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어지럽지만, 흥겨운 이 자리에
[ ※ 마지막 추천곡 : Haley Reinhart – Can’t Help Falling In Love ]
「시은재」앞에 검은 대형 세단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고 무경은 좌석의 흔들림이 아까부터 신경 쓰여 곁의 사람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무경의 곁엔 숍에서 스타일링을 받고 온 요원이 있었다.
순경복 대신 새하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투피스와 라인이 돋보이는 상앗빛 컬러의 코트를 걸쳐 입고, 자유분방한 히피펌 대신 스트레이트 머리를 한 요원은 오늘도 곁에 있는 남자를 뻑이 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 새로운 모습에 색다르게 꼴려서는, 근처 호텔에서 한 시간만 달라는 말을 했다가 요원에게 나가 죽으라는 심한 말만 들었다.
요원은 요 며칠 무슨 말도 못 하게 예민하게 굴었지만 무경은 누구보다 그녀를 이해했다.
무경 역시 제 형, 누나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는 일이 아직도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데 너는 어떨까 싶고.
너에겐 진심으로 유감이다. 동녘과 또 얽히게 되어서. 동녘과 백야는 참으로 지독한 인연이지 않은가.
무경은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태호가 들고 있는 손거울을 보면서 느슨했던 넥타이를 끌어 올려 목을 조이고 중심을 맞췄다. 그러다가 요원의 한쪽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 떨리는 그녀의 다리를 일순 멈추게 했다.
“그만 좀 떨어. 나까지 떨리게.”
무경이 웃으며 요원에게로 얼굴을 돌리는 순간,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제 눈앞에 갑자기 들이밀어진 핸드폰 때문이었다.
“저 지금 이분들 만나러 온 거 맞아요? 이분들하고 대면해야 해요? 밥도 같이 먹고요?”
눈매를 가늘게 찡그리며 바라본 액정 속엔 하태경과 하가경이 있었다.
존나 무섭게 생기긴 했네, 씨발.
속으로만 생각하며 무경은 그 핸드폰을 제 얼굴 아래로 끌어내리며 선선히 미소 지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차 돌려도 괜찮아. 굳이 안 만나도 돼.”
요원의 허리를 한쪽 팔로 휘감아 제게로 더 당긴 무경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서 이런 말을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호텔로 가자. 코트 입고 해볼래?”
농담 같지만 진담이었고, 진담이었지만 요원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농담이기도 했다.
요원은 그런 무경에게, 어쩜 24시간 365일 내내 그런 생각뿐이냐며 짜증을 낼 정신도 없는지 저를 안고 있는 무경을 단호하게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만날래요. 만나고 싶어요.”
요원의 얼굴이 꽤나 비장해 보였기 때문에 무경은 안심하며 다시 슈트 재킷을 챙겨입었다.
“그런데요.”
무언가 골똘히 상념에 잠겨있는 것 같던 요원이 또 질문했다.
“만약에 누님이 저한테 돈 봉투 던지면서 무경 씨와 헤어지라고 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말 모르겠어요.”
거울을 보며 슈트 앞쪽에 요란하지 않은 패턴의 행커치프를 꽂아 넣은 무경이 피식 웃었다. 태호도 그 타이밍에 조금 웃었던 것 같다. 저 작은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 꽤 귀여웠기에.
“유치하게. 두 사람은 돈 봉투 같은 거 안 던지니 안심해.”
“그럼 두 사람은 뭘 던지는데요?”
“꼭 뭘 던져야 해?”
“안 던져요?”
“굳이 무언가를 던질 필요가 있을까. 전화 한 통이면 되는데.”
“뭐가 되는데요?”
“듣고 싶어?”
“궁금해요.”
음, 소리를 내면서 무경은 태호가 들고 있는 거울을 위로 조금 더 높이 올렸다. 태호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저었으나 무경은 그 행동을 보지 못하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한 채 입술을 뗐다.
“전화 한 통이면 너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수렁에 빠져 불행하게 될 거야.”
태호가 한숨을 삼키며 요원을 살폈다. 요원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진 것을 보았다.
“진흙 헤치고 걸어 나올 시간도 없을걸. 나오려고 하면 더한 곳에서 구르게 할 테니까.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뜰 수밖에 없게 만들 거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아주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거울에서 시선을 뗀 무경이 요원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자기야. 내가 더 무서워.”
온갖 겁은 다 줘놓고 자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다.
잠시 세단 내엔 짙은 침묵이 감돌았고 무경을 조금 질린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요원이 한숨과 함께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뒷좌석 문을 덜컥 열고 먼저 내렸다.
