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집착 (1)화 (1/80)

1. 가짜 신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연희는 벙찐 얼굴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세라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음, 내 목소리가 작았나?”

세라가 악의라곤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눈만 끔뻑거렸다.

“나 대신 결혼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연희는 실소를 뱉었다.

다시 들어도 기가 막힌 말이었다. 그런데 세라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짜로 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대가는 충분히 지급할 생각이거든요.”

더해진 말은 더욱이나 가관이었다.

연희는 입 안 가득 헛웃음이 차올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들어나 볼 작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는 그 대가란 것이 과연 무엇일지.

“나 대신 결혼식장에 들어가면 그 대가로 1억, 그리고 결혼 생활을 1년 유지해준다는 조건으로 4억 더 얹어줄게요.”

순간 연희의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이런 반응쯤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세라가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리는 게 보였다. 그게 못내 자존심이 상하는데,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액수의 돈이었다.

그때 세라가 재차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1년만 신연희 씨랑 나랑 바꿔서 살자는 소리예요.”

“…….”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내가 신연희 씨의 인생 중 1년을 5억으로 사겠다는 말이고요.”

연희는 무릎 위로 가지런히 모아 올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5억이라니.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아도 만져볼 수 없을 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큰돈이 윤세라에겐 뭐가 그렇게도 쉬운 것일까.

마음 같아선 그딴 돈 필요 없으니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이죽거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도 없게 마침 돈이 필요한 참이었다. 액수가 크면 클수록 좋았다.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그쪽이랑 나, 지금 당장 옷만 바꿔 입고 나가도 내가 신연희고 당신이 윤세란 줄 알 거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세라의 표정이 필요 이상으로 해맑았다.

연희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진짜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똑같이 생겼지?”

세라가 상체를 당겨 앉으며 연희의 얼굴을 집요하게 뜯어 보았다.

연희 역시 세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봐도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돈이 필요한 때라는 걸 알고 하늘이 기회를 준 건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할래요?”

연희는 다시금 제게 향한 질문에 숨을 멈추었다. 세라는 좀 전보다 더욱 말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새빨간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는 말은 아닌 척하고 있으면서도 온통 날을 세우고 있었다.

“내가 신연희 씨한테 한 제안.”

“…….”

“없던 일로 할까요?”

연희는 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혼란한 머릿속이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윤세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것 같았다.

연희는 밀려오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쯤 병원 침상에 누워 고통받고 있을 연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자 홀린 듯 입술이 움직였다.

“아니요. 윤세라 씨 제안…….”

차마 없던 일로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받아들일게요.”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

연희는 드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드레스엔 화려한 비즈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박혀있었다.

며칠 전 윤세라를 통해 들었던 말에 의하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직접 만든 드레스라고 했다.

감히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예쁘다.”

연희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 윤세라가 드레스 이야기를 꺼냈을 땐 코웃음부터 쳤었다.

드레스가 다 똑같은 드레스지,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드레스는 뭐고, 아무리 기업 간의 인수합병과 같은 결혼이라지만 결국 자신이 입게 될 드레스인데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려고.

윤세라에겐 고작 길바닥 벌레만도 못한 게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일 텐데, 그렇게나 가치 있는 드레스를 제게 입힐 거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꿈도 꾸지 않았던 그 드레스를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이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다.

정말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게 되는구나.

순간 드레스로 가득하던 연희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 흐릿해졌다.

‘오늘부터는 여기서 지내도록 해요. 식사는 때 되면 룸서비스가 올 거고, 뭐 그거 빼면 딱히 불편할 건 없겠죠?’

윤세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무섭게 들어야 했던 말이었다.

‘이런 거로 계약서를 쓰는 건 괜히 증거 남기는 꼴밖에 안 되니 찝찝해서 싫고, 그렇다고 내가 오늘 처음 본 신연희 씨를 덥석 믿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거든요.’

‘이것저것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요.’

‘뭐, 지금 일하는 명품관 직원 자리 말하는 거예요? 그걸 말하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걸 제외한 것들도 마찬가지고요.’

연희는 말없이 눈을 끔뻑거렸다.

침묵을 긍정의 의미라고 생각한 건지, 세라가 퍽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세라는 팔짱을 끼곤 우아하게 걸음을 떼었다.

멈춘 자리는 연희의 등 뒤였다.

세라는 연희의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곤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 손길을 따라 속절없이 몸을 돌린 연희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는 다르게 고압적인 힘이 느껴졌다.

다리를 멈추자 보인 건, 자신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여자였다.

윤세라의 비서라고 했던가.

세라는 그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서는 꽤 유능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뭐든 이 비서한테 이야기하면 돼요. 신연희 씨가 바라는 게 뭐든, 이 비서가 다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이 비서 통해 처리하는 거로 합시다.’

