고 있던 몸을 편안하게 누인 후 연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머리를 든 연희가 준혁의 어깨를 베곤 아이처럼 품을 파고들었다.

    준혁은 속절없이 미소를 감아올렸다.

    조금 전 느꼈던 불안은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온전히 행복하기만 했다.

    그는 다시금 연희의 이마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그녀를 힘껏 끌어안은 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렸다.

    “더 자. 이제 안 괴롭힐게.”

    “거짓말.”

    “진짜야. 나도 이제 그만 눈붙여야지.”

    “새벽이 되도록 짐승처럼 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짐승이 되는 건 다 너 때문인 거고.”

    “와, 그걸 내 탓으로 돌린다고?”

    나른하게 안겨있던 연희가 비죽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던 눈매가 가늘어지고, 한껏 얄궂어진 눈길이 준혁을 향해 쏘아졌다.

    제법 따가운 시선이었지만, 준혁은 내리감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저 연희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와의 거리를 빈틈없이 밀착시켰다.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연희의 머리 위로 볼을 가져다 대었다.

    그것만으로 연희에게 충분한 대답이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더욱이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냄새에 순식간에 몸이 나른해졌다.

    문득 이 순간 그녀가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에게서 자신의 샴푸 향이 난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게 뛴다는 걸.

    “연희야.”

    준혁은 잠기운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연희를 찾았다.

    “응, 준혁아.”

    늘 꿈에서만 그리던 목소리가 단박에 돌아왔다. 그것까지도 준혁을 미치도록 행복하게 했다.

    “사랑해.”

    혹여나 사랑 고백이 부담되지는 않을까 자제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보지만, 결국엔 이렇게 고백하고 말 만큼.

    “정말 사랑한다.”

    준혁은 연희가 정말이지 미치게 좋았다.

    “…….”

    이름을 불렀을 땐 곧장 돌아오던 연희의 목소리가 이번엔 쉬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연희는 여전히 제 품에 안겨있었고, 더욱 힘주어 끌어안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준혁은 은은하게 미소를 감아올렸다. 어쩐지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이 희미해지고, 까무룩 잠에 들 것 같던 찰나였다.

    안온하기만 하던 침실 공기 중으로 반갑지 않은 날카로운 소음이 뻗어나갔다.

    준혁이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곧장 보인 건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연희의 모습이었다.

    연희는 미간을 좁힌 채로 액정을 살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셔서 그런 건지, 그게 아니면 반갑지 않은 연락을 받았기 때문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무슨 연락이야?”

    준혁은 습관이나 다름없이 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느새 그를 집어삼킨 무거운 수마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 엄마.”

    연희의 목소리가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그 탓에 준혁이 몸을 반쯤 일으키고 앉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 있으시대?”

    준혁은 조금쯤 다급한 투로 물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내일 올 수 있겠느냐고.”

    “어디가 많이 편찮으신 건 아니고?”

    “그랬으면 간병인 아주머니한테서 연락이 왔을 거야.”

    “그것도 그렇네.”

    준혁은 가볍게 수긍했다.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그럼에도 쉬이 펴질 줄 모르는 연희의 표정이 내심 신경 쓰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연희의 말에 걱정도 거두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준혁아, 미안한데 나 물 한 잔만 떠다 줄 수 있을까?”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다. 어려운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연희의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준혁은 언제 잠에 취했냐는 듯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연희는 준혁이 완전히 방을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금 액정 위로 시선을 두었다.

    동공 위로 박힌 글자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메시지를 보내온 사람이 연희의 목 끝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우리 좀 만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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