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0)화 (10/80)

10. 숨겨진 진실(2)

한참을 넋 놓고 있는데, 세라가 방긋 웃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흘러나온 말이 맹랑하기 그지없었다.

‘식사는 다음에 하죠. 뭐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인지는 그쪽이나 나나 잘 알고 있을 거고, 진짜 나랑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연락 줘요. 식사는 그때 하고요.’

‘…….’

‘아, 혹시 오늘이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라면 책임은 정준혁 씨가 안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최숙희 여사님이 손녀라면 끔찍한데, 정준혁 씨와의 결혼은 어지간히 탐이 나시는 모양이더라고요. 정준혁 씨가 마음에 쏙 들더라고, 본 적도 없는 남자 편을 어찌나 드시던지.’

세라가 진저리나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준혁은 그런 세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연희를 통해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만약 연희가 진저리를 친다면 지금 윤세라의 얼굴과 똑같았을까, 그런 의미 없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생각이 더 깊어질 겨를은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세라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탓이었다.

‘앉은 지 10분도 안 돼서 자리에서 일어난 건 비밀로 해줘요. 우리 회장님이나 최 여사님이 알면 내가 좀 많이 혼날 거 같아서 말이에요.’

‘…….’

‘그렇다고 내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랑 웃으며 겸상할 정도로 성격이 좋지는 못해서. 부탁할게요. 알겠죠?’

그 말을 끝으로 세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룸을 나갔다.

그녀의 말마따나 마주 보고 앉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준혁은 조금 전까지 세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미 세라는 가고 없는데, 연희와 똑같던 그 얼굴이 잔상으로 남아 여전히 눈앞에 머무르고 있었다.

세라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신연희이고, 신연희에 관한 거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말투 빼고는 모든 게 신연희와 똑같은데 어떻게 속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어투로 보나 말본새로 보나 윤세라와 신연희는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김 비서의 일은 더욱이 늘어났다.

준혁은 세라와 연희 사이의 혹시 모를 연관 관계에 대해 알아볼 것을 지시했고, 김 비서는 군말 없이 이행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성과는 없었다.

그사이 정준혁과 윤세라의 정략결혼은 서로를 강력하게 원하는 양가 어른들의 뜻을 따라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천하의 정준혁도 원치 않는 여자와의 결혼을 앞두고는 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초조했다.

모든 탓을 떠안지 않고 결혼을 피할 방법을 미친 듯이 찾았지만, 현명한 답은 생각처럼 쉬이 찾아지질 않았다.

그리고 세라와의 결혼이 보름쯤 남았을 때, 준혁은 김 비서를 통해 기대하지 않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방금 윤세라 씨의 최측근 비서가 연희 아가씨를 모시고 근처 호텔로 갔습니다. 방금 들어온 정보로는 윤세라 씨 이름으로 스위트룸이 체크인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준혁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어야 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신연희와 윤세라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그날 밤, 복잡한 생각에 대한 답을 찾을 새도 없이 김 비서의 보고를 들어야 했다.

‘전해드리기 송구한 말입니다만…….’

김 비서는 답지 않게 말을 망설였다.

준혁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으니까 보고하세요.’

괜찮다는 말에도 김 비서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보고가 이어진 건 한참 만이었다.

‘아무래도 윤세라 씨께서 연희 아가씨를 결혼식에 대신 세울 생각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

준혁은 본능이나 다름없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윤세라와 신연희가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는데, 윤세라가 결혼식에 연희를 대신 세울 생각인 것 같다니.

너무도 철없게 느껴지는 발상에 어이가 없다가도 불현듯 이거야말로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 말고, 윤세라와 연희 사이에 다른 연계점은 없습니까?’

‘더 알아봐야겠지만, 현재로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김 비서 말은 윤세라와 신연희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이인데, 윤세라가 대신 결혼식에 설 사람을 찾기 위해 연희를 호텔로 불렀다, 이 말인 거죠?’

‘예.’

간결한 김 비서의 대답은 준혁을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빠지게 만들었다.