그 말로 보름간 연희의 감금 생활은 기정확실화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핸드폰은 비서에게 빼앗겼고, 그로써 외부와 연결될 수 있는 고리가 전부 끊기고 말았다.

윤세라는 이틀에 한 번, 아무리 늦어도 사흘에 한 번은 호텔 스위트룸으로 찾아왔다.

처음엔 너무 똑같아 소름 끼치던 얼굴도 계속 보다 보니 적응이 됐다.

그래서였을까.

이틀 전, 연희는 스위트룸으로 찾아온 세라에게 경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결혼하게 될 남자는 누구예요? 그러니까, 원래라면 윤세라 씨가 결혼하게 됐을 그 남자요.’

그냥 막연한 궁금증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이 1년 동안 함께 살아야 할 사람이니, 이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질문에 윤세라가 뭐라고 했더라.

‘그거야 결혼식장에 가 보면 알게 될 일 아니겠어요? 어차피 이틀 뒤면 알게 될 텐데.’

‘…….’

‘신연희 씨는 그냥 내가 주는 돈 받고 내 결혼식 날 나 대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면 돼요. 어차피 돈이랑 맞바꾼 1년인데, 남편이 누구인지가 중요해요?’

그래, 그랬던 것 같다.

돌려 말했지만, 결론은 ‘넌 알 필요 없어.’였다.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저 역시 돈에 시간을 판 우스운 주제였지만, 대신 결혼할 사람을 찾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도 당당할 수 있는 건지.

연희는 헛웃음이 다 날 것 같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배에 조금만 더 힘주시겠어요?”

별안간 곁에 서 있던 도우미가 말을 건네왔다.

상념에 잠겨 있던 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복부를 압박하는 힘이 느껴지자 숨 쉬는 게 쉽지 않았다.

불편한 것투성이였지만, 연희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인내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던 드레스가 금세 몸에 걸쳐졌다.

연희는 드레스를 입은 제 모습을 감상할 새도 없이 급히 움직여야 했다.

탈의실에서 나오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이 비서의 모습이 보였다.

“예. 지금 막 드레스 갈아입으셨습니다. 아직까진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고, 식도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이 비서의 말만 들어도 상대가 누구일지 알 것 같았다.

윤세라, RM그룹의 외동딸이자 저를 이곳에 대신 보낸 그 여자일 것이다.

연희는 묵묵히 기다렸다.

통화가 곧 마무리되고, 이 비서가 연희의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왔다.

“예식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비서의 말은 고작 그게 다였다.

결혼식을 목전에 두고도 신랑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게 못내 기가 막혔지만, 연희는 입술을 고집스레 맞붙였다.

자신이 불만을 토로한다고 달갑게 들어줄 사람은 이 자리에 그 누구도 없었다.

***

치장을 마친 샵에서 나와 곧장 올라탄 고급 세단은 5성급 호텔 중에서도 최고라 손꼽히는 호텔 앞에서 멈추었다.

RM그룹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맞닥뜨리는 것마다 상상 이상이었다. 그 탓에 순간 넋을 놓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 식장 앞엔 정 대표님이 계실 거예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 대표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내용 있으면 적당히 맞춰서 간단하게만 대답하시면 됩니다.”

걸음을 재촉하는 이 비서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정 대표.

그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 될 사람인 건가.

연희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세라의 말마따나 어차피 하게 될 결혼이고,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제가 다시 보좌할 예정이니 그때까지만 잘 대처해주세요.”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눈을 피해 은밀히 움직이길 한참, 어느새 널따란 홀이 보이고 이 비서의 말대로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식장 입구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연희는 고개를 바짝 숙였다.

몇 번을 봐도 윤세라와 신연희는 다른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 생김새가 똑같았다. 그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언제나 두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미 벌여놓은 일이니 잘 마무리하자고 다짐을 하는데, 그사이 남자의 곁에 도착하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부케를 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 금세 들통이라도 날 것만 같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에 선 남자의 쪽에서 기대하지 않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생각과 달리 장난기가 그득한 목소리에 연희는 더욱이 긴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어쩐지 남자의 목소리가 익숙했다.

“많이 긴장했나 보네, 내 신부님이.”

다시 한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연희는 자신이 가짜 신부란 걸 들킬까 봐 얼굴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왜, 왜…….”

연희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손에 쥐고 있던 부케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많이 놀랐나 보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벌렁거리는데 귓속을 뚫고 들어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부케를 주워 연희의 손에 쥐여주었다.

연희는 떨리는 손으로 부케를 꽉 움켜쥐었다.

갑자기 몰려온 긴장감에 목이 바짝 타고, 목울대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연희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쁘네, 내 신부님은.”

연희의 동공이 더욱 거세게 뒤흔들렸다.

정준혁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턱시도를 입고 있는 남자는 10년 전 자신이 버리고 떠난 남자, 정준혁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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