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5)화 (5/80)

5. 남편의 정체

-내 남편, 마음에 들어요?

연희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세라의 의중이 조금도 가늠되질 않았다.

짧지만 직접 겪었던 세라라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골리기 위해 던진 질문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뼈 있는 말이면 어쩌나 불안감이 엄습했다.

-당황했어요? 장난친 건데.

장난기 가득한 세라의 웃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연희는 쉬이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세라는 이렇듯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도 곧장 표정을 바꾸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내 남편에 대해 알게 된 건 있어요?

재차 이어진 세라의 질문에 연희는 숨을 멈추었다.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적당한 대답을 골라내는 게 쉽지 않았다.

정준혁에 대해서 아는 거라면 장담컨대 제가 세라보다 더 많을 터였다.

아무렴, 함께한 시간이 얼만데.

“그냥, 이름 정도…….”

하지만 연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한참 만에 가까스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가슴이 쿵쿵 뛰었다.

눈치 빠른 세라에게 괜한 의심이라도 살까 봐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억겁 같던 시간이 지나고 견뎌내지 못한 긴장에 침을 꿀떡 삼킬 때쯤, 핸드폰 너머에서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사람을 파악하기에 하루가 너무 짧은 시간이긴 하죠? 사실 전에 신연희 씨가 남편 될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일부러 못되게 대답한 거였거든요.

“…….”

-적당히 차이 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이제 와서야 얘기하는 거지만, 신연희 씨 입장에선 충분히 부담스러울 만하잖아요.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연희는 멍한 얼굴로 눈꺼풀을 끔벅거렸다.

세라가 의심을 하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충분히 부담스러울 만하다는 말이 자신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곧 이어지는 세라의 말에 연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밖에 없었다.

-이름은 정준혁, 나이는 서른셋. HN그룹 셋째 아들이에요.

순간 연희의 입이 떡 벌어졌다.

HN그룹의 아들이라니.

정준혁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HN그룹의 아들이란 건 지금껏 전혀 알지 못했다.

문득 10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찾아온 변호사에게서 준혁의 집안과 관련한 이야기는 어떤 것도 듣지 못했었다.

변호사는 시종일관 ‘네까짓 게 그런 걸 알아서 뭐 할 건데.’라는 식의 태도였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에 걸맞게 하찮은 미물을 대하는 듯했다.

그 태도와 눈빛에 질려 더는 물을 엄두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HN그룹이었구나. 정말 대단한 집안의 자식이었네.

연희는 잘게 흔들리는 눈으로 투명한 새시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준혁은 아일랜드 식탁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은 HN백화점 대표로 있고……. 음, 또 설명해야 할 게 뭐가 있지.

멍하니 준혁을 바라보고 있는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다시금 연희의 고막을 찌르고 들어왔다.

HN백화점이라면 세라를 만나기 직전까지 자신이 일하던 곳이었다.

준혁에게서 도망친 이후 서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연봉이 세기로 소문이 자자한 명품관 브랜드의 직원 자리였기에 망설였다.

마침 연정의 상태도 나날이 악화되어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겠단 권유를 받은 상태였다.

돈이 필요하던 찰나에 돈 많이 주기로 소문난 직원 자리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하늘이 도와준 기회였다.

그래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겨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끝내 서울행을 다짐해야만 했다.

그런데 준혁이 HN백화점의 사장이라고?

“잠깐만요, 윤세라 씨. 지금, HN백화점이라고 하신 거 맞아요? 제가 알기로 저희 백화점 사장님은…….”

연희는 언젠가 보았던 이름을 찾아 머릿속을 구석구석 뒤졌다.

입사하기 직전까지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화점 홈페이지를 살펴보았었다.

준혁에게서 도망친 이후 늘 그랬다.

소중한 사람들을 전부 망칠 거란 변호사의 말이 뇌리에 박혀 직장을 옮길 때마다 대표자 이름부터 살펴보았다.

그러곤 대표자의 성씨가 ‘정’이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새로운 일자리를 구했다.

돈 받고 떨어지지 않으면 주변 사람까지 엉망으로 만들겠다는 그 대단한 집안이 도대체 어떤 집안인지 알 길이 없어 더욱 집착했던 것도 같다.

정말 제 소중한 사람이 다칠까 봐 두려운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기도 했으나, 사실은 제 마음을 엉망으로 만든 것에 대한 복수심이기도 했다.

준혁을 떠난 그 날 독하게 다짐했었다. 다신 그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우연히라도 마주친다면 상종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룬 거라곤 한국대학교에 입학했다는 것뿐인데, 유일하게 이룬 그 한 가지를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던 길이었으니까.

