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5)화 (15/80)

15. 보고 싶어, 준혁아.

“하아…….”

연희는 막 준혁과의 신혼집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요 며칠 왜 이렇게도 피로감이 밀려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세라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건 사고가 쉴 새 없이 들이닥쳤으니 그럴 만도 했나.

연희는 소파에 털썩 소리가 나게 앉으며 힘없이 입술을 당겨 올렸다.

뻑뻑한 눈을 굴리며 눈꺼풀을 한 번 들썩이곤 습관처럼 시간을 살폈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었다.

“꽤 오래 있긴 했네.”

오랜만에 마음 편히 연정에게 다녀온 길이었다. 이른 아침 준혁이 부산으로 출장을 떠난 덕이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연정과 긴 시간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막상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음이 헛헛했다. 가슴속에 내리 들어차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확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연희는 무섭게 조용한 집 안을 휘이 둘러봤다.

지금쯤 부산에 있을 준혁의 허상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저녁 먹자. 뭐 먹고 싶어?’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준혁이 줄곧 건네던 말이었다.

그 말을 고작 세 번이나 들었을까.

문제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준혁과 이 집에서 지낸 게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였다.

첫날은 강원도 별장에서 함께 돌아와 피로에 지쳐 잠들기 바빴고, 둘째 날은 정 회장 내외를 만나고 왔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던 이틀을 제외하곤 매일 저녁마다 준혁이 그렇게 물어왔던 거다.

“……김치찌개.”

연희가 중얼거렸다.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 준혁아.”

준혁이 집을 비운 건 고작 오늘 하루일 뿐이었다. 그런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움이 밀려왔다.

연희는 소파 위로 다리를 올려 끌어안았다.

사실 계속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원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팔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마음이 불편했던 적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며칠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괴로웠다.

‘나, 그 돈 받고 싶어, 준혁아.’

그 말을 했던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응. 도와줘, 준혁아.’

‘…….’

‘나 네 옆에 있고 싶어. 윤세라가 준다고 한 그 돈.’

‘…….’

‘꼭 받고 싶어.’

자신을 윤세라인 줄로만 아는 정 회장의 태도에 감정이 비틀려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서 준혁이 그 말에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했다.

내 마음이 아파서, 내 가슴에 난 상처가 너무 따끔거려서. 나만 아픈 게 싫어서. 내가 아픈 만큼 그의 부친도 아팠으면 해서.

준혁을 아프게 하는 게 정 회장의 마음도 아프게 만드는 일인 것 같아서.

결국 정 회장을 향한 감정의 불똥이 준혁에게 튄 셈이었다.

말을 뱉는 내내 해선 안 되는 말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끝끝내 멈추지 못했다. 그럴 거면 후회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준혁의 마지막 표정을 본 순간 후회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걱정 마.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테니까.’

그 말을 하던 순간에 준혁은 웃고 있었다.

마치 한껏 상처받은 자신을 위로해주려는 것처럼 전에 없이 다정한 미소였다.

그런데 그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연희의 심장에 그대로 박히고 말았다.

준혁은 절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신연희보다 신연희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건 재고의 여지도 없이 정준혁일 테니까.

토악질하고 난 후의 제 표정만 보고도 이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마큼 상처를 받았는지 다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준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된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 분명했다.

준혁은 제게 대답한 것처럼 반드시 기필코 그렇게 해줄 것이다.

세라에게 잔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고, 그 과정에서는 물론 그 돈을 받게 해주고 나서도 이기심에 그런 말을 한 자신을 잠깐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사흘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준혁은 상처받은 마음에 대한 토로는커녕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대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정하게, 자상하게.

신연희가 정준혁의 곁에만 있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다고 했던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거란 걸 매 순간 온몸으로 알렸고, 증명했다.

정준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런 남자였다.

그리고 준혁이 그런 남자란 사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연희는 그래서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하아…….”

