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2)화 (2/80)
  • 2. 다시 만난 남자

    “10년을 기다렸는데. 그래서 그런가?”

    “…….”

    “어디든 아무도 없는 곳에 당장 가두고 싶을 정도로, 미치게 예뻐.”

    귓속을 찌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싸늘했다.

    더욱이 10년을 기다렸다는 말에는 잔혹하게 목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그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분명 자신은 윤세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고, 그러니 정준혁도 자신을 윤세라로 알고 있어야 맞는 건데.

    마치 자신이 윤세라가 아닌 신연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10년을 기다렸다고 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희는 이미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움직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

    “……어쨌든, 당신도 멋있어요.”

    떨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지만, 은근하게 묻어나는 긴장감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준혁은 별다른 꼬투리를 잡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짧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지금 이 상황이 무척 재밌다는 듯 유쾌한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의미심장하기도 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내가 직접 고른 드레스인데, 생각한 거 이상이야.”

    “…….”

    “역시 넌 예나 지금이나 어깨선이 참 예뻐. 쇄골은 보는 것만으로도 날 미치게 하고.”

    연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아닐 거라고 되뇌고 또 되뇌며 윤세라로서 이 자리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모든 노력이 무참히 깨져버렸다.

    지금 준혁은 윤세라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난 여기에 입을 맞출 때마다 정신이 나가버리는 것 같아.’

    ‘거긴 어깬데?’

    ‘응. 어깨랑 쇄골이 이렇게 이어지는 게 그냥 너무 예뻐. 몰랐던 취향인가 봐. 연희 너 만나기 전엔 나한테 이런 취향이 있는 줄 몰랐어.’

    언제였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정준혁이 신연희에게 했던 말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안 거지.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연희는 미치도록 혼란스러웠다. 빈틈없이 마주하고 있는 준혁의 눈동자가 연희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10년 만에 다시 손에 쥐었다는 희열과 10년을 기다리며 억눌러왔을 분노.

    팽팽하게 대립되는 그 두 가지 감정이 새카맣게 가라앉은 준혁의 동공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연희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런데 그 순간, 식장 문이 열리고 하객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자, 오늘의 주인공! 신랑 정준혁 군과 신부 윤세라 양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일의 시작을 알렸다.

    도망을 치려면 지금 쳐야 맞았다.

    지금도 늦었겠지만, 지금이 아니고선 다신 기회가 없을 거란 직감이 밀려왔으니까.

    하지만 연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들어가 볼까?”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준혁이 손을 꽉 붙잡아왔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은밀히 쏟아졌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그런 눈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

    연희는 어깨를 바르작거리며 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한껏 위로 추어올린 채,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연희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미 나랑 결혼하기로 윤세라랑 합의 끝낸 거 아니었어?”

    곧바로 귓속을 뚫고 들어오는 준혁의 말소리에 온몸으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자, 웃어야지. 오늘의 주인공인데, 그렇게 죽을상 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

    거칠게 요동치는 연희의 눈동자로 준혁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그리고 준혁의 목소리가 다시금 연희의 귓가를 휘감은 그 순간.

    “안 그래? 연희야.”

    연희는 제 손목에 보이지 않는 수갑이 채워졌단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

    결혼식은 순조롭게 끝났다.

    이 비서의 도움으로 식 이후에 직접 사람을 상대해야 할 일은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댄 건지, 식이 끝나기 무섭게 공항으로 향해야 했으니까.

    이 비서의 말대로라면 곧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될 터였다.

    나쁘지 않았다.

    아름답고도 장엄한 자연을 만끽하기에 그만한 장소는 없었고,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했던 인생에 스위스면 과분할 정도로 호화로운 신혼여행지였다.

    그러니까, 바로 옆에 앉아있는 정준혁만 아니었더라면 진짜 신부를 대신한 거짓 결혼이었지만, 딱 1년만 잘 견뎌보자고.

    연희는 그렇게 다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별안간 준혁의 목소리가 차 안 가득하던 정적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연희는 빠르게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아직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지, 그 어떤 것도 결정 내리지 못했으니까.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럴 수가 있었지.”

    준혁의 목소리가 연이어 더해졌다. 대답이 없을 거란 걸 이미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주저함이 없었다.

    그럴수록 연희는 더욱 고집스럽게 차창 너머만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내 덧대어진 준혁의 말에 애써 유지하던 평정을 잃고 말았다.

    “너한텐 내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남자였나.”

    연희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었느냐 묻고 싶은 건 저였다.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인데, 한순간도 그날의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이게 뭐예요?’

    ‘그간 저희 도련님을 즐겁게 해준 거에 대한 대가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낯선 남자는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하며 흰 봉투를 내밀었다.

    연희는 봉투 위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안에 든 게 무엇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준혁이랑 무슨 사이시길래, 저한테 이런 걸 내미시는 건가요.’

    연희는 바들거리는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기며 태연한 척 물었다.

