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8)화 (18/80)

18. 폭탄선언

준혁은 대표실 소파에 앉아 맞은편 자리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 걸린 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윤세라였다.

윤세라가 이곳 대표실에 들어온 건 10분 전쯤이었다.

부산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게 찝찝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 찾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집안끼리의 약속인 결혼식장에 가짜 신부를 세운 당사자의 행보치곤 꽤 파격적이었다.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준혁은 그 뜻을 먼저 물을 생각이 없었다.

잠자코 앉아있자 애가 탄 건 세라 쪽이었다.

세라는 여유로운 척 차를 들이켜고 있었지만, 줄곧 침묵만 고수하는 준혁의 태도가 무척 불편했다.

예상대로라면 놀라야 맞았다.

자신을 윤세라로 알든, 신연희로 알든 간에 이 시간에 여길 왜 찾은 건지 그 이유를 추궁해야 했다.

그런데 준혁은 줄곧 시선만 보내오고 있었다.

마치 이렇게 뜬금없이 찾아온 이유 같은 건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

번번이 예상을 빗나가는 준혁의 태도가 흥미를 자극하면서도 묘하게 끌렸다.

조금도 관심 가진 적 없던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애가 탄다는 게 퍽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세라는 웃어넘기기로 했다.

어쨌든 정준혁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제 남편이었다.

사고를 친 건 자신이었고, 그러니 이건 남편과의 오해를 푸는 일쯤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적당한 위로가 되었다.

세라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곤 준혁을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아무 말이 없네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준혁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면, 덜미를 잡힐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걸 모르고 한 말이 아니었다.

세라는 준혁에게 모든 걸 알릴 작정이었다. 그러곤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자꾸만 끌리는 이 남자를 제 남편으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

준혁은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조금도 없는 게 조금 마뜩잖긴 했지만, 그럴 수 있었다.

너무 놀라면 사람이 되레 침착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세라는 준혁이 그래서 그런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 생각이 착각이란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가 윤세라 씨한테 궁금해해야 하는 게 있습니까?”

말을 아끼던 준혁이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세라는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비틀어 올렸다.

제 말이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돌아가는 게 싫어서 대놓고 숨기는 게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으니까.

그런데 준혁은 시종일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알고도 이러는 건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지, 어느 쪽으로도 감이 오지 않았다.

세라는 티 나지 않게 이를 꽉 물었다.

시작부터 준혁에게 밀리고 있다는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아쉬운 사람이 먼저 지고 들어가는 거라지만, 준혁에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 느낌까지 받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요. 궁금해 해야죠. 그래도 내가 정준혁 씨랑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예상한 것보다 더 바스러진 자존심에 세라가 준혁을 향해 치기를 부렸다.

준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거 아니지만, 그나마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게 썩 긍정적인 변화는 아닐 텐데도 세라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부산에서 알아듣게 얘기한 거 같은데.”

“…….”

“세상 물정 모르는 공주님으로 자란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머리가 나쁜 편인가 보네, 윤세라 씨.”

준혁은 비아냥대듯 말했다. 세라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세라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태어나 이런 취급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다니.

폭탄선언을 하러 온 것은 자신인데, 되레 자신이 폭탄선언을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라는 혼란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준혁이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쓸어내었다.

“내가 그날 왜 당신을 도와줬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내가 당신 와이프…….”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당신을 내 와이프라고 생각했으면, 그 새끼 얼굴에 주먹이라도 내리꽂았겠지. 난 내 와이프 몸에 손대는 새끼 상대로 좋게 말로만 끝낼 만큼 속 좋은 신사가 아니야.”

준혁이 매섭게 일갈했다.

세라는 준혁의 아우라에 순식간에 압도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가 싶었는데, 하나 확실해진 건 정준혁이 가짜 신부 신연희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거였다.

뭐 하나라도 확실해졌으니 그만큼은 쉬워져야 했다. 그런데 세라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기 전보다 더욱 혼란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제게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가 의문이었다.

상식적인 선으로는 왜 그런 짓을 벌인 건지를 물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 준혁의 태도는 그런 것쯤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는 듯했다.

세라는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힘주어 말아쥐었다.

시작부터 상황이 예상을 벗어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점점 더 그녀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너무 다른 길로 향하고 있었다.

세라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

“그날 나를 왜 도왔어요?”

“이유도 그날 이미 말한 것 같은데.”

“빙빙 돌리지 말고, 알아듣게 얘기해요.”

“하…….”

준혁이 한숨을 묵직하게 내뱉었다.

세라의 눈꺼풀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그날 자신을 왜 도왔냐고 묻는 것까지도 쉽지 않았다.

그 말은 머리가 나쁘단 소리를 듣고도 답을 알려달라고 물은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말에 돌아온 게 한숨이라니, 어떻게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제 인생에 이런 일은 없었다.

제게 머리가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나서기도 전에 그 무례를 응징하기 위해 제 집안에서 먼저 움직였다.

이 바닥에서 감히 윤세라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애당초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감히, 그런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는 건지.

세라는 태어나 처음 느껴본 모멸감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피곤해지는 게 싫어서 한 일이라고, 내가 그날 말 안 했습니까?”

준혁은 피로가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라의 낯빛이 시시각각 심상치 않게 변해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것까지 배려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그녀가 무작정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세라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연희를 제 곁에 둘 수 있는 명분을 만들 수 있던 거였으니까.

결혼식장에서 연희와 재회한 순간, 윤세라에게 한 번 빚진 셈 치자고 생각했다. 그러니 언젠가 그 빚을 갚을 일이 생긴다면 망설이지 말고 갚자고.

근데 오늘 대책 없이 찾아온 세라를 마주하고 나니 그 생각은 씻은 듯 사라졌다.

“윤세라 씨, 미안하지만 난 지금 윤세라 씨 대역으로 있는 사람과 아주 잘살고 있습니다.”

준혁은 자신의 의중을 돌리지 않고 직구로 던졌다.

삽시간에 세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세라는 못 들을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한껏 흥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말, 무슨 뜻으로 하는 거예요?”

“이 정도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결혼식장에 대역을 세운 건지…….”

준혁은 실소를 흘렸다. 대화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기가 막혔다.

세라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어리다는 생각까지 들고 나니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게 느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굳이 머리 복잡한 상황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준혁이 단호한 투로 말했다. 그럼에도 세라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만 했다.

준혁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가짜 신부 고용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사람치고는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어지간해선 좋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까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아마 그 짧은 생각으로는 대역을 세워 나와 1년쯤 살고 이혼할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난 윤세라 씨와 이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

“지금 대역을 대신해 윤세라 씨랑 살 생각은 더더군다나 없고요.”

세라의 얼굴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윤세라와 이혼할 생각은 없으면서 진짜 윤세라와는 살 생각이 없다는 말이 뇌리를 뒤흔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제 인생을 통째로 빼앗긴 기분이었다.

당장 보이는 준혁의 표정만 보아도 그랬다.

지금의 상황을 피곤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 배제하면, 그는 무서울 정도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인생을 빼앗아 다른 여자에게 주겠단 말을 조금도 허투루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세라는 이가 달달 떨릴 지경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아닌 척하며 배짱을 부렸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집안 어른들 다 속이고 내 대역이랑 평생을 살겠다고?”

가까스로 전한 말이었다.

윤세라답게 당당함을 한껏 가장했는데, 준혁에겐 그게 조금도 먹히지 않은 것 같다.

한쪽으로 비틀려 올라가기 시작한 그의 미소에 세라는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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