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남편 좀 만나러 왔는데.
“흐읏.”
연희의 잇새로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연희는 목덜미에서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한 열감을 느끼며 준혁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수줍은 열꽃이 피어났다. 그게 못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몸을 배배 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밀어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의 입술과 혀가 만들어내는 길을 따라 잠들어 있던 감각이 선명하게 깨어났다.
그의 숨결만으로도 온몸이 간지러웠고,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진작부터 들끓기 시작한 열기는 감당할 수 없을 지점까지 끓어 올랐고, 사그라질 줄 모르는 쾌감에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또 좋았다.
준혁의 품에 안길 때면 늘 이랬다.
이율배반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고 감당하기 힘든 감각들은 온몸을 터트릴 것처럼 부피를 키우다 이내 폭발하듯 사라졌다.
그러고 나면 멈추지 않는 그의 손길에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은 그가 나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 때까지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그때쯤이 되면 연희는 실신 직전의 상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손길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힘들긴 해도 그가 이렇듯 몰아붙일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무너져야 하는 품이 신연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정준혁의 품 안이라 연희는 그것까지도 기꺼웠다.
“하, 못 참겠다.”
새하얀 살갗을 빈틈없이 머금고 빨아대던 준혁이 거친 음성으로 그르렁댔다.
연희는 어느덧 땀에 젖은 준혁의 머리칼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곤 그가 방심한 틈을 타 힘주어 가슴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준혁의 몸이 침대 위로 떨어졌고, 우위를 점령한 건 연희가 되었다.
연희는 탄탄한 배 위에 올라앉아 준혁의 가슴을 손으로 짚어 중심을 잡았다.
폭신한 엉덩이 아래로 단단하게 일어선 그가 느껴졌다.
연희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골반을 움직였다.
“윽.”
준혁의 잇새로 단말마 같은 신음이 묵직하게 터져 나왔다.
미간을 좁힌 그가 매서운 눈길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그 시선을 올곧게 마주했다. 그러곤 조금 전보다 더 큰 움직임으로 허리를 놀렸다.
준혁이 아랫입술을 거세게 물었다. 그 모습이 참기 힘든 듯 찌푸린 표정과 뒤섞이자 형언할 수 없는 관능미가 뿜어져 나왔다.
버틸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연희 역시 한계에 치달아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연희는 움직이던 허리를 멈추곤 흐트러진 잠옷을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그러곤 익숙한 손길로 준혁의 옷을 하나하나 벗겨냈다.
마침내 두 사람 모두 전라의 상태가 되었다.
연희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준혁을 빤히 응시하다 상체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말캉한 살덩이로 탄탄하게 균형 잡힌 그의 가슴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지그시 눈을 감자 준혁이 익숙한 손길로 자리를 찾더니 단숨에 좁은 틈을 가르고 들어왔다.
“으읏……!”
“하.”
쾌락으로 점철된 남녀의 신음이 끈적하게 뒤섞였다.
연희는 몇 번을 품어도 적응되지 않는 버거운 크기에 준혁의 어깨를 힘주어 잡곤 숨을 골랐다.
안정을 찾기 위해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그런데 그 행위가 되레 지나친 자극이 되었다.
연희는 강렬한 쾌감에 어쩔 줄 모르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겨우 붙잡고 있던 준혁의 인내가 끊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아읏, 주, 준혁아……!”
연희는 신음을 터트리며 애원하다시피 준혁에게 매달렸다.
본능이나 다름없이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쉴 새 없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고작 시작일 뿐인데 자지러질 듯한 불꽃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갔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온종일 두서없이 떠올라 복잡하기만 하던 생각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오로지 준혁만이 뇌리에 가득했다.
그가 주는 쾌감만으로도 이미 과부하가 올 지경이었다.
위태롭게 흔들리던 연희의 몸이 오래 지나지 않아 침대 위로 낙하했다.
연희는 꼭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땀으로 흥건한 준혁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그는 여전히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있었다. 어찌나 힘주어 물고 있는지 곧 여린 살이 터지고 피가 맺힐 것 같았다.
