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2)화 (12/80)
  • 12. 제발 견뎌줘.

    “엄마, 말도 없이 나와서 미안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주스랑 먹을 것 산 건 마침 간병인 아주머니 만나서 아주머니한테 드렸어요. 조만간 또 들를게요.”

    연희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준혁을 흘긋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

    그는 핸들을 붙잡은 채 부지런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스레 긴장감이 몰려오는데, 그때 핸드폰 너머에서 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한텐 천천히 와도 되니까 당분간은 회사 일 끝나면 푹 쉬어. 얼굴이 정말 못 쓰겠더라.

    연정은 시종일관 자신의 걱정뿐이었다.

    그게 인사도 하고 나오지 못한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아버지가 같이 들르라고 하시는데, 신혼여행 다녀와서 한 번은 찾아뵙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그러겠다고 했어. 오늘 안 가면 불시에 너를 찾아가도 찾아가실 분이라.’

    한참을 준혁의 품에서 울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고 싶지 않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윤세라와 계약한 내용 안에 포함되어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오늘 가지 않으면 자신을 따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데, 그건 더욱이나 원치 않았다.

    “내 걱정은 말고 엄마 건강 회복하는 일만 생각해요. 급한 일 없으면 내일이라도 다시 갈 테니까 식사 잘 챙기시고. 알았죠?”

    -너야말로 엄마 걱정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알겠지?

    “알겠어요. 엄마 일단 나 이만 끊어야 될 거 같아요. 또 전화할게요.”

    연희는 통화를 갈무리하곤 핸드폰을 무릎 위로 내려놓았다.

    어색한 공기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연희는 괜스레 준혁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생각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그와 VIP 병동에서 마주한 이상 연정의 이야기를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고맙단 말은커녕 제대로 된 말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말없이 병실 옮겨서 미안해.”

    연희는 크게 뜬 눈으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니. 그는 도대체 무엇이 미안한 걸까.

    “그렇게 하겠다고 먼저 얘기하면 네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우선 그렇게 조치하라고 했어.”

    연희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고맙단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낼 염치가 없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준혁에게 일언반구 한마디도 없이 도망치듯 떠난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을 받기만 해도 되는 건지…….

    더욱이 말없이 병실을 옮겨 미안하다는 말까지도 제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연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니야. 고마워, 정말…….”

    겨우 마음을 전한 목소리엔 그간 묻어두고만 살았던 아련한 감정이 여기저기에 묻어나 있었다.

    계속 정속 주행을 하던 차가 그 순간 멈추었다. 마침 신호에 걸린 탓이었다.

    내내 정면만 향해있던 준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맙단 말 하지 마. 당연한 거니까.”

    연희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고 그것보다 더 익숙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준혁의 눈동자엔 언제나 자신만 담겨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깊고 진했다.

    “난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

    “그게 널 위한 거라면, 내가 못 할 일은 없으니까.”

    연희는 숨을 멈추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허풍처럼 들렸을 그 말이, 준혁의 입술 새로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척이나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세차게 뛰는 심장이 더욱 요동쳐댔다. 지금 준혁과 함께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까맣게 잊을 만큼.

    “곧 도착할 거야.”

    멈추었던 차가 다시 주행을 시작했다.

    연희의 손에 감싸여 있던 커다란 손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집요하게 얽어왔다.

    연희는 붙잡힌 손을 한 번 바라보곤 고개를 들었다.

    “웬만하면 네가 곤란해질 상황은 생기지 않도록 내가 잘 대처하겠지만, 그래도 긴장은 하는 게 좋아. 아버지는 나보다 더한 여우거든.”

    굳이 경고하지 않아도 충분히 긴장이 되었다.

    그걸 준혁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한 번 더 짚는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게 있을 터.

    연희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멎었던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속을 파고들었다.

    “넌 그냥 묵묵히 자리만 지켜. 저녁만 먹고 바로 나올 거니까, 그때까지만.”

    “…….”

    “그때까지만 제발 견뎌줘.”

    강요인지 애원인지 모를 말투는 신연희를 한정한 정준혁 특유의 말버릇이었다.

    그래서 연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준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제게 애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 그를 위해 버티고 견뎌볼 이유는 충분했다.

    연희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고급스러운 저택이 줄지어 있는 오르막길로 차가 들어서고 있었다.

    ***

    “어서 와요. 준혁이 너도 어서 와.”

    연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그러곤 허리를 공손하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최대한 차분하게 들리도록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준혁의 모친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연희의 속을 자못 쓰리게 만들었다.

    신연희에겐 소중한 사람들의 인생까지 전부 망가뜨리겠단 무시무시한 협박을 했던 집안인데, 윤세라에겐 이토록 호의적인 집안인 모양이었다.