요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은재의 정문을 통하여 자취를 감추었고, 그 차가운 뒷모습을 세단 차창 너머로 황망한 듯 쳐다보던 무경이 거울로 시선을 다시 돌리며 헛웃음 쳤다.
“궁금해하길래 친절하게 대답해 준 건데 왜 저래? 나 뭐 잘못한 거예요?”
몸에 딱 떨어지는 카키색의 캐시미어 코트를 챙겨 입으면서 무경은 태호와 방 기사에게 정말 모르겠단 투로 물었다.
“입장 차이인 것 같습니다.”
겉으론 찍히지 않기 위해 에둘러 표현했지만, 무경을 바라보는 태호와 방 기사의 눈빛은 조금 전 요원의 것과 매우 흡사했던 것도 같다.
세련된 차림으로 세단에서 몸을 내린 무경이 그 위용이 느껴지는 시은재의 정문 앞에 섰다.
겨울은 겨울인 모양이다. 귓바퀴를 긁고 지나가는 세찬 겨울바람과 함께 나무의 잔가지들이 흔들렸으니.
갑자기 담배가 말려서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탕, 탕, 두 번 올렸을 때 제삼자의 손이 끼어들어 무경이 물고 있는 담배의 끝에 불을 붙였다. 태호의 손이었다.
“채 순경님께 전해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무경의 앞으로 의문의 붉은 꽃다발이 내밀어졌는데 씨발 누가요, 라고 까칠하게 되묻기도 전에 무경의 고개가 왼편으로 꺾였다.
시은재와 조금 떨어진 거리엔 택시가 한 대 있었고 그 앞엔 꽃다발을 전해준 상대도 함께였다.
목도리를 칭칭 감은 얼굴빛이 더욱 좋아졌다.
무경의 모든 사고회로가 잠시 정지한 듯이, 편안해진 그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무경은 곧 입술 사이에 위태롭게 물려있는 담배를 중지와 검지 사이로 옮겨가면서 볼멘소리를 터트렸다.
“살아는 있었네, 저 빌어먹을 새끼.”
연락이 오래도록 끊긴 이유로 질타하는 음성엔 물론 반가운 기색도 함께였다.
“한국엔 언제 들어왔대요?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
무경이 도현의 안위를 살피듯 그의 행색을 눈으로 샅샅이 살피며 곁을 지키는 태호에게 질문했다.
“저도 어제 알았습니다. 말씀드리지 말라 신신당부하셔서. 아마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신경 좀 써요. 우리 동녘의 귀한 막내님이신데. 쟤가 내 연락받기 싫어하는 거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
“예.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도 미국에서 잘 지내나 보네. 누구 동생인지 신수가 아주 훤해.”
저를 바라보는 무경의 눈을 피하지 않으면서 도현이 곧 해사한 미소와 함께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1초, 2초, 3초…… 다시 허리를 세운 도현이 무경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고 무언가를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마 축하를 해준 것 같다.
무경은 그런 도현의 새하얀 미소에서 어릴 적 도현을 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한참을 얽혀있었다.
그렇게 1초, 5초, 10초…….
“밥 먹고 가.”
역시 무경의 입 모양을 읽었던지 도현이 고개를 저으면서 무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작별 인사이자 금세 찾아온 이별이었다.
무경은 동생과의 짧은 만남이 굉장히 아쉬웠으나 동녘과 얽히고 싶지 않은 저 마음을 모르지는 않으니.
아쉬운 마음을 애써 뒤로하고 성가시다는 얼굴로 손을 한번 허공에서 털었다.
그 나름의 다정한 작별 인사를 모를 리 없는 도현이 미소 지으면서 뒷좌석에 올랐다.
문이 닫혔고 택시는 미련 없이 떠났다.
눈앞에서 점차 작아지는 택시의 뒤꽁무니를 하염없이 좇으면서 무경은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렇게 시은재의 정문이 덜컹, 다시 한번 열렸고 그 사이로 몸을 들이던 순간에 하늘에선 눈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앞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
시은재는 오늘 동녘 家를 위해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중요한 날이라는 무경의 한 마디에 시은재 사장이 내린 대담한 결정이었다.
오직 동녘 家를 위해 최선을 다해 모시겠다는 말도 덧붙였고, 무경은 시은재 사장의 영업력에 새삼 감탄했던 것도 같다.
최소의 인원만 배치해달라는 무경의 부탁에 넓은 특실 안엔 무경과 요원을 제외하고 단 두 명의 직원만이 상주했다.
