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15화 (115/116)
  • 외전 9화. 싸락눈이 흩날렸다

    사나운 기세로 달려온 누군가에 의하여 무경의 뒤통수가 퍼억 불시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후렸다는 것보다 조금 더 센 표현이 있다면 아마 그 표현이 맞았을 거다.

    그 한 방에 무경은 뇌진탕이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앞이 다 흐려졌으니.

    씨발, 어떤 새끼가?

    아픈 제 뒤통수를 붙잡으며 막 뒤돌아본 무경의 동공이 평소와는 달리 커다랗게 벌어졌다.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진 두 눈은 감당할 수 없는 당혹감에 질려 버렸다. 검은 눈동자 앞으로 시린 공기가 화살처럼 지나간다.

    “아, 아버님.”

    “그 입 닥치쇼! 아버님은 누가 아버님이여!”

    눈앞에서 삽이 올라왔고 급하게 바지를 추켜올리며 요원에게서 떨어져 나간 무경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버님. 우선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제 말을 먼저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사실 할 말은 없었다. 해야 뭐, 아버님 딸이 하도 꼴려서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였을 뿐.

    “아버님은, 무슨! 그짝 벨트나 채우고 말하쇼!”

    불행 중 다행인지, 일섭은 그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아. 실례했습니다.”

    무경이 얼른 일섭에게 등을 보이며 뒤돌아 벨트 버클을 철컥 채웠는데, 아무리 제 딸과 연애하는 놈이라 할지라도 제 딸을 덮치려는 남자 놈을 눈앞에서 실제로 마주하니 이것은 울화가 치민다는 표현만으론 형언할 수 없었다. 이것은 딸을 가진 아버지만이 알 수 있는 심정이었으니.

    “오메, 생각할수록 터져 불것네. 나가 오늘 저놈을 그냥!”

    “채, 채일섭 씨!”

    반쯤 벗겨졌던 순경복을 허겁지겁 챙겨입은 요원이, 무경을 패 죽일 듯이 튕겨 나가려는 일섭을 본능적으로 막아섰다.

    “옴마? 딸! 니 아부지한테 채일섭 씨가 모냐잉!”

    일섭은 제 딸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퍽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폭력은 안 돼요, 아버지. 부탁드릴게요. 저 사람 때리지 마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고개 숙이는 제 딸의 모습에 일섭은 결국 삽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빼며 자신과 거리를 조금 벌리고 서있는 무경을 쳐다보았다.

    쳐다본다기보다는 노려보는 시선에 가까웠고 늘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던 일섭은 여기 더는 없었다.

    ***

    오전에 컨테이너에서 있었던 해프닝은 일단락되었고 일섭의 끓는 마음도 어느 정도 진화가 된 상태였다.

    무경과 같은 것 달린 일섭은 그를 이해하려 백번 천번 노력했다.

    자신 역시, 요원의 엄마와 연애할 적엔 비닐하우스에서도 거리낌 없이 바지를 내린 적이 있지 않았던가.

    젊었을 땐 다 그렇지. 그래야 젊음이지.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니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일섭은 하무경이란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특히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면서 자꾸 도와드릴 것이 없냐 물으며 근처를 배회하는 저 남자가 이젠 부담스럽다 못해 성가실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싫냐 하면, 호에서 비호로 갔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처음부터 하무경이 비호는 아니었다. 오히려 채일섭은 하무경을 호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어떤 家의 자식인지, 백야마을에 오게 된 불순한 의도 등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하무경을 향했던 호감은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그렇다고 또 하무경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다. 딱히 피해를 준 적은 없던 사내이니.

    제 딸이 하무경과 연애한다는 것을 알았을 적에도 딱히 반대하거나 말리진 않았다.

    딸에겐 미안하나,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관계임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시간일지라도, 훨훨 타올라서 젊었을 때나 해볼 수 있는 쌉싸름한 사랑을 마음껏 해봐라, 하는 마음이었다.

    남자 때문에 아파도 해보고, 녹록지 않은 인생도 한번 경험해보라고. 이참에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삶을 배웠으면 하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빗나가서 그들은 1년을 넘게 만났고, 새벽녘 그 시간에 만취한 상태로 자신들을 찾아와 서운하다고 말하며 고개 숙이는 남자를 보아하니 무언가 대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부사 나무 아래, 반사 필름을 깔아주는 겨울 작업을 하던 일섭이 고개를 올려 건너편의 무경을 쳐다봤다.

    사과 위에 유백 봉지를 씌울 때도 느꼈지만, 남자의 손은 제법 섬세했고 반사 필름을 까는 작업이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임에도 그는 생각보다 잘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슈트를 입고 작업하는 모습이 여간 불편해 보이는 것이 아닌지라 일섭은 남자를 조용히 컨테이너 안으로 불렀다.

