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똑같은 얼굴의 여자
“우욱……!”
연희는 집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성북동 저택에서 먹은 음식이 전부 얹히기라도 한 건지,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긴장이 풀리며 토악질이 밀려왔다.
“하아, 윽…….”
무섭게 밀려오던 구역질이 잦아들고 나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연희는 변기를 붙잡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연희야, 괜찮아?”
걱정으로 가득 밴 준혁의 목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연희는 급히 레버를 아래로 내렸다.
“응, 나 괜찮아. 금방 나갈게. 잠깐만.”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 안까지 말끔하게 헹궜지만, 여전히 속은 답답하기만 했다.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생기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저녁 식사 같이한 일로 이렇게까지 질려버렸는데, 앞으로 1년을 어떻게 버티려고 이러는 건지.
유약하기만 한 자신이 한심해서 결국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꽉 닫혀있던 문이 참지 못하고 열린 건 그때였다.
“연희야.”
연희는 입가에 묻은 물을 손으로 훔쳐내곤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거울로 보았던 제 얼굴보다 더욱 하얗게 질린 준혁의 얼굴이 보였다.
연희는 힘없이 입술을 당겨 올렸다. 그러자 준혁이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들었지.”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가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뻣뻣하게 굳었던 연희의 몸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연희는 숨길 생각도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준혁의 어깨에 닿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조금.”
준혁에게까지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곤 준혁이 전부였으니까.
“잘 견뎠어. 아버지 눈치가 백 단인 분이라 속이기 쉽지 않은데, 아무 의심 없는 눈치시더라.”
위로 아닌 위로의 말에 연희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 윤세라를 대신한 결혼식장에서 남편으로 만난 게 준혁이어서,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생전 처음 보는 남자를 남편으로 대하며 1년의 신혼생활을 버텨야 하는 거였다.
그런 와중에 지금처럼 정 회장 같은 시부까지 있었다면,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아니, 매분 매초가 지옥이나 못해 고역이었을 것 같다.
남편 된 사람과 시부모님을 속여야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날이 거듭된다면 1년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연정에게는 점점 소원해졌을 것이고, 어느 순간 그걸 알아챘을 땐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한 건지 자괴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리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예견되는 일들인데, 왜 세라를 처음 만난 그날엔 이렇게 될 걸 알지 못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5억이 걸린 일인데, 어떤 일인들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날 때부터 가진 거라곤 제 몸 하나가 전부인 신연희가 그런 현실의 생태에 대해 몰랐을 리 없었다.
머리로 인식하지 않아도 몸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엔 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정말로 간절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돈이 뭐라고.
“준혁아.”
“응, 연희야.”
“나 사실 윤세라 씨한테 돈 받고 대신 결혼한 거야.”
연희는 담담한 말씨로 중얼거렸다. 결혼식장에서 재회한 이후로 준혁에게 설명한 적 없는 가짜 신부 사건의 전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마 준혁은 이미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식장에 나타날 게 자신이란 걸 알고 있던 거로도 모자라 세라와 접촉했다는 건 물론 연정까지 알고 있는데, 그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것이 있긴 할까 싶었다.
그래도 이야기해야 했다.
이렇게 된 거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하고 꼭 세라에게 남은 돈까지 받고 싶었다.
그 돈으로 꼭 연정의 병도 치료하고, 연정에게 남은 생은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윤세라와의 계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1년 동안 결혼 생활 유지하면, 돈 더 준다고 했어. 나…….”
불현듯 연희는 말을 멈추곤 준혁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선뜻 말이 나오진 않았다.
자신이 내뱉게 될 말이 결국 준혁에게 또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그 돈 받고 싶어, 준혁아.”
그런데도 기어이 내뱉었다.
“……그래.”
준혁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연희는 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순간도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 시선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집요할 정도로 눈길을 얽었고 애절하게 붙잡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건 그게 뭐든 다 해줄게.”
“…….”