원래는 가야금을 직접 연주하는 곳인데 음악 소리도 죽은 방은 무덤 속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자꾸만 몸을 떠는 제 곁의 요원을 조금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무경이 그녀의 찻잔이 비었음을 알아차리곤 손가락을 튕겼다.
대기하고 있던 한복 차림의 직원과 눈이 맞자 무경이 요원의 찻잔을 가볍게 턱짓했다.
조속히 다가온 직원은 요원의 잔에 갈근차를 채웠다.
“……감사합니다.”
제 찻잔을 채워준 직원에게 공손하게 인사한 요원이 미약하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그러쥐었다.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번지니 그나마 조금 살겠다.
“떨지 마, 제발. 나 마음 아파.”
무경은 요원과는 다른 여유로운 얼굴로 갈근차를 음미하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네에.”
요원은 긴장한 얼굴로 두 번 대답하며 무경의 옆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삼, 무경의 날렵한 얼굴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백야마을의 백수와 순경으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디 인사라도 나눠보았을까, 싶은 거다.
고로 우리는, 이렇게 되기 위해 그렇게 만났던 모양이다.
“오십니다.”
미닫이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은재 사장의 우아한 목소리에, 요원의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며 찻잔을 놓쳤다.
아, 씨발 뜨거!
하필이면 그 찻잔이 무경의 허벅지 위로 낙하했기에 무경이 육성으로 욕설을 짓씹을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어, 어떡해.”
그러나, 사색이 되어 저를 바라보는 요원의 낯빛이 하도 안쓰러워서, 무경은 그저 직원이 건네는 물수건을 받아 제 허벅지 위를 툭툭 가벼이 털면서 무던히 웃어주었을 뿐이다.
“괜찮아.”
무경의 그 말을 듣지 못한 요원은 여전히 경직된 상태로 잔뜩 얼어서는 곧 열릴 문만을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이 꼭 죽을 날을 받아 저승사자를 기다리는 얼굴과도 같았다.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곧 열릴 문만을 바라보고 있을 적에, 요원의 손가락 사이에 무언가가 부드럽게 밀려 들어왔다.
“채 순경.”
요원이 시선을 아래로 뚝 떨어트렸다. 제 손가락에 끼워진 것은 반지였다. 그녀가 거절했다가 다시 받기를 원하던.
“나 좀 제발 가지면 안 될까.”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반지를 가만 바라보다가 시선을 올린 요원이 무경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
“가질게요. 주세요.”
말과는 달리 여전히 굳은 얼굴이다.
“요원아. 이거 봐.”
그녀와는 대비되는 천진한 웃음을 지어 보인 무경이 요원의 축 처진 어깨 위에 제 턱을 올리면서 그녀의 손을 붙잡아 한곳으로 끌었다.
“네가 받아주니까 바로 섰어.”
“뭐 이런 미친!”
“농담.”
무경이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로 요원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침투하듯 부드럽게 깍지를 끼었다.
그 체온에, 그 따스함에, 그제야 요원은 편하게 호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엄청난 용기가 단전에서부터 차올라 가슴속을 단단하게 꽉 메웠다.
자기야, 괜찮아. 채 순경, 다 괜찮아. 네 옆엔 언제나 내가 있어, 하무경이 있어, 라는 응원 같은 읊조림이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기분이었으므로.
창밖으론 아직도 싸락눈이 흩날렸고 우리는 오늘도 함께였다.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 아닌, 싸락눈이 흩날리는 겨울의 어느 날에도.
드르륵, 지옥문이 열리며 그들이 들어왔지만 그래도 괜찮다.
당신과 나, 동녘과 백야는 여전히 함께였으니.
어지럽지만, 흥겨운 이 자리에.
끝.
[-후에(後)]
무경과 요원은 축복 속에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한 명 낳게 됩니다. 그 아이는 서울에 살면서도 사투리를 심하게 썼는데, 무경은 언제나 이 점을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빠도 엄마도 전부 서울말을 쓰는데 말이지요. 그 답은 갑순에게 있었고 동녘 家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인물은 하해경 회장 이후로 아이가 처음이 됩니다. 아마 하해경 회장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 아이를 엄청 아꼈을 겁니다.
그리고 도현은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해외 출장 때문에 미국을 찾은 라주연과 운명적으로 얽히게 됩니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동녘과 백야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습니다.
짧지 않은 호흡이었음에도 불구, 분에 넘치는 사랑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작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