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녘과백야-114화 (114/116)

외전 8화. 한 번만 하자

요원은 채채 과수원 내 컨테이너에서 무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은 과수원이 오후에 일하는 날이었기에 오전엔 사람이 없었고, 백야는 좁은 동네였기에 두 사람을 좇는 눈동자와 귀들이 많아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엔 이곳이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요원이 도착하고 15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컨테이너 문이 열리며 진한 바디워시 향을 풍기는 남자가 들어왔다.

어제 입고 온 슈트와 그 위에 캐시미어 코트를 걸친 남자는 오늘도 눈이 부셨다.

왁스를 바르지 못한 남자의 머리칼이 평소와는 달리 이마 위에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있었는데, 1년 하고도 5개월을 본 얼굴인데 왜 볼 때마다 새로운지는 요원이 품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오셨어요?”

“어. 오래 기다렸어?”

“15분 정도?”

“추웠겠다.”

요원이 앉아있는 맞은편 소파에 몸을 앉히면서 무경은 습관처럼 다리를 옆으로 넓게 벌렸다.

그 정도로 심란하였으나, 애써 괜찮은 척 코트 주머니를 뒤적여 멘톨 틴 케이스를 꺼낸 그가 요원에게 먹겠냐고 물어보듯 그녀의 앞에 틴 케이스를 내밀며 눈썹을 한번 들어 올렸다.

요원은 고개를 저었고 틴 케이스를 다시 거두어간 무경이 제 손바닥 위에 멘톨 캔디를 약처럼 탈탈탈 쏟아 입안에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어금니로 와드득, 씹는 남자의 모습을 조금 신기한 것 보듯 쳐다보던 요원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첫마디를 뱉었다.

“제가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응. 네가 그랬지.”

“생각, 많이 해봤는데요.”

와드드득, 사탕을 깨는 소리가 잠시 멈추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한껏 벌리고 있는 다리 사이에 깍지 낀 손을 내려두면서 무경은, 며칠 전과는 달리 나긋한 태도를 유지했다.

“내 말 먼저 듣고 할래?”

요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무경은 따끔거리는 목을 애써 무시하며 갈라진 음성을 뱉었다.

“연애만 해.”

요원의 옅은 동공이 평소보다 조금 크게 뜨였다.

“결혼하자 강요 안 할게. 처음부터 강요해서도 안 될 문제였고.”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요원이 입술을 벌렸으나 연신 침묵만이 흘렀다.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무경은 비스듬하게 입매를 휘어 웃었다.

“이제 해. 무슨 말을 하든 오늘은 얌전히 듣기만 할 테니.”

매력적인 얼굴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도 잊지 않으면서.

“밤새…… 생각해봤어요.”

가지런한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요원이 자세를 더욱 바르게 하고선 기나긴 침묵을 깨부쉈다.

“무경 씨 말이 다 맞아요. 나는 내 마음과는 별개로 그간 무경 씨를 너무 쉽고 빠르게 포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걸어 잠근 마음속의 빗장을 열고 조금 느린 진심을 전한다.

“가만 생각해 보니, 반대가 있다면 무경 씨 쪽이 더 심한 게 맞고 여러모로 곤란한 사람은 나보다도 무경 씨일 텐데. 무경 씨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티 내거나 표현한 적 없었어요.”

어딘지 모르게 침울한 여자의 얼굴이 점차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오히려 내게 어머님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어머니께서 너를 참 많이 좋아하실 것 같다고, 그렇게 용기를 줬지만…… 나는 되레 그런 무경 씨에게 화를 내면서 대체 왜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사람 힘들게 하고 부담을 주냐고…… 나한테 대체 왜 이러냐고…… 너무 어렵다고…….”

무경은 여자의 침울한 얼굴을 마치, 고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턱을 괸 채 가만 바라만 보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나답지 않게 변해갔어요. 누구 말처럼 자격지심으로만 똘똘 뭉쳐서는 자꾸만 투정 부리고 불평했던 적이 많았는데 무경 씨는 내게 단 한 번도 너는 왜 그딴 평범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날 이렇게 난처하게 만드냐고 불평한 적 없었어요.”

우리 채 순경은 참 비단처럼 곱기도 하지, 팔불출 같은 생각엔 끝이 없고 무경은 오늘은 정말 경청만 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자의 적갈색 눈동자가 다시금 서서히 올라와 남자를 서글프게 응시한 채 전한 진심은 그랬다.

“어제도 말했지만 하무경 씨가 너무 좋아요.”