밤이 지나고 동이 틀 때까지 준혁은 잠 한숨 이루지 못했다.

분명 기회라면 기회였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놓치지 말아야 할 절호의 찬스였다.

그럼에도 밤을 새워가며 고민한 이유는 제 욕심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가 연희에게 또 상처 주게 될 가능성은 없는지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룻밤이면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준혁이 내린 결론은 윤세라가 쥐여준 찬스를 완벽하게 이용하겠다는 거였다.

만에 하나와 같은 가능성으로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희가 상처받게 될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건, 정준혁이 10년 전처럼 힘없는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과 그러므로 그때처럼 마냥 눈 뜨고 당하는 일은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제 발로 걸어들어온 연희를 어떤 식으로든 붙잡아두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결혼식 날까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꿈에 그리던 연희를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순간부터 꿈 같던 신혼여행 기간을 지나 오늘까지.

준혁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건 아닐까 미칠 듯 불안할 만큼 행복했다.

신연희는 예나 지금이나 제게 절대적인 의미의 여자였다.

고작 며칠만으로도 10년간 연희를 향했던 원망이나 미움은 씻은 듯 사라졌다.

안심을 하기엔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불안이 여전했고 그로 인한 초조함이 자꾸만 준혁의 마음을 좀먹어갔지만, 연희가 없던 시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부디 이 행복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랐다.

가능하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지키고 싶은 행복이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준혁은 김 비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김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추가로 보고드릴 내용이 있는데, 확실한 건인지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준혁의 한쪽 눈썹이 사선 방향으로 올라갔다.

김 비서는 본래 뭐든 알아보는 대로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지 않은 이상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는 섣불리 전하지 않았다.

“내가 놀랄 만한 내용인가 보죠?”

준혁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김 비서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닥거렸다.

“보고하세요.”

준혁은 거침없이 명령했다. 김 비서의 표정만 봐도 심상치 않은 문제인 게 분명했지만, 듣기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심상치 않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까지 연희와 관련 있는 이야기일 테니.

“그게…….”

“…….”

“……윤세라 씨와 연희 아가씨가 쌍둥이인 것 같습니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김 비서가 억지로 말을 토해냈다. 그러기 무섭게 준혁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윤세라 씨와 연희 아가씨가…….”

“그만.”

준혁은 느닷없이 편두통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전혀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문득 세라를 처음 본 순간 연희와 똑같은 생김새를 한 것에 놀라 실없는 생각을 했던 게 떠올랐다.

일란성 쌍둥이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똑같다는데, 그걸 직접 봤을 때의 기분이 지금 같을까.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실없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윤세라와 신연희가 진짜 쌍둥이일 줄이야.

준혁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김 비서의 보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분명 일전의 보고대로라면 연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연희와 세라가 쌍둥이일 수 있는 걸까.

시시각각 변하는 준혁의 표정에 김 비서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말씀드린 대로 자세한 내막은 좀 더 조사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만…….”

“자세한 내막도 없이 윤세라와 연희를 쌍둥이라고 의심하는 이유는 뭡니까?”

준혁은 김 비서의 말을 뚝 자르곤 날카로운 시선으로 김 비서를 응시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움찔했을 만큼 매서운 눈길이었다. 그러나 김 비서는 잠깐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준혁은 입 안 여린 살을 꽉 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강단 있어 보이는 김 비서의 낯빛이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을 심어주었다.

“대표님 지시에 따라 윤세라 씨에 대해 알아보던 중, RM그룹 회장 내외가 출산 당시 얻었던 자식이 그냥 딸이 아닌 쌍둥이 딸이라는 제보를 입수했습니다. 제보를 한 사람은 당시 산부인과의 간호사로 일하던 사람이고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거 맞습니까? 헛소리하는 걸지도 모르는데, 김 비서가 너무 속단하는 건 아닌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우선 가능성만 생각해달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그런데…….”

김 비서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준혁은 잠깐도 김 비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김 비서는 수심에 잠긴 얼굴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곧 이어진 김 비서의 말은 앞의 어떤 말보다도 충격적이었다.

준혁은 속절없이 미간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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