연희는 그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마법처럼 그가 물고 있던 입술을 놓고 연희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격정적이던 움직임이 속도를 늦추다 못해 감칠맛 날 정도로 느른하게 굴었다.
감당하기 힘들단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안달이 났다.
연희는 허공을 헤매던 다리에 힘을 주어 준혁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가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살을 치받는 소리가 야하게 귓속을 파고들었고, 그에 입에 물린 손가락은 애가 탈 정도로 간지러웠다.
잠깐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연희는 그나마 자유롭게 남아 있는 손을 들어 준혁을 꽉 끌어안았다.
절정의 순간까진 금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래던 움직임에 더욱 박차를 가했고, 이내 응축되었던 감각이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연희는 무너져 내린 준혁의 머리칼을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귓가에 흩뿌려지는 거친 숨소리가 그의 만족도를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자 잠시나마 잊었던 생각들이 하나둘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쿵 뛸 때마다 눈가에 열기가 모이고 코끝이 시큰거렸다.
여전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연희와 정준혁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신연희와 정준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위태롭게 맺혀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애절하게 흘러내렸다.
연희는 밀려 올라오는 한숨을 최선을 다해 삼켜냈다.
거칠던 준혁의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마 조금 후면 그의 달콤한 고백이 귓속을 파고들 것이다.
“사랑해, 연희야.”
이번에도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10년 전처럼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었다.
나도 사랑해, 준혁아.
그러나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
그게 못내 가슴에 사무쳐서, 연희는 눈을 꼭 감았다.
***
유난히도 날이 좋았다.
세라는 높게 솟은 백화점 건물을 바라보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눈동자에 다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건물의 꼭대기엔 알파벳 H와 N이 나란하게 박혀있었다.
“내 발로 여기까지 찾아올 줄이야.”
세라는 그 로고를 빤히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녀의 머릿속에 HN그룹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제 이름 석 자가 HN 일가의 일원이 되었다는 기사에 박혀 셀 수도 없이 쏟아졌지만, 그저 타인의 일인 양 신경도 쓰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결혼이었다.
HN그룹에 대한 거부감도, 제 남편인 정준혁을 향한 거부감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감정도 없는 남자와 어느 날 갑자기 부부가 되고 평생을 약속했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정략결혼이란 태어난 순간부터 제 인생의 한 부분으로 정해진 당연한 절차라는 걸 어린 시절부터 인지하고 있었는데도 그랬다.
“꼴이 좀 우스워지긴 하겠네.”
세라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중얼거렸다.
이곳으로 오기까지 며칠 동안이나 부산의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신연희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를 뜬금없이 부산 호텔에서 마주했는데, 정준혁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고마워 할 필요 없습니다. 그쪽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피곤해지는 게 싫어서 한 일이니까.’
고맙단 말에 돌아온 그의 대답만 보아도 그랬다. 누가 봐도 처음 보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럴 것이 아니라 놀라야 맞았다.
서울에 있어야 할 그가 부산에 나타난 이유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출장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윤세라인 줄 알고 있을 신연희와 오전에 신혼집에서 헤어졌다는 건데, 그날 저녁 윤세라가 뜬금없이 부산에 나타났으니 놀라다 못해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다그치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설마 정준혁이 신연희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연희에게 먼저 연락을 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러기엔 부산에서 보았던 준혁의 모습이 세라의 흥미를 크게 자극하고 말았다.
세라는 벗었던 선글라스를 다시 끼곤 미소를 감아올렸다.
어쩐지 대역에게 맡긴 제자리가 찾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강하게 밀려왔다.
***
또각, 또각.
새빨간 구두가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세라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대표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단정하게 맞물려있던 문을 열고 한 발 내디뎠다. 굽 소리 때문인지 업무에 몰두하고 있던 비서팀 직원들의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세라는 당황한 척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태연한 얼굴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곤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는 준혁의 최측근 비서를 찾아 눈동자를 굴렸다.
목적을 이루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놀란 듯한 얼굴을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세라는 그 앞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러곤 해맑은 미소와 함께 물었다.
“남편 좀 만나러 왔는데. 안에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