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계속 애태워도 되니까.
“당신이 직접 집안 어른들 다 속일 수 있을 거라고 당당하게 내세운 게 지금 대역 아닙니까? 근데 뭐가 문제가 되죠?”
준혁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뇌까렸다.
그의 말이 한마디 보태어질 때마다 무릎 위로 올린 세라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세라는 새빨갛게 칠한 입술을 거세게 짓씹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지금 정준혁 씨 말은 내 자리를 뺏어서 대역인 그 여자한테 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요?”
세라가 달달 떨리는 손끝에 힘을 주어 안으로 말아쥐었다.
호기로운 척 말을 뱉긴 했지만, 이미 온몸을 좀먹은 두려움까지 숨기진 못했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준혁에게까지 전해졌다.
준혁은 더욱이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생각이 아주 짧은 건 아닌 모양이군요.”
“이봐요, 정준혁 씨! 말 같은 소리를 해요! 신연희는 그냥 내가 돈 주고 산 여자일 뿐이야!! 약속한 돈만 주면 내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날 사람일 뿐이라고!”
준혁의 약한 도발에도 세라는 길길이 날뛰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준혁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정말 이대로 제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르겠단 불길함이 엄습했다.
그 탓에 조금 전 그녀가 내뱉은 말이 준혁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렇습니까? 윤세라 씨가 그렇게 얘기하니 난 더더욱 지금 내 집에 있는 그 여자를 오래오래 더 붙들어놓고 싶어지는데.”
준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눌러 참으며 세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라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적당히 하고 치워야겠단 생각이 씻은 듯 사라졌다.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신연희는 고작 윤세라 따위가 돈으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하, 우리 부모님이 고작 대역을 보고 진짜 나일 거라고 착각하실 거 같아요?”
“결혼식장에선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두 분인데 앞으로는 속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죠? 상황이야 만들기 나름일 텐데.”
이어진 준혁의 말에 세라가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꾹 맞붙였다.
그럴수록 준혁의 입가에 매달린 비소가 더욱 진한 색을 띠었다.
“사람 하나 정신병자로 만드는 거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란 것 정도는 윤세라 씨도 알고 있을 텐데요.”
“이봐요, 정준혁 씨!”
세라가 꽉 움켜쥔 주먹으로 소파 팔걸이를 내리쳤다.
표독스럽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지만, 두 눈은 그렁그렁하게 차오른 눈물로 가득했다.
준혁은 말없이 세라를 응시했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고작 이 정도 도발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감히 연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윤세라를 처절하게 무너뜨리고 싶었지만, 시간 낭비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윤세라. 진짜 네 자리 뺏기기 싫으면 돈 가지고 장난질 치지 말라고.”
준혁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퇴근 시간까지 한참이나 남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희뿐이던 머릿속이 빈틈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그녀로 메워졌다.
보고 싶었다, 연희가.
애가 타서 미치겠을 정도로.
그리움을 인내해야만 하는 고통의 화살은 곧장 세라에게로 향했다.
불시에 눈동자를 치켜든 준혁이 자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으로 장난질 치는 거. 당신이 더 잘할까, 내가 더 잘할까?”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눈길로 다시 한번 세라의 숨통을 조였다.
“경고야. 두 번은 없어. 평생 네 자리 잃은 채 살고 싶지 않으면 돌려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 그게 네가 한 실수에 대한 대가니까.”
거기까지였다.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키폰의 버튼을 눌러 김 비서를 호출했다.
-네, 대표님.
“손님 가신다니까 배웅 좀 해줘요.”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와의 대화는 간단하게 끝이 났다.
곧 대표실의 문이 열리고 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라는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준혁을 노려보았다.
거세게 밀려오는 수치심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동안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가 독기 가득한 얼굴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들어설 때와는 달리 거친 구두 굽 소리가 대표실 안을 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곧 문이 닫히고 무거운 정적이 준혁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준혁은 책상 의자에 털썩 앉은 채 관자놀이를 짚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
연희는 양손에 묵직한 봉투를 든 채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봉투의 겉면엔 신혼집 근처 마트의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준혁에게 저녁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카트에 담은 식재료들이 양손에 한가득이었다. 그런데도 무겁지 않았다.
되레 곧 퇴근하고 돌아올 준혁을 생각하면 웃음부터 푸슬푸슬 나왔다.
누군가를 위한 식사 상을 차린다는 게 얼마 만에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10년 전 준혁과 연애하던 시절에 몇 없던 기억이 마지막인 것 같다.
그 이후 연정과 지내면서는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느라 늘 연정이 차려준 상을 받기만 했으니까.