한번 터진 말은 브레이크가 고장 나버린 것처럼 그렇게 잘만 터져 나왔다.

“하루하루 놀라울 정도로 더 좋아져요. 그래서 더 자신이 없었고 좋은 만큼 한편으론 빨리 놓고 싶기도 했어요.”

요원은 무경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는데 그 처연한 미소가 남자의 마음을 꽤나 아프게 두드렸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워 나는, 그만큼 더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방어했던 걸지도 몰라요.”

처음 전해 듣는 여자의 참마음에 무경의 가슴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빠르게 날뛰었다.

“하무경 씨는 그간 나를 위해 많은 노력 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정작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건 바로 나였어요.”

시선을 다시 아래로 뚝 떨어트린 그녀가 고해성사하는 사람과도 같은 얼굴로 말한다.

“하무경 씨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간 강한 척했었지만, 아니에요. 하무경 씨가 내 곁을 떠나는 상상만으로도, 하무경 씨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이렇게나 숨이 쉬어지질 않고 그래서 죽을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릴 것 같은 아련한 얼굴을 보며 무경은 아랫입술을 잘근 한번 씹었던 것 같다.

울지 마라, 너 제발 울지 마. 지금 내 앞에서 너 울면 나는.

“전에 하무경 씨가 내게 ‘너는 참 좋겠다. 그렇게 다 쉬워서.’라고 말했었는데. 아니에요. 쉽지 않아요. 어려워요. 하무경 씨와 헤어지는 건 내게도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둔 채로 요원은, 손톱 끝으로 인조 가죽 위를 불안정하게 긁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제 노력하고 싶어졌어요. 우리 두 사람을 위해서. 왜냐면 나는 하무경 씨를 진심으로…….”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고개를 다시 들어 올린 요원이 무경과 눈을 맞추며 쓰게 미소 지었다.

“사랑하니까요.”

용기를 낸 여자의 미소는 황홀했고 아, 하는 탄성 같은 소리가 남자의 잇새에서 절로 흘렀다.

맨정신에 전해 듣는 사랑한다는 고백은, 술에 전 상태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으므로.

“무경 씨 가족 만날게요. 만나보고 싶어요. 얼굴 보고 인사드리고 싶어요. 용기 내고 싶어졌어요. 노력하고 싶어졌어요.”

미약하게 떨리는 여자의 손끝엔 진심이 배어 있었고 목덜미에서부터 갑자기 소름이 돋아난 무경은 어떠한 한기를 느꼈다.

“반지 받을래요. 다시 주세요. 결혼할래요. 하고 싶어요, 너무.”

그녀가 비현실적으로 예뻐서. 진짜 존나게 환장하게 예뻐서.

나는 대체 전생에 어떠한 대단한 업적을 남겼기에 너를 쟁취하였나, 하는 우스운 생각마저 진중하게 곱씹어볼 정도였으니.

아 씨발, 안 되겠다.

느닷없는 욕설을 뱉으면서 무경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어났다, 라는 표현만으로는 사실 어딘가 좀 부족하다. 단단한 소파가 뒤로 밀릴 만큼이나 맹렬한 기세로 몸을 일으켜 세웠으니.

“다들 오후에 출근하는 거 맞아?”

빈 소파 위에 코트를 벗어 던진 무경이 말했다.

“한 번만 하자.”

아니, 그것은 청하는 것에 가까웠고 이로써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위인이 아니라 네 앞의 나는 그저 춘향이에 몸이 단 변 사또일 뿐이라는 것을.

***

남자의 말을 듣고도 이해를 못 한 요원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뭘…… 해요?”

“섰어.”

“대체…… 어느 부분에서요?”

“글쎄. 꼴리네.”

“그러니까 대체, 어느 부분에서요?”

요원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얼굴로 반복적으로 물었으나, 무경은 그저 빈 의자에 슈트 재킷까지 벗어 던지면서 요원에게로 다가설 뿐이었다.

“몰라. 나는 네가 그냥 꼴려.”

남자의 화려한 미소에 요원은 넋을 놓았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통에 뒤로 꺾인 여자의 새하얀 목덜미를 붙잡으며 허리를 내린 무경은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맞물렸다.

처음엔 급하지 않던 키스가 점차 다급해졌다.

놀라 벌어진 요원의 입술 틈으로 민트 향이 감도는 혀를 성급하게 밀어 넣으면서 무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요원의 몸은 점차 뒤로 젖혀졌다.

“음…….”