    “꿀물이요. 따뜻하게 한잔해요잉.”

    “감사합니다.”

    일섭이 무경의 앞에 따끈한 꿀물을 내려두었다. 이동식 히터기도 무경에게로 돌리면서 일섭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려다가 잠시 주춤거렸다.

    아까 제 딸과 이곳에서 뒹굴었던 것을 생각하니 또 열불이 터져서 한 대 쥐어박을까 욱했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몸을 앉혔다.

    “지금부텀 나가 하는 야그를 기분 나쁘게 듣진 마소.”

    “어떤 말씀이든 기분 좋게 듣겠습니다.”

    “하무경 씨. 나는 하무경 씨 같은 *사우를 둘 마음이 없어요잉.”

    강한 직구였으나 무경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꿀물을 마셨는데 그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다.

    상처를 받진 않을까, 걱정했던 일섭이 다 민망해질 정도로. 그래서 일섭은 조금 더 진솔해져 보기로 했다.

    “하무경 씨. 나는 우리 딸이 평범한 남자한티 시집가서 *이삐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요잉. 나가 다는 몰라도 하무경 씨랑은 고런 인생을 못 살 것 같으요. 우리 딸이 피곤해질 것 같고 안 행복할 것 같으요잉.”

    어딘지 무딘 말 속 가라앉은 음성에서, 일섭이 이 결혼에 대해, 또 저에 대해 얼마나 회의적인지 무경은 알 수 있었다.

    무경은 함묵한 채 꿀물만 마셨다. 입꼬리를 미약하게 올리고 미소 짓고 있는 모습에서 실망감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시군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둔 무경이 미소 띤 입술을 떼었다.

    “저 또한 이 자리를 빌려 아버님께 솔직해져도 되겠습니까.”

    “나를 아버님이라고 안 부르면 안 되것소?”

    “장인어른이라 부른 것도 아닌데 제가 하는 건 다 싫으신 겁니까.”

    “나가 불편해 그라요.”

    “채 사장님이라 불러드리면 아버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시겠습니까.”

    일섭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무경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좋습니다, 채 사장님.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경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최대한 일섭에게 예쁜 말만 골라 해서 그를 안심시킴과 동시에 점수를 따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은 계속해서 그렇게 되뇌고 있었다.

    그래서 무경은 분명, 따님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인생을 살게 해주겠습니다, 저는 정말로 자신이 있으니 저 좀 예쁘게 봐주십시오, 이런 틀에 박힌 입에 발린 소리만 하려고 했었다.

    정말이다. 무경은 정말로 그랬었다.

    그런데 이 망할 놈의 입이 말이다.

    “채 사장님 생각엔 채 순경이, 아니, 채 사장님의 예쁜 따님이 저와 헤어지면 행복해질 것 같습니까?”

    뇌의 신호를 따르지 않고 또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히려 더 불행해지진 않을까요?”

    “머시여?”

    일섭의 얼굴이 불시에 비딱해졌다.

    “평범한 남자를 만나 예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글쎄요.”

    거기에서 그만뒀어야 했는데 무경의 입술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멋대로 움직였다. 할 말은 꼭 해야만 하는 이 빌어먹을 성격 때문이거나, 어쩌면 요원이 다른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존나 다 빡이 돌아서 더 오기가 발동되어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새끼들은 더 못 가져야 맞지.

    “저는, 글쎄요.”

    무경이 고개를 한번 삐딱하게 기울였다가 원상태로 돌렸다.

    “그 평범한 남자가 알고 보니 도박에 빠진 답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겠고. 그 평범한 남자가 알고 보니 술만 마시면 인사불성이 되어 여자를 폭행하는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일 수도 있겠고. 그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애까지 낳았는데 글쎄 그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백수가 되어서는 우리 채 순경을 경제적으로 고생시키는 쓰레기일 수도 있겠고.”

    죄다 쓰레기로 끝나는 극단적인 예시에 일섭은 어이가 없었으나, 또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우리 딸이 슬마 그란 놈이랑 결혼을 하것소? 남자 보는 눈이 을매나 탁월한 애긴디.”

    “그, 남자 보는 눈 탁월한 ‘애기’께서 사랑하는 남자가 바로 접니다, 채 사장님.”

    허를 찌르는 통에 일섭의 말문이 다 막혔고 말문이 막힌 틈을 타서 무경은 쐐기를 박았다.