    ‘제 신원에 대해선 아까 드린 명함으로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고.’

    ‘…….’

    ‘도련님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 거라면, 도련님 일가에서 번거로운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사람이란 설명 정도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군요.’

    말이 꽤 길었지만,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시종일관 귀찮아하던 남자의 표정이 더욱 선명해지기만 했을 뿐.

    연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물어봐야 남자는 절대 제 가려운 구석을 찾아 시원하게 긁어주지 않을 것이리라.

    그렇다면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눌 차례였다.

    ‘제가 이걸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연희는 전에 없이 똑 부러지는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질문 끝에 곧바로 휘어진 남자의 입술이 비웃음을 한껏 담고 있었다.

    치욕스러웠다. 그래도 참았다.

    준혁을 향한 마음이 그 순간 느꼈던 치욕보다는 훨씬 더 컸으니까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착각이란 걸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가도 없이 만신창이가 될 일만 남게 되겠죠?’

    남자의 목소리는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만신창이가 될 거란 소름 끼치는 말과는 어떻게도 어울리지 않는 톤이었다.

    ‘신연희 씨는 물론 신연희 씨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까지 전부 다치게 될 겁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거예요. 회장님은 당신께서 베푼 호의와 배려를 거절한 사람에게 절대 자비롭지 않으시거든요.’

    그 말까지 듣고 났을 때, 연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 누구도 모르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것.

    정준혁을 제 목숨보다 더 사랑했지만, 제게 소중한 사람들의 인생까지 전부 걸 정도는 아니었나 보다.

    그날 연희는 그 생각을 수도 없이 되뇌며 처참히 무너져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떠나야만 하는 걸음을 억지로라도 떼어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제게, 어떻게 감히.

    연희는 드물게 분노한 얼굴로 준혁을 날카로이 응시했다.

    준혁을 향해 처음으로 지어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 간절히 바라건대 준혁이 이제라도 실수했다는 걸 깨닫길 바랐다.

    그러나 준혁은 깨닫긴커녕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피식거릴 뿐이었다.

    “이제야 나를 봐줄 마음이 생겼나 봐.”

    “…….”

    “나는 내내 너만 보고 있었는데.”

    차분한 말소리와는 달리 차갑게 식은 준혁의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명백히 원망하는 눈초리였다.

    그게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연희는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거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준혁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 비서, 오전에 결혼식이 끝나면 공항으로 갈 거냐고 물었던 거 기억합니까.”

    “예, 대표님.”

    “그 질문에 대한 대답 지금 하죠. 우린 공항이 아니라 강원도 별장으로 갑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에 연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단 직감이 밀려왔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다음으로 이어진 준혁의 말은 운전 중인 비서가 아닌 제게 향한 말이었으니까.

    “윤세라와 정준혁의 예정된 신혼여행지는 스위스였지. 그래서 고민했어. 신부는 바뀌었지만 그래도 신혼여행은 예정대로 갈까.”

    준혁은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차갑게 식은 그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젖어 드는 것도 같았다.

    “연희, 너랑 해외로 여행을 갔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애틋했던 과거를 헤매는 것 같던 그의 동공이 초점을 되찾은 순간, 연희는 숨을 멈추어야 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

    순식간에 단호해진 목소리가 연희의 귓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동시에 눈 안에 박힌 준혁의 미소는 남자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게 꼭 신연희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놓을 것처럼 굴던 10년 전의 정준혁 같았다.

    “아무도 없는 데로 널 데려갈 거야.”

    연희는 긴장한 얼굴로 입 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제 몸에 달라붙은 준혁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뼈까지 발라 먹을 것처럼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훑어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연희는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신혼여행으로 예정된 일주일 동안 널 침실 밖으론 단 한 걸음도 내보내지 않으려고.”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정준혁은 신연희 없이 보내야 했던 10년을 보상받기 위해 신연희를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괴롭힐 것이다.

    정준혁은 그런 남자였다.

    신연희의 사탕발림 한마디에 완전히 녹아내렸다가도 짓궂은 장난 한 번에 미친 집착을 보이곤 하는.

    고작 장난 한 번에도 광기를 보이는 그인데, 말없이 사라진 10년을 절대로 순순히 넘어갈 리 없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일주일 내내 침실에만 가둔다고 해도, 네가 지루할 틈은 잠깐도 주지 않을 테니까.”

    준혁이 비뚜름하게 입술을 휘어 올렸다. 집착과 광기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비소였다.

    연희는 망연하게 눈꺼풀을 내려 닫았다.

    도무지 계속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정준혁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10년 전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완전하게 암전이 된 것만 같았다.

    더는 윤세라도, 연정을 살리기 위해 선택한 돈도, 그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회포는, 그걸로 대신하자.”

    그저 눈앞의 남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자신을 난폭하게 군림할지도 모를 악마일 뿐이라는 것.

    그 사실만이 연희의 이성을 좀먹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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