신음하면서 한 손으론 무경의 목덜미를 붙잡은 요원이 다른 손으론 소파 헤드 위를 꽉 부여잡은 채였는데,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 그녀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그런 여자의 눈 감은 얼굴을 엇비슥이 깔아보며 그녀의 혀를 몇 번 더 빨던 무경이 제 손을 아래로 내려 벨트 버클을 철컥, 열고 지퍼를 내렸다.

희한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꼴렸지만, 오늘따라 신기하게 더 꼴렸기 때문이다.

1년 5개월이면 조금 잦아들 법도 한데 이상하게 하루하루 몸은 더 꼴렸다.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욕설을 짓씹은 무경이 요원의 몸을 아주 손쉽게 돌려 소파 위에 엎드리게 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자기야, 내가 늘 말하잖아요.”

당황한 요원의 꽃내음이 나는 목덜미를 뒤에서부터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면서 무경은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얼굴은 내리고 엉덩이는 더 들라고.”

“시, 싫은데요…….”

“왜 싫어요. 자기 이 자세 좋아하잖아요. 이제 싫어졌어요?”

“아침부터 너무…… 짐승 같아서요…….”

뒷말을 길게 늘이는 요원이 귀엽다는 듯, 요원의 귓바퀴를 입안에 넣고 야릇하게 빨던 무경이 작게 웃었다.

“아하. 이 자세는 밤에만 좋다고? 알았어, 자기야. 그럼 우리 아침엔 사람처럼 하자.”

말하면서 무경이 소파에 앉아 이번엔 요원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무경이 다리를 벌린 채여서 그런지 남자의 욕망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얼른 벗자, 요원아. 오빠가 지금 좀 급해.”

무경이 눈썹을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요원의 하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기 문 안 잠겨요. 누가 올 것 같은데.”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로 요원은 문 쪽을 힐끗힐끗 살폈는데 그 모습이 꼭 예쁜 사과를 닮아있었다.

와씨, 오늘따라 더 죽겠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야.

다시 한번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욕설을 중얼거린 무경이 요원의 바지를 벗기려 들었으나 요원은 다급한 사내의 손을 또 한 번 저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 오면 우리 둘 다 정말 큰일 나요. 저는 지금 순경인데. 순경복 차림으로 이런 곳에서 이런 못된 짓을 하면.”

“이야, 많이 늘었네, 우리 자기.”

요원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무경의 귀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그 모든 말들이 꼭 음담패설로 들려 아래로 더욱 피가 쏠렸다.

“더 해봐. 오빠 흥분된다.”

패팅하듯이 그녀의 은밀한 부위에 제 하체를 문지르면서 무경은 요원의 목덜미에 입 맞췄다.

“하아, 그만, 해요.”

요원은 밭은 숨을 내쉬면서 무경의 어깨를 뒤로 밀어냈지만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그깟 힘에 물러날 리 없다.

“누가 오는 것 같아요.”

“그것참 스릴 넘치네.”

“아니 그거 아니고. 정말 안 돼요. 제발 그만해요.”

애원하는 통에 요원의 목덜미가 닳도록 핥고 빨던 무경이 설핏 눈매를 찡그렸다.

“내가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어?”

제 위에 앉아있는 요원을 다정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무경이 재차 되물었다.

“응?”

흥분한 아래와는 달리 신사 같은 얼굴로.

“그만할까요, 채 순경?”

짐승처럼 달려들던 그가 막상 사람이 되니, 요원은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감정을 느꼈다.

그 표정을 사냥꾼처럼 빠르게 낚아챈 무경이 씩 웃으며 요원의 허리를 제 품으로 당겼다.

“대답 잘 들었어요.”

엄마야, 요원이 대뜸 그런 비명을 질렀다. 무경이 요원을 순식간에 소파 위에 눕혔기 때문이다.

남자의 손에 하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서 이젠 멀미가 다 날 지경이었고 요원은 심각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어지러워요…….”

“알았어, 자기야. 몇 번만 흔들고 빨리 쌀게.”

“제발 좀…….”

“지금은 콘돔이 없는데 밖에다 싸도 될까요? 이왕 밖에다 하는 김에 얼굴 위에 한 번만 하게 해주면 안 돼?”

“아 제발…….”

여전히 남자의 음담패설에 적응을 못 한 요원은 변태 새끼, 란 뒷말은 차마 하지 못한 채로 벌게진 얼굴만을 양손으로 가렸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자세를 취한 무경은 제 슈트 바지와 드로즈 사이에 손가락을 걸고 한꺼번에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는 일은 이 세상에 정말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컨테이너 문이 갑자기 쾅 하고 열리며 우려하던 일은 벌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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