    연희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적어도 지금은 속 편히 감상에나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준혁의 뒤를 따라 거실 중앙으로 향하자, 고풍스러운 소파 상석에 앉아있는 정 회장이 보였다.

    순간 연희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간 참 궁금도 했었다. 제게 그토록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도록 지시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양반일지.

    그러나 직접 마주한 정 회장은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이었다.

    눈을 마주한 것만으로 단번에 압도될 만큼 엄청난 아우라가 느껴졌다.

    “신혼여행이 제법 즐거웠던 모양이구나. 그래, 새아가도 재밌었니?”

    불시에 들려온 정 회장의 목소리가 정확히 연희를 향했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잔뜩 긴장한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곤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냈다.

    “……네, 아버님.”

    짧은 대답만 남기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잔뜩 긴장한 속내를 단박에 들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래로 늘어뜨린 손끝이 눈치도 없이 자꾸만 바들거렸다. 뿐만 아니라 조금만 힘을 풀어도 온몸이 달달 떨릴 것 같았다.

    연희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내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준혁이 앞을 가로막더니 뒷짐 진 손으로 제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정 회장의 목소리가 연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래? 얼굴은 영 아닌 것 같은데.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게야? 며칠 사이에 세라 안색이 못 쓰게 생겼구나.”

    순간 화들짝 놀란 연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곤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준혁에게 가려 당황한 얼굴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지만, 정신이 다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사이 연희의 상태를 눈치챈 준혁이 능숙하게 대답을 가로챘다.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런지 잘 못 자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컨디션 별로라길래 다음으로 약속을 미루자니까, 아무리 그래도 어른들이랑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부득불 우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왔습니다.”

    “허허, 녀석. 못 보던 사이에 없던 넉살이 다 생겼구나. 이래서 집안에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게야.”

    기꺼운 기색이 가득한 말소리 뒤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연희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사람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정 회장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전에서 울려댔다.

    신연희에게는 연애조차 허락이 되지 않았는데, 윤세라는 결혼은 물론 이토록 호인으로 대접받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 건지.

    그 이유를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서 연희는 속이 쓰렸다.

    불현듯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제 손을 잡고 있는 준혁의 손등이 보였다.

    그게 위로의 의미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그의 온기도 위로가 되질 못 했다.

    정 회장의 말이 자꾸만 반복 재생되어 귓가를 울렸다.

    연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

    “부산 분점 문제는 계획대로 잘 추진되고 있겠지?”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연희는 밥알을 씹고 있던 것도 잊고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지 확인하러 직접 내려가 볼 생각입니다.”

    사무적인 준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위압적인 정 회장의 모습쯤이야 익숙하다는 듯 무척 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연희는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좋은 생각이다. 분점 문제는 아랫사람들 통해 보고받는 것보단 네가 직접 움직이는 게 나을 거야. 시간 오래 끌 것 없으니 최대한 빨리 출장 일정 잡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연희는 다시 젓가락을 쥘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모습이었다.

    천하의 정준혁도 꼼짝 못 하는 걸 보니 HN그룹의 수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준혁의 대답 이후 다시 조용한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연희는 제 앞에 놓인 밥그릇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제 몫으로 놓인 밥의 절반은 비운 상태고 분명 준혁이 저녁만 먹고 일어날 거라고 했으니 조금만 더 버티면 되었다.

    그런데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이 이토록 힘겹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이래서 준혁이 그렇게 말했던 모양이다.

    제발 견뎌달라고.

    도대체 준혁은 평생을 어떻게 버틴 걸까.

    고작 저녁상만 함께할 뿐인 자신은 1분 1초가 숨이 막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는 평생을 무슨 생각으로 버텨낸 것일까.

    속사정은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지만, 어쩐지 그가 왜 집안에 대해 함구했던 건지 이해가 될 것도 같았다.

    “허허, 그나저나 우리 세라가 섭섭하겠어.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출장 때문에 집 비울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난데없이 정 회장의 말이 연희를 향했다.

    연희는 어깨를 바르작거리다가도 금세 놀란 표정을 지워냈다.

    “아니에요, 아버님. 일 때문인데 당연히 이해해야죠.”

    여유로운 척 미소까지 감아올렸다. 어쩐지 세라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았다.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정 회장의 입가로 미소가 감겼다.

    “세라가 그렇게 이해해준다니, 그룹 회장으로서의 미안함은 덜 수 있겠구나. 그래도 시아비로서의 미안함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테니 준혁이 놈 출장 가서 적적하거나 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놀러 와. 우리 세라라면 내가 언제든 맛있는 식사 대접할 테니까.”

    연희는 대답 대신 반달 모양으로 눈매를 접었다. 오래가지 않아 정 회장의 시선이 떨어졌다. 그제야 참았던 한숨을 옅게 내쉬었다.

    정말이지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간절히 바라건대, 한시라도 빨리 준혁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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