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6)화 (16/80)
  • 16. 뜨겁게 안기고 싶었다.

    새벽이 깊어가는 시각.

    준혁은 한산한 고속도로 위를 위험한 속도로 질주했다.

    ‘김 비서, 자고 있던 것 같은데 미안합니다.’

    -아, 아닙니다, 대표님.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일이 있어서 먼저 서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개인적인 일정이니 김 비서는 신경 쓸 것 없고, 오늘 밤은 푹 쉬었다가 예정대로 내일 오전에 복귀하세요.’

    -네? 대표님, 갑자기 그게 무슨……!

    ‘아, 차는 내가 지금 서울로 가져갈 겁니다. 미안하지만, 김 비서는 내일 KTX를 이용해야겠어요.’

    -대표님! 대표님!!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건 건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김 비서가 퍽 당황스러운 투로 갈급히 불러왔지만, 그즈음엔 준혁 역시 인내가 바닥나고 없었다.

    본분을 다한 핸드폰은 그대로 재킷 주머니에 처박혔다.

    준혁은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길목에서 누군가 알은척하며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보고 싶어, 준혁아.

    ‘…….’

    -너무, 보고 싶어…….

    어딘지 모르게 물기로 가득한 것 같던 연희의 목소리만이 그의 귓가에서 내도록 뎅뎅거리며 울렸다.

    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침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여전히 한산한 고속도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습관처럼 시간을 힐끔 살폈다.

    [02:37]

    전화를 끊고 곧장 출발해 미친 듯이 속력을 냈는데도 3시간을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3시간 반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닌데, 준혁은 초조하기만 했다.

    보고 싶다는 연희의 달콤한 고백이 혹 10년 전처럼 끔찍한 이별의 전조는 아닐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을 쉬이 떨칠 수가 없었다.

    그저 일단은 연희를 직접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제 두 눈에 연희를 가득 담고, 품 안에 가둬 그녀의 체취를 폐부에 한껏 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준혁은 오로지 그 일념만으로 액셀 위에 올려둔 발끝에 힘을 주었다.

    ***

    “후우…….”

    두 시간이 넘도록 뒤척거리던 연희가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시간을 살피자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뒤척거리다가도 잠에 빠졌을 시간인데, 오늘은 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

    연희는 말없이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는 준혁의 자리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잤으면 얼마나 잤다고 적응하지 못하는 건지, 그런 스스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어차피 언제가 됐든 떠나야 한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감정 같은 건 키우지 말자고.

    두 시간이 넘도록 자지도 못하며 생각한 게 그건데 여전히 연희의 마음은 준혁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정확한 목적지를 두고도 마음껏 달려갈 수 없는 감정을 컨트롤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피로했다.

    연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없던 두통이 다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집에 우유가 있던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릴 적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연정이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주곤 했다.

    그게 수면에 꽤 많은 도움이 됐던 게 떠올랐다.

    직접 장을 본 적이 없어 냉장고에 우유가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며 거실로 나가던 길.

    연희는 별안간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낯설지 않은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건 그녀가 기억하는 한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분명한데…….

    연희는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리를 움직였다.

    이 시간에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를 사람이 없었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라곤 저와 준혁이 다인데, 자신은 집 안에 있고 준혁은 지금 부산에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 시간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걸까.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땀이 삐질 흐르려던 찰나, 어둠을 뚫고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누구…….”

    익숙하다고 해도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는 건 아니라 누군지 물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짧은 질문을 할 새도 없이 입이 막히고 말았다.

    “으읍……!”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누군가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붙잡더니 단숨에 입술을 맞붙여 왔다.

    연희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체취가 콧속을 뚫고 들어왔다.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 건 마음이었고, 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한 건 온몸의 감각이었다.

    준혁이었다.

    볼을 쓰다듬는 손길, 잇새를 거칠게 파고드는 혀 놀림, 그리고.

    “하, 하아…….”

