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6)화 (6/80)
  • 6. 비틀린 집착(1)

    세라가 고개를 들어 이 비서를 보았다.

    “그 이상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없었습니다. 당시 신연희 씨랑 같은 학과에 다닌 재학생에게도 몇 접촉해봤습니다만, 딱히 얻어낸 정보는 없었고요.”

    이 비서가 썩 곤란한 기색으로 세라를 보았다.

    세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공백투성이인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많지도 않은 종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라곤 신연희라는 이름과 나이, 한국대에 입학했지만 중퇴했다는 사실과 세상 빛을 보기 무섭게 고아원에 버려졌고 그 고아원의 원장이 친엄마와 같은 사람이란 것 정도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보면 볼수록 신기한 여자네.”

    세라가 입술을 비뚜름하게 휘어 올렸다.

    별 볼 일 없는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해서 망설임 없이 덥석 잡아 물었다.

    그 여자가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결혼식장에 서야만 했을 테니, 무조건 잡아야만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 무작정 덥석 물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밀려온다.

    “뭔가 골치 아픈 호랑이 새끼를 주워든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 비서가 뇌까리듯 중얼거리는 세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세라는 손에 쥐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곤 손을 두어 번 내저었다.

    찝찝한 건 맞지만, 이 비서를 탓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으니.

    “이 비서가 죄송할 건 없죠. 이 비서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한 것밖엔 없는데. 됐어요! 일단은 자유를 좀 즐기자고요.”

    그 말을 하곤 몸을 뒤로 쭉 젖혔다. 포근한 쿠션이 기분 좋게 등을 감쌌다.

    세라는 입매를 쭈욱 끌어당겼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로웠다. 그 아래로 펼쳐진 새파란 바다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그것만으로 세라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 같은 건 깡그리 다 잊고 싶을 만큼.

    “33년 인생에 처음으로 감시 없이 즐길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을 얻었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순 없죠.”

    세라는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카페 안에서만 시간을 때우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해변이라도 걸을 요량으로 걸음을 막 내뻗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무언가 떠올랐다.

    잠시 자리에 멈춰 골몰하던 세라가 이 비서를 향해 시선을 던지곤 경쾌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지금 신연희 한국이래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사람 붙여요. 정준혁이 알아서 대처했다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

    “그래도 적당한 보험은 들어놔야 나도 마음 편히 놀 수 있겠죠?”

    세라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 비서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세라가 다시금 다리를 교차했다.

    “그럼 부탁합니다, 이 비서.”

    마지막까지 부탁을 빙자한 명령도 마다치 않았다.

    ***

    연희는 나무가 우거진 숲속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앞엔 준혁이 준비한 커피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줄곧 저만 바라보고 있었을 준혁과 눈이 마주칠 게 분명했으니까.

    아직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름은 정준혁, 나이는 서른셋. HN그룹 셋째 아들이에요.

    세라의 말소리가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10년 전 변호사를 마주하고 앉아야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고작 대학생 신분의 남녀가 연애를 한 문제로 변호사가 찾아올 정도였으니, 그것만으로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일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게 HN그룹과 관련된 일일 거라곤 단 한 번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내에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중소기업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사실 그가 연 매출 10억 정도의 자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이라고 했어도 놀랐을 것이다.

    자신은 가진 거라곤 사지 멀쩡한 몸뚱이 하나뿐인데, 아무리 작은 회사를 운영한다고 한들 그게 제 처지와 비교했을 때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이건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의 결과였다.

    더욱이 HN그룹을 상대로 거짓 결혼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살이 벌벌 떨릴 지경이었다.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1년이란 시간 동안 그 대단한 기업을 상대로 이 가짜 결혼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상념에 잠겨 있던 연희가 어깨를 바르작 떨었다.

    고개를 돌려 준혁을 보았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커피를 들이켜며 지독하게 박아 넣은 시선을 잠깐도 떼지 않고 있었다.

    연희는 잠시지만, 그 눈을 멀거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뿐인데, 이미 제 속을 전부 들킨 기분이었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묻고 싶었다.

    왜 말하지 않았던 거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냐고.

    그러나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린 건 그렇게 묻는다고 해도 이제 와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깨달음이 뒤따라서였다.

    생각해 보면 준혁은 물론 저 역시 가족사나 집안과 관련한 이야기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꺼낸 적이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 원장님을 엄마처럼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살면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본 남자에게 그런 말을 꺼내기엔 그 시절 치기 어린 자존심이 쉽게 허락해주질 않았다.

