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4)화 (14/80)

14. 깨닫지 말았어야 할 감정

“조용히 안 해? 눈웃음치고 꼬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빼고 지랄이야!”

“미친 새끼. 너 거울 안 보고 사니? 누가 누굴 보고 눈웃음을 쳤다고……!”

눈에 뵈는 거 없이 악을 지르던 세라가 불현듯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열렸는지도 모를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인 얼굴은 낯설지 않은 사람의 것이었다.

순간 세라의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제 손목을 우악스럽게도 쥐고 있는 무례한 남자는 어떻게 생각해도 제힘으론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누구든 저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보단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여러모로 깔끔했다.

“이, 이봐요! 정준혁 씨!”

소리를 치는 순간엔 준혁과의 결혼식에 신연희를 대신 신부로 세웠다는 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일단은 이 상황을 피하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있는 힘껏 소리친 게 무색하도록 엘리베이터 문은 착실하게 닫혔고 더 이상 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세라는 본능이나 다름없이 미간을 구겼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며 좋을지,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기만 했다.

여유롭게 술이 한잔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호텔 바를 찾은 건데 이런 일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하필 이 비서를 먼저 올려보낸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지금이라도 이 비서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

그러나 그것도 지금으로선 가능한 해결법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려면 그것까진 문제 될 게 없지만, 제 손목을 쥐고 있는 남자가 자신이 어디론가 전화 거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세라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평생을 보호만 받고 살았던 터라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을 대처하는 데에는 익숙하지가 않았다.

늘 자신이 해결하기도 전에 알아서 상황정리가 되었으니 이런 걸 경험해 볼 새가 없었다.

어떡하지. 정말 이대로 이 기름진 돼지에게 끌려가 나쁜 일이라도 당하게 되는 건가.

머릿속으로 최악의 그림들만이 좌르륵 나열되었다. 밀려오는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거기서 뭐 합니까.”

닫힌 줄로만 알았던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리고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게, 그러니까…….”

세라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낯선 남자에게 힘으로 제압을 당했다는 두려움과, 스쳐 지난 줄로만 알았던 정준혁이 다시 나타났다는 안도감.

극과 극인 두 감정 사이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쪽으로 와요.”

그 찰나 준혁이 세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내린 한 줄기 빛이란 게 과연 이런 걸까.

세라는 마치 광명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단박에 발끝으로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준혁에게 단 한 걸음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읏.”

세라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붙잡힌 손목으로 더욱 강한 힘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너, 뭐야. 이 새끼야! 나랑 같이 올라가고 있는 거 안 보여?!”

세라의 손목을 붙잡은 남자가 인상을 팍 구기곤 준혁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뒷골목 양아치 같은 모습이긴 했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겁을 먹기에 충분한 행태였다.

그게 준혁의 눈엔 그저 같잖아 보인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내 눈엔 당신이 강제로 끌고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준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럼에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반쯤 기울인 모습은 뒷골목 양아치와는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뭐, 뭘 안다고 지껄여? 형씨는 형씨 볼일이나 봐. 우리는 우리 볼일 볼 테니까!”

설명할 수 없는 아우라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건지 무뢰한이 말까지 더듬으며 기세를 한 풀 꺾었다. 본능적으로 강자를 알아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서도 붙잡고 있는 세라의 손목은 고집스럽게도 놓지 않았다.

준혁은 목 끝까지 한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타인의 일에 끼어드는 건 딱 질색이었다.

약자를 향한 정의감? 그런 건 살면서 한순간도 가져본 적 없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을 선뜻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껏 그래왔듯 신연희, 그녀 때문이었다.

“두 번 말 안 하니까 똑바로 들어.”

“…….”

“지금 그 손 놓고 네 갈 길 가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지 않고 내 말을 무시한다면, 아마 당신은 30분쯤 후에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 있게 될 거고, 내 변호사를 만나게 되겠지.”

준혁이 무섭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남자를 향한 말소리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

곁에 서 있는 세라가 움찔 몸을 떨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준혁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이제야 겨우 손에 쥔 참이었다.

10년을 신연희 하나 찾겠다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며 부친의 발아래 납작 엎드려 살았다.

연희를 찾겠단 생각이 없었다면 절대 존재하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윤세라는 지금껏 그랬듯 신연희의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살아야 했다.

그 누구도 연희의 정체를 알 수 없도록.

그 생각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준혁의 표정은 더욱 무섭게 가라앉았다.

“성폭행까진 아니더라도 성폭행 미수나 성추행 정도는 충분히 엮을 수 있을 것 같은데.”

“…….”

“그랬을 때 당신한테 떨어질 형량이 어느 정도일지, 계산은 돼?”

“지금 뭐, 뭐라는 거야!”

남자의 반응에 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이쯤이면 겁먹고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한 그림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겁먹은 얼굴을 하고서도 자존심 때문인지 선뜻 물러나지 못했다.

준혁은 슬슬 피로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의감은 없어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타입은 질색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딱 그랬다.

거기에 더해 더욱 최악인 건 말귀까지 못 알아듣는 머저리란 거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제 딴에 부린 오지랖 같은 매너는 필요하지 않았다.

준혁은 머리를 거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스란히 입 안에 담았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

“…….”

“네 인생 엿 같아지기 전에 그 손 놓고 도망가라고.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효과는 톡톡했다.

줄곧 겁먹은 얼굴을 하던 남자가 이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세라의 손목을 패대기치듯 놓았다.

“하!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에잇, 퉷!!”

그런 와중에도 끝끝내 자존심은 포기할 수 없는지 허풍 떨 듯 큰소리를 쳤다.

준혁은 마지막까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남자는 누구 봐도 강자에게 압도당한 쥐새끼 같은 몰골로 준혁의 시야 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팔짱을 푼 준혁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떼었다.

세라는 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설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가 걸음을 뻗은 방향은 엘리베이터 안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또 다른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준혁의 모습에 세라는 이끌리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러곤 준혁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저, 저기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빠르게 교차하던 준혁의 다리가 우뚝 멈추었다.

세라는 뒤늦게 아차 싶어 눈을 크게 떴다. 본능에 앞서 부르긴 불렀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의아했다.

왜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걸까.

“도와준 건 고, 고마워요.”

일단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방금 전의 상황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

그런데도 준혁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는 것도 아니었다.

세라는 그렇지 않아도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긴장감이 더욱 커지는 기분이었다.

미동도 없는 뒷모습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근사하기만 했다.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자 그를 처음 보았던 순간에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단숨에 온몸의 세포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세라는 이 기분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확실한 건 어쩐지 깨닫지 말았어야 할 부류의 감정인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혼란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일 것 같지 않던 남자가 천천히 얼굴을 드러냈다.

“고마워 할 필요 없습니다. 그쪽 도와주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피곤해지는 게 싫어서 한 일이니까.”

곧장 내리꽂힌 남자의 시선은 무감하기 그지없었다. 귀를 찌르고 들어온 목소리 역시 한껏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세라는 준혁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라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땐 준혁이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후였다.

그제야 긴장이라도 풀린 건지 비틀거리던 세라가 벽을 짚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별안간에 두통이 밀려왔다.

상상해 본 적 없던 고민거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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