“네가 내 옆에만 있어 준다면, 난 그게 뭐든 다 해.”
연희는 입 안쪽 여린 살을 꽉 물었다. 탁하게 가라앉은 준혁의 눈동자가 정확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게 꼭 상처받은 어린 양의 모습 같았다.
“응. 도와줘, 준혁아.”
제 대답이 또다시 준혁에게 상처가 될 걸 알았다. 그러나 알은척하고 싶지 않았다.
‘허허, 녀석. 못 보던 사이에 없던 넉살이 다 생겼구나. 이래서 집안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게야.’
성북동 집에서 줄곧 자신을 괴롭혔던 정 회장의 말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더듬을 때마다 생채기가 난 가슴이 무척이나 따끔거렸다.
한껏 비틀린 마음이 자꾸만 입술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 네 옆에 있고 싶어. 윤세라가 준다고 한 그 돈.”
“…….”
“꼭 받고 싶어.”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연희는 그 감정을 끝끝내 외면하며 준혁을 응시했다.
그에게 돌아올 대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걱정 마. 네가 원하는 건 다 해줄 테니까.”
역시 예외란 없었다.
***
준혁은 철거를 마친 부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부지 매수는 거의 막바지 단계라고 알고 있는데, 차질 없겠습니까?”
“네, 대표님. 부지 소유주들과의 협의는 진작에 끝난 상황이고, 보름 정도면 깔끔하게 정리될 것 같습니다.”
준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HN백화점 대표로 취임하게 된 건 그의 계획에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전 대표였던 전문경영인인 박 대표가 간간이 잡음을 낸다는 사실을 알고 눈여겨보아야겠단 생각은 했지만, 크게 두각이 되는 문제는 없었기에 뒷전으로 밀어두었다. 당장 그 문제까지 신경 쓰기엔 연희와 관련한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 잡음을 만들어내는 사람치고 뒤가 구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기어이 자금 횡령 사실이 들통났고, 박 대표는 곧장 구속되었다.
갑작스레 비어버린 자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준혁의 차지가 되었다.
말이 백화점 대표 자리이지 수년간 박 대표가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처리해야 하는 피곤한 자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준혁은 일언반구 불평불만도 없이 정 회장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그룹 회장이자 아버지의 지시이기에 군말 없이 받아들인 것도 있었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좋은 성과까지 보여준다면 위의 두 형을 제치고 차기 후계자로까지 거론될 수 있는 기회였다.
준혁의 목표는 거기까지였다.
모두를 제 발아래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누구의 위협도 없이 연희를 제 곁에 둘 수 있을 테니.
그러니 반드시 그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이만 호텔로 가죠.”
“네, 대표님.”
준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뒤를 돌았다.
오전부터 내리 이어진 부산에서의 빠듯한 일정으로 이미 진작부터 피로를 느끼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를 피곤하게 하는 건 일을 마치고 돌아가도 연희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준혁은 핸드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러곤 연희의 번호를 찾아 그 위를 지분거렸다.
“…….”
보고 싶다, 정말.
10년을 참았는데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난 기분이다.
준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핸드폰을 힘껏 움켜쥐었다.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연희에게 전화라도 걸 작정이었다.
***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가는 스케줄이니까 김 비서도 푹 쉬어요. 내일 아침에 봅시다.”
준혁은 프런트에서 받은 카드키를 손에 쥐곤 김 비서에게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김 비서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준혁은 고개를 한번 까닥이곤 곧장 뒤를 돌았다. 빠르게 내딛는 걸음걸이에 조급한 마음이 묻어났다. 이제 룸에 올라가기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준혁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두어 번 연달아 눌렀다. 손끝으로 초조함이 고스란하게 느껴졌다. 기다리던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도착하고 문이 열렸을 때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려던 준혁의 다리가 순간 머뭇거렸다.
“야, 이거 안 놔? 놔! 놓으라고!”
별안간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준혁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순식간에 준혁의 미간이 구겨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연희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