    “왜 불도 안 켜고 이러고 있어.”

    이마를 붙인 채 내뱉어진 숨소리와 말소리까지, 전부 준혁의 것이 분명했다.

    “왜, 어떻게……. 이 시간에, 어떻게 된 거야?”

    놀란 연희가 정돈되지 않은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대답 대신 자잘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쪽, 쪽, 쪽.

    힘주어 빨아들였다 놓아주는 소리가 제법 야하게 울렸다.

    연희는 제 볼을 감싸 쥔 준혁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속절없이 매달려야만 했다.

    가벼운 입맞춤은 진한 키스가 되었고,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던 몸은 어느덧 남자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닿아있었다.

    거침없이 파고든 혀는 잠자고 있던 살덩이를 일깨운 거로 모자라 입 안의 여린 살들을 찌르고 훑어내리며 예민하게 곤두서도록 만들었다.

    연희는 폭풍처럼 쏟아지는 키스가 버거웠지만, 한편으론 키스가 농밀해지면 농밀해질수록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걸 느꼈다.

    놀란 마음이나 그 탓에 백지장이 되어버린 머릿속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퍼부어대는 키스가 밤이 깊어가도록 잠 못 이루게 하던 외로움을 말끔하게 달래주는 것 같아서 연희는 준혁에게 더욱이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타액이 섞이는 질펀한 소리가 텅 빈 공간을 메우고 점점 더 거칠어지는 숨소리가 두 사람을 감싼 공기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온몸이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찰나에 입술이 떨어지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하, 하아…….”

    연희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준혁과 닿은 피부 곳곳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했다. 그런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분명 전화 통화를 나눌 때만 해도 그는 부산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제 눈앞에 나타나다니.

    연희는 혼란한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간은 고작 3초 남짓의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연희의 마음을 눈치챈 준혁이 입술을 움직였다.

    “보고, 싶다며.”

    “……응?”

    “보고 싶다고 했잖아, 네가.”

    연희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심이긴 했지만, 충동적인 말일 뿐이었다.

    이 늦은 새벽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려와달라고 뱉은 말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준혁은 그런 연희와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통 받아들이지 못하는 연희와 달리 준혁은 조금도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내일까지 버틸 수 있겠어.”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설마 그 말 때문에 이 새벽에 달려온 거야?”

    연희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부디 준혁이 아니라고, 이 시간에 이렇듯 눈앞에 나타난 것이 그 말 때문은 아니라고 대답하길 바랐다.

    만약 그의 입에서 그렇단 말이 나온다면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도 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보고 싶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준혁이 답지 않게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연희는 그 짧은 순간이 못내 긴장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준혁의 말은 연희에게 뒤늦은 깨달음만을 안겨주었다.

    “그 말을 한 게 너라서 달려온 거야.”

    연희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한 파급력을 가진 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동치던 감정이 더욱이 넘실거리며 연희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가슴이 미친 듯 쿵쾅거리고 눈가로 열감이 빠르게 몰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준혁은 어느 때보다 진중한 눈길을 보내며 붙잡고 있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연희는 혼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준혁과의 거리는 좁혀선 안 되었다.

    1년 후의 그를 위해서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정준혁과 신연희 사이엔 명확한 선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그 생각을 했고, 나름대로는 거리를 두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지금처럼 맹목적인 다정함을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제라도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았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보고 싶다는 말이나 해버린 주제지만,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몇 번이고 선을 두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그게 연희가 내린 답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 선을 둘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이 시간에 미친놈처럼 부산에서 서울까지 미친 듯이 밟아댄 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시종일관 이토록 다정하고 따뜻한데.

    “내가 더 보고 싶어서 그런 거 같다.”

    자신을 향한 말 중 가슴을 파고들지 않는 것이 없는데.

    “신연희, 보고 싶어서 정말…….”

    연희는 준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곤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더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미 그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 있기에.

    그러니 이 순간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에게, 뜨겁게 안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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