연희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만 준혁의 잔상이 짙어졌다. 그럴수록 그를 향한 죄책감은 물론 그리움의 크기까지 커져 갔다.

한참을 소파를 떠나지 않던 연희가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홀린 듯 움직였다.

걸음을 멈춘 곳은 준혁의 서재였다.

연희는 매일 밤 잔업무 때문에 서재로 향하던 준혁의 모습을 떠올리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기 무섭게 준혁의 책상 위에 놓인 물건 하나가 연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연희는 말없이 물건을 손에 쥐었다.

“이걸 어떻게…….”

10년 전 제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토록 뜨겁게 사랑했던 사이였으니 제 사진 한 장쯤 가지고 있는 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놀라는 건 사진에 담겨 있는 모습이 준혁에게 보인 적 없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연희는 한참이나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다고 한들 없던 기억이 생겨나는 것도 아닌데 골똘히도 생각했다.

집 안의 정적이 깨어진 건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잠잠하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란 연희가 어깨를 움츠리다가도 재빨리 액정을 살폈다.

시선 끝에 닿은 이름이 그렇지 않아도 조급한 연희의 마음을 더욱 갈급해지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다급히 통화 아이콘을 눌러놓고 정작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연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오길 바랐다.

-나야.

기다렸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나 단조로운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준혁의 목소리라서 연희는 조금 전까지 느끼던 외로움 같은 건 순식간에 잊을 수 있었다.

“응. 알아.”

-뭐 하고 있어?

준혁이 어렵지 않은 질문을 건네왔다. 그런데 연희는 그 쉬운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엄지로 살살 쓸었다.

마음 같아선, 서재에 들어왔다가 책상 위에 있는 제 사진을 보고 도대체 이 사진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건지 고민하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러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이 문제의 답을 묻고 싶었다.

“…….”

하지만 연희는 차마 입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겐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랄 게 없었다.

“그냥 있었어.”

한참 만에 한 대답치곤 성의가 없었다. 그런데도 준혁은 한 마디 타박도 하지 않았다.

-저녁은 먹었어?

도리어 이 밤늦은 시각에 연희를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 다정한 배려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게 자꾸만 연희의 마음을 몽글거리게 했다.

“…….”

연희는 아랫입술을 힘껏 물었다.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윤세라의 대역으로 준혁을 재회했을 때 너무 당황스러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인연이기에 이렇게 다시 만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정준혁과 신연희의 끝은 헤어짐일 거란 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던 거였고, 자신은 그 신부를 대신했던 것뿐이니까.

결혼식에 참석한 내빈들은 물론 정준혁, 신연희, 윤세라를 제외한 이 나라의 국민들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날 평생을 약속한 신랑 신부는 정준혁과 윤세라라고.

잠깐의 눈속임이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평생을 윤세라로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만 보아도 신연희는 언젠가 이 그림에서 사라져줘야 하는 사람이었다.

정준혁이 아무리 집착하며 붙잡는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준혁에게 상처 주었던 이유는 단순히 정 회장 때문에 비틀린 감정을 표현한 것뿐만 아니라 신연희의 역할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저 사라져주면 되는 여자라는 사실이 서글펐던 걸지도 몰랐다.

그 사실은 아무리 가슴을 부여잡고 아파한다고 해도 절대 변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자신은 제 역할을 다 해내고 나면 10년 전 그때처럼 정준혁의 인생에서 원래부터 없던 사람인 것처럼 말끔하게 지워져야 할 것이다.

사라져야 할 언젠가를 생각해서라도 준혁에겐 윤세라의 돈을 받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여자, 그 선을 지켜야 했다.

더는 감정에 잡아먹혀선 안 되었다.

그러나…….

“……보고 싶어, 준혁아.”

이미 자각한 감정을 외면하는 게 어떻게 노력해도 되지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어…….”

정말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불과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짙은 그리움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10년간 외면했던 그리움이 한 번에 몰아닥치는 것처럼 도통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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