제게 놓인 현실 때문이기도 했지만, 요리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 한 번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연희는 진심으로 설렜다.
제 손으로 만든 저녁상을 보고 준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연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연희는 제 생일과 준혁의 생일을 조합한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막 신발을 벗는데 집을 나설 땐 보이지 않던 신발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막 침실에서 나온 듯한 준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희는 놀란 얼굴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막 한 걸음을 내디디려는 찰나.
“……준혁아?”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준혁의 품에 속절없이 안기고 말았다.
“언제 왔어?”
연희는 양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곤 준혁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고개를 슬쩍 돌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준혁은 쉬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용히 귀를 기울여보니 숨소리가 거친 것도 같았다.
연희는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하지만 막 문이 열려 있는 침실에 시선이 닿은 순간, 준혁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끝에 힘을 주어야 했다.
“……집에 왔는데 없어서 놀랐어.”
도대체 얼마나 긴장을 했던 건지, 준혁답지 않은 힘없는 목소리가 연희의 고막을 찌르고 들어왔다.
연희는 목 끝이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언뜻 보이는 침실 안이 엉망이었다. 붙박이장의 문은 두서없이 열려 있었고, 유일하게 하나 있는 서랍장은 질서 없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꼭 10년 전처럼, 자신이 없어지기라도 했을까 봐 사라진 물건이 있는 건 아닌지 살피기라도 한 것 같았다.
“준혁아.”
연희는 준혁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그러자 준혁이 더욱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어디 간다는 말 없었잖아.”
뜨겁게 달아오른 숨이 새하얀 피부 위로 쏟아졌다.
숨결의 온도가 잠깐이나마 그가 느꼈을 불안의 수치를 증명하는 것 같아 연희는 마음이 아팠다.
연희는 가만히 준혁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칠던 숨이 조금쯤 차분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다시금 입술을 움직였다.
“이 앞 마트에 다녀왔어. 너한테 저녁이 해주고 싶어서.”
“……하아. 말 좀 해주지.”
“늘 퇴근하던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이 시간에 네가 와 있을 줄 몰랐어.”
“그래도 연락은 해줄 수 있잖아.”
“너 바쁠 것 같아서.”
“아무리 바빠도 네 연락 확인할 시간은 있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준혁의 대꾸에 연희는 결국 항복 선언을 해야 했다.
어지간해선 제게 져주기만 하는 준혁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별도리가 없었다.
“미안해. 다음부턴 어딜 가든 다 얘기할게.”
“약속해.”
“응, 약속할게.”
연희는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준혁이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을 풀곤 시선을 맞춰왔다.
“천하의 정준혁 체면이 정말 말이 아니다.”
평소의 컨디션을 되찾아가고 있는 건지 준혁이 투정 섞인 목소리를 내며 옅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연희는 준혁을 따라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얄궂은 얼굴로 물었다.
“왜, 이제 와서 창피해?”
“창피한 건 둘째 문제고 방금 너무 애같이 군 거 같아서. 매력 없이 보였을까 봐 걱정이야.”
이어진 말은 더욱이 연희를 웃지 않곤 배길 수 없게 만들었다.
“정준혁이 그런 걱정도 할 줄 알아?”
“당연하지. 너랑 있을 때면 그 걱정 안 했던 적이 없었어.”
그러나 마지막 말에는 차마 속 편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연희는 떨리는 동공으로 준혁과 시선을 맞물렸다. 그는 거짓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보다 너한테 되게 나쁜 여자였나 봐.”
연희가 조금쯤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쁜 여자가 아니라 잠깐도 안심할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매력적인 여자였지.”
“원래 남자든 여자든 상대 애태우는 게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 매력적인 거라더라.”
연희는 애써 준혁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덧붙였다.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가 이렇듯 늘 불안 속에 머무르고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언제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에게 다른 여자가 접근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자신뿐이라고만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그가 불안해한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10년이나 지난 지금, 그가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 계속 애태워도 되니까, 지금처럼 옆에만 있어.”
어제오늘 일이 아닌 준혁의 애원이 새삼스레 연희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10년 전이었다고는 하나 그와의 연애가 결코 짧지 않았는데,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게, 자꾸만 그를 향한 감정을 도무지 컨트롤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응. 안 갈게.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그래. 가지 마. 제발, 어디로도 사라지지 마.”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로 두 사람 사이에 더는 대화가 필요치 않았다.
준혁은 반자동이나 다름없이 연희에게 입을 맞추었다. 차분해진 듯했던 숨소리가 다시금 거칠어지기까진 금방이었다.
연희는 준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뒤얽힌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