-아, 아직은 공식적인 취임 전이에요. 원래 대표로 있던 사람은 영 능력이 없어서 잘렸는데, 대표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순 없으니까 정준혁 씨가 급하게 업무 파악하면서 일 처리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뭐, 조만간 공식적인 취임식이 있을 거라고 하니 곧 언론 보도도 되겠죠?

연희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서울행을 결정하고 나서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괜한 불안감에 설마 했었다.

설마, 서울 땅이 얼마나 넓은데 정준혁을 마주치기야 하겠느냐고.

그러니 결혼식장에서 준혁을 봤을 때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던 그 남자를, 그런 말도 안 되는 경우의 수로 기어이 만나고 말았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대신 결혼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남편 될 사람이 정준혁일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굳이 이 기가 막히는 결혼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준혁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몰랐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면 악연 아닌가.

불현듯 드는 생각에 실소가 다 새어 나왔다.

-그 사람도 나 못지않게 베일에 싸여 계신 분이라 인터넷에 검색해도 찾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거예요. 결혼 생활하려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테니, 기억해둬요.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정보들에 반쯤 넋이 나간 기분이었지만, 연희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었다.

“……그럴게요.”

짧은 대답에 핸드폰 너머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만 전화를 끊고 싶었다. 잔뜩 불어난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세라는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그 남자한테 너무 빠지지는 말아요.

연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건 무슨 종류의 경고로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

-그 남자, 되게 매력적이지 않아요? 이 바닥에서 짱짱한 집안이란 집안은 다 탐냈던 남자였어요. 지금까지 결혼 안 하고 버틴 게 신기할 정도로?

“…….”

-그런 남자가 왜 나랑은 결혼을 결심한 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죠.

마지막 세라의 말이 연희의 머릿속 중앙에 깊숙이 박혔다.

연희는 다시금 새시 창 너머의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할 일을 마친 건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라면 의도치 않게 그와 눈이 마주쳐 화들짝 놀라야 맞겠지만, 지금 연희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차분한 상태였다.

-지나치게 매력적인 남자는 지나치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게 내 지론이거든요.

“…….”

-뭐, 이건 나랑 손잡은 아군한테 주는 조언쯤으로 하고.

세라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동시에 아일랜드 식탁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준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곤 자신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만 끊어요. 스위스든 아니든 이제 신혼여행 1일 차인 건데, 정준혁 씨가 의심하겠어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연희는 준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들어가 볼게요.”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던 그 순간에.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지네?”

준혁이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 위로 머그 컵 두 잔을 내려놓았다.

***

“아가씨, 지난번에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 알아본 자료입니다.”

세라는 조금 전까지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곤 고개를 들었다.

이 비서가 제 앞으로 서류 봉투를 내밀고 있는 게 보였다.

세라는 기꺼운 손길로 봉투를 받아들곤 화사하게 웃었다.

“수고 많았어요.”

그 정도로 치하를 마치곤 서류 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종이 몇 장이 들어있었다.

세라는 그 첫 번째 장에 적힌 내용들부터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다.

“이름 신연희, 나이 서른셋. 음, 고아라고 적혀 있네요?”

세라가 고개를 들어 제 비서를 보았다.

의외였다. 고아라니.

‘전화 한 통만 하게 해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문자 한 통만이라도요. 엄마한테 일이 있어서 당분간 못 들어갈 것 같다고만 말씀드릴게요.’

일전 스위트룸에서 지내던 연희가 제게 간곡히 부탁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엄마라고 했었는데.

설마 거짓말이었나?

세라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그녀의 감정변화를 눈치챈 이 비서가 빠르게 설명을 붙였다.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진 것 같습니다. 호텔에서 얘기했던 엄마라는 사람은 신연희 씨가 자란 고아원의 원장님인 것 같고요.”

“아아, 고아원 원장님.”

“이름은 유연정. 3년 전까지 지금은 폐원된 하나 고아원의 원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폐원된 게 의심스러워서 자세히 알아봤습니다만, 겉으로 드러난 이유 중엔 특별한 것이 없었고, 현재 한국 대학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아휴. 됐어요, 거기까지. 이건 뭐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가정사네.”

세라는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손에 쥔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어라, 이건 또 뭐야. 한국대 중퇴?”

세라의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한국대라면 손에 꼽히는 명문대였다. 그런데 기껏 명문대학교에 들어가 놓고 중퇴라니.

통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 학교만 잘 졸업했더라도 지금쯤 신연희의 인생은 백화점 명품관 계약직에만 전전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세라가 빠르게 두 번째 장을 살피곤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의아한 빛을 담은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람.”

잇새를 타고 나온 목소리가 조금쯤 허탈한 듯했다. 그러자 잠자코 서 있던 이 비서가 다시금 말을 이어붙였다.

“저도 알아보면서 계속 의아했던 부분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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