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9)화 (9/80)

9. 숨겨진 진실(1)

강원도 별장에서 신혼집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닷새가 더 흐르고 나서였다.

준혁은 침실 밖으론 단 한 걸음도 내보내지 않을 거라고 했던 말을 착실히 지켰다.

식사를 할 때조차도 침대에서 이루어진 횟수가 훨씬 더 많았다.

그는 시종일관 제게서 눈을 떼는 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 게 생기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였다.

준혁도 연희도 그렇게 지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일주일을 채웠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유난이라고 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연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혁이 괴롭히는 통에 도통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남모를 속사정은 신혼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퇴근하고 도착하면 여덟 시쯤 될 거야.”

연희는 새하얀 침대 시트 위에 힘없이 널브러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 위를 덮고 있는 이불이 아니었더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준혁의 출근을 배웅했을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냉장고 채워뒀으니까 좀 더 쉬었다가 밥 챙겨 먹고.”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준혁이 침대맡에 앉아 흐트러진 연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연희는 그런 준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엔 미처 숨기지 못한 불안이 잠겨 있었다.

“심심하면 서재에서 책 골라 보던지, 영화나 드라마 보고 있어도 되고. 아니면…….”

“준혁아.”

연희는 푹 잠긴 목소리로 준혁을 불렀다.

그의 동공이 얕게 일렁였다. 이미 듣게 될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너 올 때까지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얼른 출근해.”

연희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준혁이 조금쯤 안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침실을 나가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마다 연희는 준혁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속에 담아두었던 한숨을 편하게 내뱉을 수 있게 된 건 준혁이 완전하게 방을 빠져나가고 난 후였다.

“후우.”

연희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일주일이 넘도록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 엄마 (2) ]

[ 간병인 아주머니 (1) ]

빨간색 글씨로 적힌 부재중 통화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연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내도록 준혁과 붙어있느라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착실하게 직장생활이나 하며 지내는 줄 알고 있을 연정에게 차마 준혁의 목소리를 들려줄 순 없었으니까.

준혁을 피해 전화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제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준혁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래야 연정과 편하게 통화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희는 서둘러 연정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응, 연희야.

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무섭게 연희가 미간을 좁혔다. 어딘지 모르게 연정의 목소리가 평소 같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간병인 아주머니의 부재중 전화까지 찍혀있는 게 마음이 편치 않던 참이었는데.

연희는 급히 물었다.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가 안 좋아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연정과 제대로 통화하는 것이 거의 3주 만이었다.

보름은 세라의 요구로 스위트룸에만 갇혀 있어야 했고, 일주일은 신혼여행 때문에 별장 침실에 갇혀 있어야 했으니 정확히는 3주하고도 하루가 더 지난 셈이었다.

연정과 이렇게까지 오래 연락하지 않았던 적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제겐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말라 가는 연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연희는 불안감부터 밀려왔다.

-아니야. 엄마 괜찮아. 항암치료가 좀 힘들긴 한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해.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왜 그러긴. 너는 갑자기 병실을 바꾸면 바꾼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전화 안 받길래 바쁜 줄 알고 더 연락은 안 했는데,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연희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병실이, 바뀌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병실이 바뀌다니?”

되물은 연희의 말에 연정이 퍽 당황한 기색을 풍기더니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연희는 설명 못 할 불안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연정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끝을 입에 가져다 댈 때쯤이었다.

-그게 말이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듯한 연정의 목소리가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

준혁은 대표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김 비서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비서가 서류 봉투를 쥔 채 준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신혼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딱딱한 말투였지만, 건네진 말속엔 김 비서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김 비서가 자신을 많이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연희를 제외한 사람에겐 이 정도의 표현만이 준혁에겐 최선이었다.

“일주일 전에 지시한 사항은 어떻게 됐습니까?”

준혁은 낯간지러운 말 대신 사무적인 어조로 일 얘기를 꺼냈다.

“네. 말씀하신 대로 병실은 VIP 병동으로 옮겼고, 병원비로 인한 문제 없이 치료받으실 수 있도록 처리했습니다.”

준혁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10년간 연희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지만, 정작 연희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던 건 6개월 전부터였다.

‘그동안 강원도에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해당 지점 MK몰 아동복 매장 직원으로 일하시면서 어머니로 생각하는 분과 함께 지내고 계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분께서 많이 편찮으신지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다니고 계십니다.’

그게 김 비서를 통해 처음으로 전해 들은 연희의 소식이었다. 준혁은 아직까지도 그날의 기분을 잊지 못했다.

연희가 사라지고 나서 몇 년은 반쯤 미친놈처럼 연희의 행적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다음 몇 년은 HN그룹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다고 해서 연희를 찾는 일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일에 매진한 것까지도 연희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몇 년 동안 신연희 하나만을 찾아 헤맸는데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던 게 집안에서의 방해 때문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부터 준혁은 연희에 관한 건 전부 김 비서에게 맡겼고 자신은 오로지 제 부친을 만족시키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했다.

자신이 HN그룹을 위한 인재가 되었다는 걸, 신연희의 그늘에서 완벽하게 벗어났다는 걸 보여줘야만 했으니까.

부친을 방심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일에 매진하는 것, 그것뿐이었다.

준혁은 밤낮없이 일만 했다. 정 회장이 기대하는 프로젝트라면 그게 뭐든 나서서 해결했다.

과로로 쓰러지면 링거를 맞아가면서까지도 쉬지 않았다.

그렇게 산 세월이 장장 7년이었다.

효과는 톡톡했다.

9년 6개월을 해도 되지 않던 일이 단 6개월 만에 해결되었으니까.

6개월간 연희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주 많았다.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고아원 앞에 버려져, 줄곧 그 고아원에서 지내셨습니다. 어머니처럼 생각하시는 분이 그 고아원의 원장님이시고요. 최근 어머니와 다니는 병원에서 서울의 대학 병원으로 인계해 치료받는 걸 권유한 것 같습니다. 일하는 매장에 퇴사 생각을 은근하게 밝히신 걸 보니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는 문제까지 고려 중이신 것 같고요.’

4개월 전 보고 받은 연희의 근황 이야기였다.

그 무렵 준혁은 자금 횡령으로 물러난 HN백화점의 전문경영인을 대신해 급히 대표 업무를 이행하는 중이었다.

하늘이 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마침 연희가 대형 쇼핑몰에서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잘만 입김을 불어 넣는다면 연희를 자신의 백화점으로 데리고 올 수 있는 찬스였다.

7년간 다져진 추진력은 제때에 빛을 발했다.

연희를 HN백화점 내의 명품관 브랜드 직원으로 데리고 오기까지는 일사천리였다.

서울에 있는 백화점 중 최대면적을 자랑하는 HN백화점이었지만, 준혁은 그 커다란 건물 안에 연희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연희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섣불리 연희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10년 전 연희가 갑자기 떠난 이유가 제 집안의 소행 때문일 거라고 준혁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연희의 앞에 불쑥 나타나는 건 또 도망칠 기회를 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세라를 만나게 된 건 연희가 서울로 오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세라와의 자리는 정략결혼 때문에 만들어진 자리였다.

연희가 아닌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자리에 나간 건 어디까지나 아직은 정 회장 눈 밖에 나는 일은 조심해야 했기 때문에. 그 이유 하나였다.

그런데 준혁은 세라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세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듣던 대로 끝내주게 잘생기셨네요?’

형식적인 인사 다음으로 이어진 세라의 말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라면 그걸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자리를 파투낸 이유로 상대가 교양이 없다는 핑계는 훌륭할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준혁은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꼭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앞에 앉은 여자가 신연희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순 없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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