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1)화 (11/80)

11. 안아줄 사람 나타났잖아.

연희는 다급하게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쯤은 종일 침대에 누워 쉬어야겠다고 다짐한 게 무색하도록 다리가 움직였다.

-그게 말이다……. 일주일쯤 전에 갑자기 VIP 병동으로 병실이 바뀌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연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HN그룹이었고, 그다음은 윤세라였다.

별안간 이런 일을 저지른 게 HN그룹이라면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곤 10년 전처럼 협박을 하기 위해서일 것이고, 윤세라의 소행이라면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 연정을 인질로 삼은 것일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데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게 이상할 일이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연정의 말은 무섭게 밀려오던 걱정을 단숨에 날려버릴 만큼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담당의한테 물어봤더니 웬 남자분 연락처를 주더라고. 그래서 전화를 걸어봤더니 HN백화점 대표 비서실이라고 하지 뭐니.

연정의 설명을 듣고도 연희는 재차 물었다. 몇 번을 물어도 돌아오는 말은 HN백화점의 대표 비서실이라는 말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HN백화점의 비서실이란 말은 다른 말로 준혁의 비서실에서 조치한 일이란 거였으니까.

-연희, 너는 모르는 일이야? 그분이 글쎄 네가 백화점 입장에서 너무 고마운 성과를 내줘서 복지 차원에서 처리한 일이라고 했어. 그래서 나는 마침 네가 출장 간다길래 거기에서 중요하게 기여한 일이 있나 보구나 했는데…….

연희는 그 말에 한참 동안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문득 결혼식이 끝나고 머물렀던 별장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혹시 나한테 사과를 바랐어? 10년 전에 내가 HN그룹의 아들이란 걸 말하지 않아서.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사라진 너를 찾기 위해서 10년간 사람을 붙여 너에 대해 알아봐서 미안하다고. 설마 그런 말을 원했던 거야?’

분명 준혁은 그렇게 말했었다.

10년간 사람을 붙여 자신에 대해 알아봤다고.

행방을 찾기 위해 한 일이었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저뿐만 아니라 연정에 관련한 부분까지 찾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자신에 대해 알아보았다면 연정이 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을 테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연정이 VIP 병실로 옮겨간 건 자신을 위한 준혁의 배려인 셈이었다.

세라를 대신해 결혼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할 연정을 위해 적당히 둘러대는 것도 빼놓지 않고.

“엄마!”

연희는 연정에게 전해 들은 호수의 병실 문을 벌컥 열며 연정을 찾았다.

엄마란 말을 얼마 만에 입에 담아보는 건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을 뿐인데 그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정은 누워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희는 서둘러 연정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어나지 마. 그냥 누워있어요, 엄마.”

3주 만에 보다시피 한 연정은 이전보다 조금 더 말라 있었다.

그게 연희의 마음을 무척이나 무겁게 만들었다.

“얘도 참. 엄마 괜찮아. 오랜만에 보는 딸 얼굴인데, 누워서 맞이할 수가 있나.”

연정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도 변함없이 포근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연희는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연정의 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그러게. 엄마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그사이 어디 불편하거나 그런 덴 없었어요?”

겨우 내뱉은 목소리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새어 나올 것처럼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자꾸만 미안해졌다.

세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돈이 필요해서였고, 그렇게까지 돈을 욕심낸 이유는 연정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돈 걱정 없이 연정이 치료를 받았으면 해서.

언제나 빠듯했던 주머니 사정이 조금이라도 여유로워지면 연정의 마음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서.

“엄만 정말 괜찮아. 엄마보단 우리 딸 얼굴이 많이 상했네. 출장 가서 많이 힘들었어?”

그런데 연정은 조금도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피부도 푸석푸석하고,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볼을 쓸어내리는 엄마의 손은 이전보다 더욱 까칠했고, 호화로운 병실에 누워있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희는 제 볼 위에 닿아있는 연정의 손을 말없이 꼬옥 붙잡았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감정이 요동칠 이유야 제겐 너무나도 충분했지만, 연정을 생각하면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치 않은 엄마에게 저까지 걱정을 보태고 싶진 않았으니까.

“살이 빠지긴. 출장 가서 얼마나 잘 먹었는지, 3Kg이나 쪘는데?”