    “도박, 음주, 폭행. 셋 중 하나만 저질러도 저는 나락입니다. 지켜보는 눈들이 워낙 많거든요. 뭐, 꼭 지켜보는 시선들 때문만은 아니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성격이 애초에 못 됩니다. 보기보다 마음이 여려요, 제가. 만약 저와 살아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진다면 그건 부족해서가 아니라 과해서일 텐데…….”

    해결방안을 찾는 사람처럼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리며 허공을 잠시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던 무경이 다시 일섭에게로 시선을 박으며 단언했다.

    “부족한 것보단 과한 쪽이 낫다고 보는데요.”

    가만 듣고 보니 그가 뱉는 모든 말은 자기 어필에 가까웠다.

    “서론이 꽤 장황했는데 이 말의 요는 말입니다, 채 사장님.”

    해결방안을 찾은 사람처럼 깍지 낀 손 위에 느른하게 턱을 괸 무경이 일섭과 눈을 똑바로 맞추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채요원은 제 옆이 답이라는 겁니다.”

    여전히 심란한 일섭의 표정 변화를 살피면서 무경은, 제게로 돌려져 있는 이동식 히터기를 일섭에게로 돌렸다.

    “물론 채 사장님 말씀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평범하게 사는 거, 좋죠. 평범하지 않은 건 언제나 피곤한 일이니까요.”

    돌연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무경이 뚜벅뚜벅, 한 곳으로 걸어갔다.

    “저와 살면 피곤하긴 할 겁니다. 전 평범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 피곤함이 불행함과 비례한다고 보진 않습니다.”

    포트와 꿀, 티스푼을 한 아름 챙겨 들고 온 무경이 일섭의 빈 잔에 제일 먼저 꿀을 채웠다.

    “그리고 채 사장님께서 모르시는 게 한 가지 있는데요.”

    포트의 각도를 비스듬히 기울여 따뜻한 물을 채우고.

    “평범하지 않았을 때 오는 행복감 같은 거 말입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일섭의 잔을 티스푼으로 휘젓는 행동을 일섭은 가만 지켜만 보았다.

    “제 옆자리가 누군가에겐 불행이라면, 결혼하자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청혼을…… 했소?”

    “예. 그런데 거절하더군요. 집안에서 반대하는 사람과는 결혼하기 싫다면서.”

    의외에 말에 일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채 사장님.”

    달콤한 꿀물이 완성된 잔을 일섭의 손에 매너 좋게 쥐여주면서 무경은, 잔보다 더욱 따뜻하게 웃었다.

    “따님 참, 잘 키우셨어요.”

    안연한 목소리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하는 듯했다.

    “도저히 사랑하지 않곤 못 배기게.”

    고작 이 몇 마디에 일섭의 마음이 줏대 없이 다 흔들렸으니.

    .

    .

    .

    후일담 [後日譚]

    어느 날에 백야엔 겨울밤이 찾아왔다.

    요원은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제 집안 어르신들과 대면했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벌써 몇 번째 있던 일이라는 거다.

    “할머니, 아버지.”

    대청마루 위에 무릎 꿇고 앉은 요원은, 갑순과 일섭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또한 같은 행동 패턴이었다.

    “저요.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와 안 맞는 사람인 것도 잘 알아요. 그런데 헤어질 수 없어요. 헤어지고 싶지가 않아요. 저 사람하고 헤어지면 제가 정말……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두서없는 말뿐이었지만 모두 다 진심이었다.

    요원이 입술을 꾹 다물자마자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그 공허함 속에서 요원의 절실한 얼굴은, 세찬 겨울바람이 흔들고 지나가는 대로 흔들렸다.

    “딸아.”

    한참이 더 지난 뒤에야 일섭이 요원을 불렀다.

    “네, 아버지.”

    요원이 죄인처럼 고개를 조금 더 아래로 숙였다.

    “니 엄니가 살아 있었으믄 말이다.”

    그 순간에, 깊은 심해에 빠진 것처럼 요원의 귀가 갑자기 먹먹해졌던 것 같다.

    “하 서방을 꽤 좋아했것다잉.”

    작은 정수리 위에서 일섭의 목소리가 그렇게 웅웅 울렸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그렇게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좋아만 했것냐잉. 아주 동네방네 업고 다녔을 거라고.”

    갑순의 웃음소리도 웅웅 이명처럼 들렸다.

    “…….”

    요원은 좋아서 날뛰는 대신, 고개를 사선으로 틀어 겨울 마당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꽃은 이미 다 졌지만 봄이 되고 나면 또 활짝 필, 제 어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던 앞마당을.

    하아, 요원이 입을 작게 벌리자 하얀 입김이 서리처럼 까만 밤에 끼였다.

    어느새 그들의 눈앞으로 싸락눈이 흩날렸다.

    *이삐게 – 이쁘게

    *사우 – 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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