    그런 제게 준혁을 원망할 수 있는 자격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잘 참고 있네. 어제 결혼식장에서부터도 그렇고, 방금 윤세라 전화로도 그렇고. 궁금한 게 많이 생겼을 텐데.”

    별안간 준혁의 말소리가 연희의 귓속을 뚫고 들어왔다.

    연희의 눈동자가 대번에 초점을 되찾았다.

    “어제 그 자리가 무슨 자리였는지, 너도 알고 있잖아. 적어도 정준혁과 윤세라의 결혼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란 것쯤은 눈치챘을 거고. 방금 윤세라 전화도 그래서 걸려 온 걸 테고.”

    “…….”

    “그런데도 넌, 나한테 아무것도 물어보질 않네.”

    연희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 말도 한 게 없는데, 그는 이미 제 속쯤이야 가뿐히 간파했다는 것처럼 모르는 게 없었다.

    한편으론 의미심장하게 구는 준혁의 태도가 썩 이해되지 않았다.

    그에게 따져 물을 자격이 제게 없듯, 그에게도 이토록 당당하게 나올 이유랄 게 없었다.

    서로에게 숨긴 이야기가 있던 건 피차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뭐가 이렇게 떳떳한 것일까.

    연희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 그런 식으로 돌리지 말고.”

    담담한 척 말은 했지만, 복잡하던 마음은 더욱이나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척이나 노력 중이었다. 가능한 한 모든 탓을 준혁에게로 돌리지 않고,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랬듯 그에게도 사정이란 게 있었을 거라고 반복적으로 되뇌고 있었다. 그런데 준혁이 속도 모르고 자꾸만 자극을 해온다.

    그런 그의 태도나 말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지금 제 머릿속이 너무나도 엉망진창이었다.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나야 어차피 결혼식장에 나타날 여자가 신연희란 걸 알고 한 거지만 넌 아니잖아.”

    연희는 숨을 멈추곤 준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더디던 사고회로가 완전히 멈춘 기분이다.

    정준혁이 결혼식장에 나타날 여자를 윤세라가 아닌 신연희로 미리 확신하고 있었다는 건 재고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었다.

    눈을 마주하기도 전에 자신이 신연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이토록 당당하게 이야기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몇 번을 생각해도 타당한 경로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윤세라를 만났던 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백화점으로 출근을 했고, 이 비서를 따라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접촉한 적이 없었다.

    그뿐일까.

    그날 이후 결혼식 날까지 호텔 스위트룸에서 한 발짝도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니 준혁이 자신을 보자마자 세라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건, 합법적이지 않은 경로로 누군가를 고용해 은밀히 자신을 지켜봤거나 자신에 대해 알아봤거나.

    그 두 가지의 경우가 아니고선 설명되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준혁은 너무나도 태연자약했다.

    “궁금한 것도 있을 거고, 알아야 할 것도 있을 거고. 그러니까 뭐든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네가 궁금해하는 거라면 그게 뭐든 대답해줄 생각이니까.”

    그가 뜻 모를 미소와 함께 말을 멈추었다. 그러나 뒤얽고 있는 시선으로 그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단 걸 알 수 있었다.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입꼬리를 매끄럽게 휘어 올린 것부터가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나랑 부부로 살아야 할 텐데 지난 감정 같은 거, 쌓아두고 지낼 순 없잖아.”

    연희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즐거운 기색을 담고 있었다.

    특히 부부란 단어를 말할 땐 입꼬리가 정직하게 올라가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과 부부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저 기꺼운 모양이었다.

    제 심장은 모두를 속였다는 생각에 이토록 불안하게 뛰어대는데, 준혁에게선 일말의 불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연희는 쉬이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가까스로 달싹거렸다. 그러곤 경직된 얼굴로 준혁을 바라보았다.

    “뭘?”

    뜸 들이는 것 같던 그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되물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연희의 심장은 거칠게 요동쳐댔다. 그러나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숨긴 손을 꽉 움켜쥐며 꿋꿋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윤세라 씨를 대신해 결혼식장에 나타날 거라는 거.”

    이제 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었다.

    어차피 결혼식은 이미 치른 후였고, 윤세라에게 받은 계약금을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곤 정준혁과의 결혼을 1년간 유지하는 것,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물었다.

    어쩐지 정준혁이 놓은 덫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글쎄. 뭐라고 대답해야 네 마음에 들 건데?”

    연희는 미간을 좁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준혁의 반응들이 자신을 약 올리는 것만 같았다.

    맞붙인 입술로 힘이 들어갔지만, 동요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제야 장난 칠 기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건지 그가 장난기 걷힌 얼굴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가 윤세라를 만났던 그 순간부터.”

    연희는 헛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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