“말도 안 돼. 너 지금 볼이 홀쭉하게 들어갔어.”

“진짜예요. 엄마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지. 엄마한텐 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이니까.”

연희는 답지 않은 너스레를 떨며 억지로 입매를 휘어 올렸다. 그러나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어도 엄마는 엄마인 모양이었다.

“우리 딸이 엄마 때문에 고생이 너무 많다…….”

억지로 지은 미소라는 걸 단번에 눈치챈 연정이 그렇게 말했다.

연희는 고개를 아래로 처박은 채 질끈 눈을 감았다. 눈동자를 가득 메운 눈물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참아야 했다.

힘껏 깨문 입 안의 여린 살이 찢어져 피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연정의 앞에선 울지 말아야 했다.

“아, 참. 오는 길에 마실 거라도 좀 사 온다는 게 그냥 왔네. 엄마, 나 주스 좀 사 올게요!”

연희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등 뒤로 박힌 연정의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졌지만, 끝끝내 병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울음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 차마 딸을 붙잡을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병실 밖까지 전해졌다.

연희는 길게 이어진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오기라도 할까 봐 억지로 참았던 숨이 급하게 쏟아져 나왔다. 위태롭게 매달려있던 눈물 역시 후두둑 떨어졌다.

감정을 억누르는 게 쉽지 않았다.

이렇게 울면 안 되는데.

이렇게까지 엉엉 울면 다시 병실로 들어갈 때 퉁퉁 부은 얼굴을 보여야 할 텐데.

연희는 크게 심호흡했다. 부디 우는 일만큼은 제 의지대로 되길 바라며.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길 한참, 연정에게 핑계 댄 주스를 사기 위해 막 걸음을 떼었을 때였다.

“다 울었어?”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연희의 귓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연희는 숨 쉬는 일도 잊고 몇 발짝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엉망이네.”

준혁이었다.

잘못 본 건가.

믿을 수가 없어서 눈꺼풀을 두어 번 끔뻑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준혁은 지워지지 않았다.

“왜 계속 그러고 서 있어. 다 울었으면 당장 와서 안겨야지.”

지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향해 재차 말을 건네오고 있었다. 좀 전과 다름없는 자리에 서서 입술을 휘어 올린 채로.

“울고 나면 내가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다며.”

예쁘게 곡선을 그린 입술 새로 나온 말들이 단숨에 연희의 심장으로 와 깊숙이 박혔다.

연희는 숨을 멈추었다.

눈앞에 보이는 준혁의 모습 위로 10년 전의 어느 날이 겹쳐졌다.

‘이렇게 펑펑 울고 나면 그간 쌓였던 감정들이 전부 쓸려 내려간 기분이야. 그래서 속이 시원한 기분이라 너무 좋은데, 근데 그러고 나면 되게 외로워져.’

‘…….’

‘그래도 그동안은 버텼는데…….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보단 혼자였던 시간이 훨씬 더 많았으니까.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

‘근데 이젠 안 괜찮아. 내가 이렇게 펑펑 울고 나면 네가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이렇게, 나를 꽉 안아줬으면 좋겠어.’

언제 한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재생이 되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연희 옆에 정준혁이 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던 시절.

그땐 언제까지고 준혁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정준혁 없는 신연희나 신연희 없는 정준혁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때 연희는 하루하루가, 아니, 일분일초도 행복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준혁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초 단위의 짧은 순간도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 와 이렇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얼얼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나 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준혁을 그토록 사랑했었다는 사실까지.

그런데 준혁은 아닌 모양이다.

“안아줄 사람 나타났잖아.”

연희는 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윽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에 신연희가 또렷하게 담겨 있었다.

눈동자 속에 담긴 그 신연희가 33살의 신연희일지 23살의 신연희일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그는 신연희와 함께한 그 모든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확신에 담긴 시선을 보내며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던 순간에 자신이 했었던 그 말을 정확하게 전해올 수는 없는 거였다.

“계속 그러고 서 있을 거야?”

연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박힌 듯 멈추어있던 다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잦아든 것 같던 눈물이 순식간에 차오르고 이내 추락하듯 아래로 떨어지려고 할 때쯤.

“준혁아…….”

달음박질치듯 달려간 연희가 준혁의 품에 힘껏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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